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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0.16. 새벽예배 -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32)


요0519to29 - 사망에서 생명으로.pdf


20121016D (#1).mp3.zip




성경본문 : 요한복음 5장 19-29절

우리 몸은 수많은 부분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기 다른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어떤 부분도 쓸모 없는 부분이 없습니다. 각각의 부분은 제 나름대로 상황에 따라 쓰이는 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몸의 지체들 중에서 믿음생활과 가장 관계가 깊은 두 부분은 어디일까요? 바로 눈과 귀입니다. 주님께서는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마다, 엄중한 경고를 하실 때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으며, 우리의 몸 중에서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눈과 귀란 우리의 육체적인 눈과 귀가 아닌 마음의 눈과 귀, 영혼의 눈과 귀를 말하는 것이지만, 아무튼 눈과 귀가 온전치 아니하고는 믿음생활을 온전히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가 생겨날 수도,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것을 보았으면서도 자신들의 기준에서 안식일을 어긴 일에 대해서만 따지면서 화를 낼 뿐, 그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듯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그 일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라는 사실을 가장 명확하게 증명하는 증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가장 눈을 크게 뜨고 주님을 잘 알아보아야 할 주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 보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기들 앞에 서 있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단순히 어떤 중요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영원한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생명과 멸망을 가르는 유일무이한 기준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너무 배타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지 않느냐고, 다른 구원의 길도 있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그 대답을 우리가 고민하여 찾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23절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한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왜 예수님이 아니면 안됩니까?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지 않으면 안됩니까? 왜 그리스도만 믿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일을 맡기신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는 일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대접하지 않으면, 그는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그래서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어 의로워진 사람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일한 의의 길, 구원의 길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구원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볼 수 있고,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행하시는 꼭 같은 일을 보면서도, 그저 우연이라고 그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같은 일을 보면서도 그 일을 주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알 수 있으니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눈에 보이는 복보다 더 큰 복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며, 또 주님의 일을 주님의 일로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복입니다. 바로 이 눈과 귀를 통해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눈과 그 귀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 되도록 ‘영적’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눈이나 귀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편협하고 왜곡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과 귀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자꾸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무슨 계시나, 신비한 체험을 생각합니다. 환상이나 환청을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은사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대세가 아닙니다. 영적인 눈과 귀는 진리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분별력을 말합니다. 새롭게 된 이성과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것과 아닌 것을 분별해 내는 것이 영적인 눈과 귀입니다. 영적인 것을 자꾸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면 그 사람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 경험들에 붙들려서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고 그것만이 거룩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단스러운 모습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무나 받지 못하는 선물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생각은 새로워졌으며, 우리의 양심을 거듭났습니다. 영적인 눈과 귀가 막히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이 두 가지를 잘 지켜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예수 믿기 이전의 생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신 양심이 더럽혀 지지 않도록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고 투명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 영적인 눈과 귀를 가장 중요한 일에 이미 사용했습니다. 이제는 더 열심히 사용하고 또 사용해서 더 온전한 감각이 되어 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 감각을 여러분의 일상을 위해서 사용하십시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믿음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내가 하는 행동이 신앙적으로 볼 때 어떠한가를 분별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현실이라는 이유로 자꾸 타협하고,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자꾸 진리 아닌 것들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을지 몰라도 그 일이 어떤 일인지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지만,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선택을 할 때,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거듭난 사고방식과 새롭게 된 양심이야 말로 우리 신앙의 안전벨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받지 못하는 이 복을 받은 자로서 항상 감사하고 이 복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또 기도하는 일에 힘을 내며, 자꾸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느라고, 정작 보아야 할 주님의 일을 보지 못하는, 세상의 소리를 듣느라고 정작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온다고 주님은 마지막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분별력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분별력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 유지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눈과 귀가 어두워지면 우리의 영적인 분별력도 떨어져서 무엇이 하나님보시기에 선한 일인지, 혹은 악한 일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어두운 눈과 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영적인 나태함과 교만함이 그들을 그렇게 무감각한 상태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이 새벽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또 기도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일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우리의 영혼의 감각은 바로 이러한 시간들을 통해서 어두워지지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이 새로운 감각들 덕분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감각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생명이 길을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해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영적인 특권들을 항상 사용하시며, 누리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 항상 영적인 눈과 귀가 열려져 있어 주님의 눈과 귀로 세상을 보며 분별해 내는 참으로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