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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10.07. 주일오전 - 나를 따라오라(1)(마가복음 5)


막0116to20 - 나를 따라오라(1).pdf


20121007SM (#1).mp3.zip




성경본문 : 마가복음 1장 16-20절


잠깐 예수님의 지난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성령님께 이끌려서 광야로 갔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사탄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신 후 광야를 에덴으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헤롯 왕에게 붙잡힌 후에 갈릴리로 오셔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예수님의 첫번째 사역지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갈릴리라고 하면 굉장히 가난하고 한적한 작은 어촌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거기 살았던 사람들은 잘 배우지도 못하고 먹고 살기도 힘든 그런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어부였던 사람들을 생각할 때, 가난과 무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죠. 그러나, 실제는 이와 다릅니다.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는 작고 한적한 어촌이 아니었고 지질이 가난한 곳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어부는 천한 직업이 아니라 당시 굉장히 인기있었던 직업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게 당시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연구들이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진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는 활발한 정치적, 상업적 중심지였습니다. 그 곳은 그 당시 세계의 여러나라들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여기를 통해 군대들과 무역상들, 외교관들이 오고 갔습니다. 자연히 그 지역은 그런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어울리는 곳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여타의 그런 도시들처럼 영적이고 도덕적인 타락이 다른 곳보다 훨씬 심했습니다. 언제나 온갖 문화가 만나서 만들어 내는 상스러운 유행들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고, 지극히 물질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갈릴리는 온갖 영적인 문제를 모두 안고 있는 어찌보면 세속적인 문화가 사고방식의 중심지였고 우리 생각과는 반대로 부유한 지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야 말로 사탄이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가장 좋은 사탄의 본거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처음 사역지로 택하신 곳이 바로 이런 곳이었습니다. 광야의 전쟁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은 이제 아얘 사탄의 본거지로 쳐 들어와서 그들의 안마당에 폭탄을 던진 것입니다. 갈릴리는 누가 뭐래도 사탄의 땅이었습니다. 사탄이 그렇게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떡하니 거기 나타나셔서 “이제 하나님 나라가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왔다. 이제 이 땅은 하나님의 땅이다. 그 분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폭탄을 던진 것입니다. 이 폭탄은 불발탄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는 요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거기 살던 유대인들은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첫번째 열매가 바로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이었던 네 명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긴급한 선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그렇게 즉각적으로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제자가 된 것은 단순히 제자로 부르심 받은 것에 대한 응답만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 앞에서 보인 회개의 열매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없는 광야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서 여기로 나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이 들끓는 갈릴리, 사탄이 가장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는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사탄과 한 판 붙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은 예수님의 두번째 승전지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승리를 통해서 첫번째로 되찾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하나님께서 손쓸 수 없을만큼 완전히 망가진 땅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내지 못할 환경이 있을까요? 우리는 갈릴리에서의 우리 주님의 승리를 바라 보면서 그 속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우리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는 환경이라고 여겨지는 환경도 있습니다. 또  도저히 예수를 믿지 않을 것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예수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환경, 또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도 되찾으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가족,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동료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권면해도, 그리고 이렇게 오래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도 아직도 요지부동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사탄의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그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최강의 전사가 되셔서 사탄의 진을 깨뜨리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되찾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망이나 포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이 일을 시작하셨으니 완전히 이루실 때가지 계속하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 믿음으로 소망을 잃지 말고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의 친구가, 가족이, 그리고 동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를 도로 찾으실 것입니다. 실망이 찾아오고 낙심이 찾아올 때마다 갈릴리를 생각하십시오. 거기서 승리하시고 제자들을 불러내신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그 때 처럼 싸우고 계시는 우리 주님께 여러분의 믿음을 붙들어 놓으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우리의 인내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런 갈릴리에서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두 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는 이야기이고 두번째 이야기는 세베데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두 개이지만 전하고 있는 메시지와 패턴이 아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시고 그들은 따랐다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의 다른 점이 있다면 세부적인 과정이 조금 달랐을 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이 두 이야기의 같은 점과 다른 점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묵상하고 공부함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같은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번 모두 주님은 지나가다가 그들을 보았고, 보자마자 불렀습니다. 주님은 그저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그리고 ‘조금 더 가셔셔’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고기잡이에 몰두해 있을 때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행동은 굉장히 즉흥적이고 또 계획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 부르심은 굉장히 성급한 것 같고 별다른 의미가 없는 부르심처럼 느껴집니다. 성경도 분명히 그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주님은 어떤 행동이나 어떤 선택을 하실 때 즉흥적으로 그리고 목적없이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언제나 가장 완전한 때에만 움직이십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나다나엘과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알려주듯이, 주님은 이 사람들 속에 무슨 마음이 들어있는지,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속속들이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바로 그러한 온전한 앎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사람을 부르시기 전에 이미 갈릴리 사람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와 있음을 선포하셨고, 그 나라를 위해서 회개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이 네 사람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복음으로 인해서 네 사람의 마음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가를 거니셨던 것, 그리고 조금 더 지나가신 것은 모두가 다 그런 아심과 준비 끝에 이루어진 마지막 행동이었고, 그 마지막에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사자가 사슴을 잡는 것은 마지막 한 번의 공격을 통해서 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사자는 그 공격을 위해서 몇 시간 동안이나 사슴을 추격하며 기다립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마치 사자의 그러한 마지막 공격과도 같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네 사람을 부르신 타이밍 또한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왜 한가한 때, 그래도 그들이 심사숙고할 수 있을 때 그들을 부르지 않으시고 아침에 이제 막 고기잡이를 하려는 그 정신 없고 분주한 때에 그들을 부르셨냐고 말입니다.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게 더 적당해 보입니다. 