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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09.30. 주일오전 -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마가복음 4)


막0114to15 -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pdf


20120930SM (#1).mp3.zip




성경본문 : 마가복음 1장 14-15절


우리는 지금 복음을 비교적 편하게 믿고 있지만, 우리가 그렇다고 온 세상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세계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한 해 동안 몇 명이나 목숨을 잃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에 책을 읽다가 거기서 이런 그 자료를 발견하고 저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자료는 그 책을 쓴 저자가 데이비드 바렛이 펴내는 ‘옥스포드 세계 기독교 사전’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이었는데 제가 그 구절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1980년에는 대략 27만 명의 크리스찬들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1980년대에 구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는 순교 당하는 수가 감소했다. 1995년에는 약 15만 7천명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얼마 동안 매년 수십만의 크리스찬이 목숨을 잃을 것으로 예상했다” 다른 곳에는 이런 자료도 있었습니다. “지난 10년간 전세계적으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로 숨진 순교자 수가 100만명에 달한다는 보고가 나왔다. 미국해외선교연구센터가 발행하는 잡지 IBMR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10년까지 발생한 순교자는 아프리카 콩고 내전 사망자를 포함해 100만명에 달하며, 1990년부터 2000년까지는 수단과 르완다 사태를 포함해 모두 320만명이 기독교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고됐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들을 읽거나 들을 때, 우리는 아, 저렇게 힘들게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구나하고 생각하다가도 그러면 하나님은 도데체 무엇을 하고 계신가, 왜 하나님은 저런 사람들을 지켜주지 않으시는가 하는 의문에 빠지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잘못되면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믿어도 별 수 없구나 하는 현실에 대한 패배감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도 힘든 질문이지만,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런 질문으로 질문해 올 때, 더 힘든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실은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14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요한이 헤롯의 손에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몸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칭찬하셨던 요한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는데 모든 것을 바쳤던 그가, 말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만들정도로 하나님의 큰 일꾼이었던 그가 헤롯의 손에 잡혔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 요한이 앞으로 어떻게 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우리에게 더 충격적인 일이 됩니다. 그는 목이 잘려 죽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헤롯의 객기 때문에 계집아이의 춤 값으로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헌신한 사람에게, 또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큰 일을 했던 그 사람에게, 누구나 다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는 사실을 인정했던 그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사탄에게 지신 것입니까? 정의는 무너져 버린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질문을 드려도 속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이 어렵고 힘든 질문의 답을 얻어야 합니까? 우리는 과연 이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14절은 이렇게 이어져 갑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히고 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붙잡힌 일과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는 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세례 요한의 붙잡힘, 그리고 그의 죽음은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없어서는 안될 일이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억울하게 잡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의미없는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이 그 일에 무관심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고, 그를 그 죽음에서 건지실 능력이 없으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붙잡힘과 죽음은 요한에게도 그렇고 하나님께도 커다란 승리였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꼭 있어야만 하는 것, 결국 그것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생명입니다. 생명만 있다면 어쨋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가장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런 자신의 생명을 다른 일을 위해서 내놓는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자신의 목숨보다도 그 일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소명, 예수님을 위한 왕의 길을 준비하는 일을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아니, 자신에게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긴 것입니까? 세례 요한을 붙잡고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댄 사탄이 이겼습니까?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이기고, 또 하나님께서 이기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대승을 거두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지신 것입니까? 사탄에게 패배당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가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자리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래서 우리들을 사탄의 손에서 다시 빼앗은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탄에게 가장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신 것입니다. 요한은 죽음으로써 크게 이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써 가장 크게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그것은 복음이 일하는 방식, 그리고 하늘나라가 일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의인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께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무기인 셈입니다. 


