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0.12. 새벽예배 -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한복음 30)


요0501to09 - 네가 낫고자 하느냐.pdf


20121012D (#1).mp3.zip




성경본문 : 요한복음 5장 1-9절

얼마 전에 추석이 지났습니다. 가을의 초입에 이런 명절이 있다는 것은 여름동안 지친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고 넉넉하게 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요즘은 예전보다는 명절에 대한 기대가 적지만 그래도 여전히 명절은 괜히 마음이 기쁘고 행복해 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좋은 때에 더 힘들어지고 슬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향이 있어도 갈 수 없는 어르신들, 또 혼자서 명절을 지내야 하는 사람들, 살림이 가난해서 오히려 이럴 때면 더 마음이 가난해 지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의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좋은 명절에 아주 특별한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곳은 바로 베다스다 연못 가였습니다. 이 연못은 예루살렘 성의 양문 옆에 있는 연못이었는데, 이 연못이 특별한 것은 가끔씩 천사가 내려와서 연못의 물을 움직일 때 거기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의 질병이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시기도 하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에 대해서 설명할 때, “낫게 됨이러라”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연못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셨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그 연못 가에는 항상 당시의 일반적인 치료로는 병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모두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었겠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딱한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38년 동안 단 한 번도 병상에서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말이 38년이지 당시의 평균수명이 그리 길지 못했고, 또 중병에 걸린 채로라면 건강한 사람만큼 오래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 사람은 지금까지의 일생의 거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지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은 다 놓아두시고 이 사람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질병이 얼마나 오래되었으며, 또 얼마나 깊은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다시 한 번 예수님을 사람을 아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을 다 아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어떤 속셈이 있는지, 얼마나 악한 생각과 비뚤어진 마음이 있는지 잘 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을 완전히 잘 알고 계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심에 따라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또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때로는 그 만남이 우리 문제의 해결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분은 항상 그 분의 백성들을 살피고 계시며 또 그 속사정을 일일히 다 헤아리시고 그 상황 속으로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 혼자인 것 같아서 낙망하고 힘들어 할 때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 주님이 항상 우리를  살피시고 계시며 그래서 내 속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런 상황 속에서 나를 찾아와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병자도 어떻게 병 한 번 고쳐보겠다고 우여곡절 끝에 연못 가에 자리를 잡고 누웠지만 그는 언제나 일순위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연못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서 병고침을 받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은 연못을 떠나야 하지만 그러지도 못합니다. 그저 거기 누워 안타깝고 지루한 세월만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곤경과 무척 많이 닮아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처하는 곤경은 도무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그냥 포기하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어째보려는 노력을 포기한다고 해서 그런 상황이 주는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뒤로 빠져버릴 수도 없는 상황... 이것은 사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일과 똑같이 닮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병자를 찾아가셔서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물으나 마나한 질문입니다. 38년동안 누워만 있던 사람이 낫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누가 낫기를 원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 병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것은 말만 본다면 주님의 말씀에 대한 대답이 될 수는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어떤 대답보다도 애절한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 대답 속에는 낫기를 너무 너무 원하지만 나는 결코 고침을 받을 수 없다는 간절함이 그것보다 더 진한 절망 속에 녹아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 절망 어린 대답 속에 들어있는 간절한 소원을 읽어내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은 그 병자를 그 자리에서 고쳤습니다. 그래서 병이 다 나은 그 병자는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를 정돈하고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살면서 수많은 문제들을 만나고 또 수없이 많은 부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그런 똑같은 문제들과 부족함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은 다른 이들보다 먼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또 부족함을 채우려는 경쟁이 너무도 치열합니다. 경쟁이란 항상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 내고, 더 힘있고 더 많이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원든 원치 않든간에 상처와 아픔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미 있는 절망에 더 큰 절망을 안겨주게 됩니다. 도와줄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 상처가 되며 그 절망과 갈증을 더 깊어지게 하는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명절이 되는 날이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더 힘들고 슬픈 날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간혹 이 세상에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패배감에 힘겨워하면서도 자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대에만 그칠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주변에는 그 경쟁에서 이미 훨씬 유리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베데스다 연못을 닮은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연못 곁에 모여있는 병자들을 닮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38년된 병자가 자기만을 생각하고 또 사람들만을 생각했을 때 그는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답을 얻고 싶었고 답을 얻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지만 결코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답을 말해 주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가라” 그 병자를 위한 답은 연못이 아니라 주님께 있었습니다. 그 연못물을 움직이는 천사나 자신을 그 연못으로 넣어줄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천사를 부리시는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답을 찾기 어려울수록, 우리의 소망이 절망에 가까울수록 답은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세상은 나와 꼭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베데스다 연못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진짜 문제는 나 자신도, 그 누구도, 심지어는 이 세상 전체가 달려들어도 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 문제가 깊을수록, 그 문제가 고통스러울수록, 그 문제가 이럴수도 없고 저럴수도 없는 것일수록 더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은 어쩌면 우리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진짜로 낫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우리 자신의 곤경과 고통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시는지도 모릅니다. 답을 원하지만 답을 얻을 수 없다고, 해결받기를 원하지만 해결방법을 모르겠다고, 정말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그런 대답을 듣고 싶어하시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안 그런 척 가리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문제가 클수록 우리의 아픔과 곤경이 깊고 거대할수록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만들어낸 절망과 갈증과 함께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은 그러한 우리의 곤경을 향해, 우리의 고통과 아픔, 공허함을 향해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참된 우리의 삶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주저앉게 만들든, 그 무엇이 우리를 절망으로 누워있게 만들든 그 자리는 우리가 다시 일어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베데스다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처음 세상을 창조하셨던 그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향해 “일어나라”고 명령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우리가 누웠던 자리를 정리해서 일어나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을 창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상은 우리에게 그저 언제 물이 동할 줄 모르는 베데스다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천사를 부리시고, 그 연못의 물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직접 우리를 풀지 못했던 문제와 곤경으로 부터 걸어나오도록 해 주시는 분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 그 분께 모두 말씀드리십시오. 그 분은 그 모든 절망을 소망을 바꾸실 것이고, 모든 곤경을 순경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항상 주님이 나의 상황을 향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며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며 매일 매일 베데스다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