그 중요한 일을 하면서 왜 굳이 그 때 하셨는지 우리로서는 참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다른 이야기는 아주 짧게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이 네 사람이 고기를 잡고 있는 상황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냥 뭉뚱그려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라고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말이죠. 성경이 필요없어 보이는 것을 기록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아주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그 필요없어 보이는 내용을 통해서 꼭 필요한 것을 발견하기를 원하셔서 성경의 바로 그 곳에 그 단어와 내용을 넣어두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던질 때’ 부름을 받았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앞의 두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고, 뒤의 두 사람은 이제 일을 막 끝내고 내일 일을 위해서 주변을 정리하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뭐가 같죠? 네 그들이 ‘일을 할 때, 자신의 직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다르죠? 그렇지만 언제 부르심을 받는지 그 때는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또 우리를 특별하게 부르시는 때는 아주 특별한 때이고,  장소 또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면 만사를 재쳐놓고 기도원이나 자기만의 장소로 들어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어부가 고기잡이에 몰두하는 것은 결코 특별한 때가 아닙니다. 그 시간이야 말로 가장 평범한 때이고, 또 가장 자신의 삶에 열심을 낼 때입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보십니다. 보시고 찾아오십니다. 또 거기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부르심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거기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자리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학교에 있을 때, 주부가 가사를 돌볼 때, 회사원이 회사 일을 할 때,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칠 때, 상인이 장사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자리를 결정하시고 바로 그 자리에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순간은 다 다릅니다. 같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어도 두 사람은 그물을 던질 때 부르시고, 다른 두 사람은 그물을 정리할 때 부르셨습니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여기에 일상생활의 중요성이 있고, 우리가 그 일상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고 애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평범한 순간들을 가장 특별하게 보시고, 그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순간을 선택하시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타이밍은 항상 최고의 타이밍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부르심에는 특별한 부르심이란 없습니다. 덜 중요하거나 의미가 덜한 부르심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앞서서 세례 요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어부가 어부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가볍게 여기시고 세례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며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것만 크고 무겁게 생각하실까요? 하나님께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일터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제가 목사로 목회를 하는 것만 중요할까요?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의 판단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지는 역할은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무게는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의 무게이지 일 자체의 무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목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다면, 여러분의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사건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렇게 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직장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나 제가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것이나 각자에게는 같은 무게로 바라보십니다. 목사에게는 목사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게 중요합니다. 학생에게는 학생의 자리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구요. 회사원에게는 회사원의 자리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를 비교해서 경중을 정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소명은 그 소명이 어떤 것이든지 각자에게 모두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특별한 부르심은 평범한 부르심의 연장이고, 오히려 그 평범한 부르심을 다른 모양으로 표현하는 도구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부르심에 신실할 때, 특별한 부르심도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제가 목사인데요. 그렇제만 제가 그냥 목사라는 직함만 가지고 있다고 여러분이 저를 목사로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목사 흉내라도 낼 때, 그렇게 하려고 발버둥칠 때, 조금이라도 목사 냄새가 날 때 여러분이 저를 목사로 인정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특별한 부르심이란 건 이런 것입니다. 결국 평범한 부르심에 신실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히려 그것을 맡기신 분에게 누만 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일상이 영광스러워야 특별한 부르심도 영광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 영광스러워야 비로소 우리가 하는 일도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다른 점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른 점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는 장면에만 나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물고기를 잡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물고기를 잡는 어부지?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줄께” 주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두 이야기를 다르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 두 이야기를 똑같은 하나로 묶는 중심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제자들은 모두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은 것이니까요? 베드로와 안드레,두 사람은 어부였습니다. 물고기 잡이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부라고 하면 다른 것은 잡지 못하고 물고기만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끌어 올려봐. 거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을꺼야. 내가 너희를 갈릴리 바다에서 건져 올리고 있듯이 너희들도 세상의 바다에서 내 백성들을 건져 올리게 될꺼야.”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와 안드레는  호수에 던졌던 그물을 아얘 내던져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두번째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도 버린 것은 다르지만 똑같이 결말지어 집니다. “버려두고 따르더라”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는 직업이 내가 사는 사회에 기여하는 기회이고 또 자기 실현의 도구라고 거창하게 배우지만 실제로 어떤 일을 직업으로 가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저 돈벌이가 되고 건조한 일상의 일부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심한 경우에는 죽지 못해서 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요. 성도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는 직업이 소명이라고 가르치지만 직장은 그저 직장에 불과하다고, 그저 생계의 수단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만족을 느끼는 성도들도 있지만 대개는 그 직업이 수입이 괜챦고 또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성취감을 주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이것이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당연한 것일까요? 직업은 그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가지는 것일뿐, 별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수는 없을까요?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직업, 직장으로 주신 일터의 의미를 다르게 발견하게 되면, 충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인 베드로와 안드레를 찾아가셨습니다. 그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그물을 던졌을 때 말을 거셨고, 이제부터는 그 그물에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 걸리게 될 것이고, 지금은 물고기를 죽이기 위해서 물고기를 건져 올리지만 앞으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건져 올리는 어부가 될 것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어부”라는 말을 전혀 다르게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다. 어부에는 물고기를 낚는 어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도 있다. 나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죽이기 위해서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건져 올려야 한다.” 예수님은 어부들을 어부들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어부였습니다. 이전에도 어부였고 지금도 어부이며, 나중에도 어부일 것입니다. 달라진 것은 어부의 의미였습니다. 