세례 요한이 붙잡힌 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패배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이기도 했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위한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것을 보는 눈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시력이 바로 믿음입니다. 살다가 보면 의롭고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 분노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도 하나님을 닮은 정의감을 주셨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섣불리 세상에 소망이 없다고 낙담하거나 계속 그 분노에 사로잡혀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 살다보면 우리 자신이 이런 일의 피해자가 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정직하게 했는데, 바르게 했는데 내가 원하는 열매는 커녕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고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엄청난 오해를 받고 핍박을 당하기도 하죠. 이럴 때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같은 일을 지켜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때도 성급하게 정의가 다 죽었다고 체념하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려는 노력이 쓸데 없는 것이라고 결론내리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진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 분의 정의를 포기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바로 내가 이긴 것이고, 그런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기신 것입니다. 내가 손해와 오해를 무릅쓰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갔고, 그래서 이 세상에는 아직도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고, 악이 아니라 선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의 삶으로 증명해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은, 우리가 사탄에게 지는 순간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고통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될 때가 아닙니다. 정반대로 눈에 보이는 유익과 편안함을 위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눈감을 때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승리, 사람들이 원하는 승리를 거머쥐려고 할 때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아닌 사탄에게 내어줄 때 그 때가 바로 끝이고 또 영적으로 패배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비로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이 거기까지 순종했을 때 하늘나라는 이 땅에 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록 그것이 사람의 눈에는 다 끝난 것처럼 보이더라도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 있는 우리를 승리자로 여겨 주시며 칭찬해 주십니다. 성도는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이렇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세상과 자신의 인생을 이런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는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런 시력이 회복되기 시작할 때 성도는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는지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참된 성도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그리고 자신이 삶을 바라볼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지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그 분에게는 결코 끝이 없다는 것, 그래서 나의 끝이 그 분의 시작이고 나의 실패가 그 분의 승리가 된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포기가 없고 절망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참된 승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도 오히려 힘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복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도착해 있다’는 아주 긴박한 소식이었습니다. 사탄이 제 세상인 듯 설치던 옛 시대는 이제 끝장 나기 일보직전입니다. 때가 찼습니다. 그 반역의 시대는 터지기 일보직전의 풍선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곧 있으면 참되신 왕이신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그분의 온전한 다스리심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루거나 혹은 생각해 볼 시간도 없습니다. 다른 기회도 없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태도를 정해야 합니다. 예전의 왕을 그냥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면서 자신이 영혼을 내어주는 댓가로 그 왕이 주는 달콤한 독약을 받아먹으며 멸망을 향해 가든지, 아니면 새 왕을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순종하여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든지 빨리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 새 왕이 다스리시기 시작하시면 그는 저절로 반역자가 됩니다. 새 왕의 적이 되고 맙니다. 이것을 피하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왔고 그래서 익숙해져 있는 그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예루살렘과 로마의 삶에서 광야의 삶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좋은 지도자가 세워지면 자신이 속한 곳이 그냥 두어도 천국처럼 변해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른 지도자, 정직한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그렇게 원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바르고 정직한 지도자가 세워진 후 그가 지도력을 발휘하는 곳이 사람들이 바라는  그런 좋은 곳이 되려면 꼭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기 속한 사람들, 그의 지도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지도자의 바르고 정직한 지도력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르지 않은 지도자가 세워졌을 때보다는 낫겠지만 그 곳은 기대처럼 좋아지지 않습니다. 국민들은 자기 이익 때문에 불법을 행하고 탈법을 일삼는데 대통령 한 사람이 나라를 좋은 나라로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조금이야 나아지겠지만 실제로는 별 영향이 없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이 다스리신다는 그 사실만으로는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천국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그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나의 삶은, 그리고 내가 속한 곳은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나의 삶 속에,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 속에 하늘나라가 임하기를 원한다면, 일초라도 빨리 왕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옛 왕에게서 떠나 새 왕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고, 그 왕의 법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처음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처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우리는 처음 복음이 전해졌을 때보다도 훨씬 더 긴박한 상황에 있습니다. 그 때는 아직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뚫고 들어오기 이전이었지만, 지금은 그 일이 시작된지 벌써 2000년이 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그 분의 다스림이 강해져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완전한 다스리심이 완성될 때까지 남은 시간이 훨씬 더 줄어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회개하라는 요구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훨씬 더 긴급한 요구이고, 앞으로도 점점 더 그렇게 되어져 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살던 사람들보다 시간이 훨씬 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온 우주가 완전히 그 분의 통치를 받게 되는 순간을 향해서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시대를 제대로 읽어야 하고, 그리고 그 시대에 우리의 삶을 맞추어 가야 합니다. 지금은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시대입니다.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신 시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고 또 넓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왕으로 다스리고 계신다는 이 복음,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사탄의 요구에 따를 필요가 없으며, 또 따라서도 안된다는 복음,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충분히 사탄을 이겨낼 승산이 있다는 복음, 우리의 삶이 이제는 로마의 삶과 예루살렘의 삶에서 광야의 삶으로, 그리고 다시 에덴의 삶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이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또 다시 의혹이 생기실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니 아직도 하나님께서 왕이시라는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고, 여전히 이 세상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이, 사탄의 방법이 다스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 나만 손해보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분명히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런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사탄을 왕으로 삼고 사탄의 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 그 분의 다스리심은 숨겨져 있는 보화처럼, 반죽 속의 누룩처럼, 그리고 땅에 뿌려진 겨자씨처럼 잘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이 이런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향한 믿음의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치지 않으면 실력을 알 수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유혹이 없으면 믿음은 결코 증명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정의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패배하신 것 같아 보이는 현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신 아주 어려운 시험문제입니다. 정답을 맞추고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험문제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 눈에는 뭐가 보이느냐?”고 말입니다. “너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같은 세상에서 내가 다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이느냐? 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 보이느냐?”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서말 반죽을 온통 제 세상으로 만들어 가는 그 적은 누룩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는 그 작은 겨자씨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진흙탕 속에 뭍혀있는 하늘나라라는 가장 값진 보화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청년시절에 제가 다니던 교회에 ‘죽어요 그런데 안 죽어요’라는 책을 쓰신 안이순 사모님께서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눈이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눈이 땅에 속한 것들에만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단순한 한 마디가 저에게 얼마나 큰 도전과 깨달음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늘나라가 보이십니까? 이미 이 세상 속으로 뚫고 들어온 하나님의 통치,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하늘나라가 느껴지십니까? 우리에게 이 나라가 보일 때, 이 나라의 영광스러움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 나라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도 어렵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나라를 본다면, 그 보이지 않는 나라가 이미 이 땅 위에서 점점 커져가고 든든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지어주시는 그 멍에를 쉽게 멜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눈을 뜨십시오. 흐려졌던 시력을 회복하십시오. 그리고 하늘을 보는 연습을 하십시오. 보이지 않게 숨어있는, 알 수 없게 이 세상 나라에서 자라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는 연습을 하십시오. 그 나라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 나라가 성큼 다가 올 것입니다. 우리 눈 앞에 영광스럽게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를 위해서 사는 일이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 나라를 위해서 당하는 어려움을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제 이야기를 드리면서 끝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굉장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정말 교회 밖에 몰랐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내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그 진짜 이유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신대원에 들어가기 1년 전하나님께서는 저에게는 그 이유를 발견하는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 였습니다. 예배 중에 하늘나라에 대한 설교를 듣는데, 제 영혼 전체에 하늘나라의 영광이 치고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이 저에게 주었던 확신이나 기쁨, 그리고 영혼까지 꽉찬 만족은 정말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때도 그만큼 기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때 생각했습니다. 이 땅에서 잠시 맛보는 하늘나라의 영광이 이렇게 엄청나다면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그 영원하고 다함없는 영광은 어떨까하고 말입니다. 그 때 부터 제 삶 속에는 하늘나라가 점점 더 커져가게 되었습니다. 반죽 속의 누룩처럼 하늘나라가 저의 전존재를 점령해 가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너는 왜 살고 목회를 하느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때문에, 그 나라의 영광 때문에 살고 또 목회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 이 가슴 속에 그 나라가 있으니 저는 그 나라 때문에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어긋나가다가도 제 자리로 돌아오고, 그 소망이 되살아 날 때면 영혼의 기쁨이 회복됩니다. 이런 저런 현실적인 유혹을 받다가도 하늘나라를 생각하게 되면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믿음이 약해지다가도 그 나라만 생각하면 다시 믿음이 회복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제가 이 땅에서도 당당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이유가 되어주고 있기도 합니다. 하늘에 대한 소망은 이렇게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풍성한 다스리심을 맛보며 살아가게 해 주는 능력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쓸모있고 유익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살면서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점점 더 확실하게 이 나라에 붙들리기를 소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늘의 영광이 커지고 이 땅에서의 삶도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좋은 것은 어쩌면 대개가 아직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들 중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적어도 신앙 안에서는 이것이 영원한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나라에 있으니까요. 하늘을 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하시는 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구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서 애쓰지 않는다면 그 은혜는 그만큼 더 더디 주어질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 나라를 보여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살고 신앙생활하는 그 모든 목적이 하늘나라의 영광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매달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나라를 보여주시고, 또 그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 나라때문에 사는 삶의 진짜 능력이 무엇인지 알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나라를 알고 그 나라를 믿기에 내가 졌다고 여겨질 때가 하나님이 승리하신 때임을 보고, 여기가 끝이라고 여겨지는 그 곳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시작되는 곳임을 볼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