우리들은 대개 우리들의 직업 자체를 하나님의 소명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직업이란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도구이며 통로입니다. 그 일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일을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합당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진짜 소명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 주셨습니다. 직업 속에 숨겨진 의미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직업이 다르고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진짜로 해야할 일은 모두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일터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려서 어떤 모양으로건 하나님을 알리고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직업이나 혹은 역할 속에 숨겨져 있는 진짜 소명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자리매김해 주시는 우리의 직업의 의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 그것 자체로 나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아니라면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서 있게 하신 내 자리라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리 자체에 대한 고민은 내가 해야할 고민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할 고민은 그렇다면 그 일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 자리에서 사람낚는 어부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목회자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저의 소명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나서부터 제대로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처음 목회자가 되고 나서 어떻게 하면 목회를 ‘잘’ 할 수 있을까를 굉장히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잘 한다는 게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닌 듯 했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미에서 목회를 잘 한다는 개념으로 보면 저는 도무지 목회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그렇게 큰 능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저의 좌절감이 어땠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 좋은 결과를 남기고 또 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그게 맘대로 안되니 정말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저의 고민이 방향이 완전히 틀린 고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이 과연 그런 의미에서 목회를 잘 하라고 부르신 것인가, 잘한다고 칭찬받고 큰 업적을 남기라고 나를 부르신 것인가?’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답은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부르셨을까라는 질문이 생겼고, 그 질문에 대해서 얻은 답은 ‘잘’이 아니라 ‘제대로’라는 답이었습니다. 그게 저를 목회자로 부르신 진짜 이유였던 것입니다. 제가 이런 대답을 얻게 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는 저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진짜로 드러내고 싶어하시는 것은 그 분의 능력이 아니라 그 분의 성품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품 안에는 ‘잘’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성품 안에는 ‘제대로’라는 단어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너 일 잘 한다”고 말을 듣는 것이 엄청난 칭찬인 것 같지만, 그것은 그저 그 나의 일 처리 능력이 남들보다 조금 좋다는 말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전혀 성품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나를 향한 진짜 칭찬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것과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저에게 주신 소명을 ‘잘’이 아니라 ‘제대로’라고 이해하고 나서 부터는 제가 목회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 모릅니다. 일단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만들어 낼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사람이 잘 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이 그 일의 결과까지 만들어 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에서 자기가 바라는 만족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제가 ‘잘’ 쪽에서 ‘제대로’ 쪽으로 움직여 가면서 점점 더 결과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서야 결과는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라는 사실을 진짜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결과는 항상 하나님께 맡기고 그 과정에서만 ‘제대로’ 해 보려고 애쓰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양심의 가책을 덜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잘 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양심이 저절로 편안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잘 하려고 하다가, 내 힘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선택을 많이 하게 되기 때문에, 잘 하려고만 하면 일은 어떻게 잘 될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하려고 하면 그런 고민이 많이 줄어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제대로 하려고 하면 그 분의 뜻을 거스를 위험이 그만큼 줄어들고, 실제로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할지 몰라도 우리의 양심은 그만큼 더 편안해 집니다. 물론 업적을 요구하고 결과만을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제대로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과가 생겨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결과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제가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려고 애쓰면 결과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시는 결과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결과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로 산다는 것,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를 지키면서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합니다. 결과는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해서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를 다시 불러주시지 않는다면, 고기 낚는 어부를 사람 낚는 어부로 다시 불러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직업과 일상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나 하루 하루 흘러가는 시간의 연속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복음이 복음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은 단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진리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이렇게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달라지게 합니다. 우리 삶의 구석 구석을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대단한 것이고, 그래서 복음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복음을 제대로 만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새롭게하고 되살리는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르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 일상과 직업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드러내며 사람들은 낚아 올리는 사람으로 우리를 다시 불러주시는 그 분의 그 영광스럽고 자유로운 부르심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게 될 때, 우리 삶의 구석 구석은 제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들을 제 자리로 돌려보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우리를 다시 부르시는 그 분의 부르심 속에서 참된 삶의 의미와 영광을 회복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