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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0.17.새벽예배 -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요한복음 33)


요0531to40 -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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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5장 30-40절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면서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자신을 칭찬하고 설명한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 자신의 말만듣고 그를 믿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를 교만한 사람으로, 허풍이 심한 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을 진실한 사람으로 보지않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만약 아주 믿을 만한 권위와 공신력을 가진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한 말을 그대로 사용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보증해 준다면, 사람들은 그 권위자 때문에라도 그 사람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위자를 신뢰하는 것과 그 권위자의 말을 신뢰하는 것은 따로 뗄 수 없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자를 믿는 것과 그가 소개하고 또 보증하는 사람을 믿는 것은 같은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위한 권위자요 예수님에 대한 보증자로서 말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을 잘 압니다. 그가 말씀을 선포하면 수많은 사람이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회개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를 메시야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사람들로 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내가 말하던 사람이 저 분이다. 나는 저 분의 신발끈 묶기도 감당치 못한다. 저 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라고 하며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까지 예수님께 보냈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그런 행동을 보았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 그리고 세례 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여겼던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례 요한은 신뢰하고 따랐으면서도 그가 소개한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배척하고 의심했습니다.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한꺼번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두 가지를 따로 떨어뜨려서 한 가지는 받아들이고 또 한가지는 거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이러한 불신앙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타까워하시며 또 반쯤은 화를 내시며 왜 너희들이 그토록 따르고 인정하던 세례 요한이, 메시야로까지 여기며 따르던 세례 요한이 나에 대해서 내가 메시야라고 증거하였는데도 너희들은 나를 믿지 못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이 3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세례 요한의 증거를 힘입어서 사람들의 인정이나 추앙을 받고자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런 말로라도 불신앙에 빠진 사람들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길로 이끌어 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세례 요한은 믿고 인정했지만, 오히려 그가 증거했던 예수님은 믿지 않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증거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로 해주었던 보증보다 훨씬 더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모든 이적을 목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행하시는 것을 계속해서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일을 보면서도 도무지 믿지 않고 의심만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할 정도 였습니다. 

메시야로까지 생각했었고, 그 말씀을 듣고 울며 불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던, 자신들에게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가졌던 사람의 증거도 믿지 않았습니다. 듣는 것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전하는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증거가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런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시면 도무지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기 까지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람의 편견과 불신앙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편견에 빠지고 불신에 빠지기를 잘합니다. 그리고, 한 번 가진 생각은 좀처럼 바꾸려 들지 않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복사기 회사 중에 제록스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에서 처음 복사기를 만들었기도 했지만, 너무 잘 만들어서, 영어로 제록스를 뜨라고 하면, 그 말은 복사를 해 오라고 할 정도로 복사기 회사의 대표였스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컴퓨터 붐이 일자, 자기 회사가 유명하니까 컴퓨터를 잘 만들어서 팔면 많이 팔리겠다고 생각하고, 최고 수준의 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 제록스라는 상표를 붙여서 시장에 내 놓았습니다. 물건은 나무랄데 없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컴퓨터를 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 회사가 복사기 회사로 사람의 머리에 너무 깊이 밖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제록스의 컴퓨터를 보면서 “복사기 회사가 복사기나 만들지 무슨 컴퓨터야.”라고 생각하고 아예 제록스의 컴퓨터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우스운 존재입니다. 한 번 생긴 편견은 왠만해서 깨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편견은 또한 불신으로 이어지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하면 불신앙이라는 엄청난 죄가 됩니다. 39절에 보시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서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세상 그 어느 민족도 가지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고, 그 말씀 속에 생명의 길이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말씀들이 전부 무엇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까? 여기 기록되어 있는 이 모습으로 어떤 사람이 세상에 온다면, 또 그가 와서 이러저러한 일을 행한다면, 그가 바로 내가 보내기로 약속한 구세주인줄 알고 그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 그 주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수천년동안 반복하고 또 반복되어 이야기되어 온 메시야에 대한 성경말씀들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였으면서도 막상 그 성경말씀에 한치 오차도 없이 일치하시는 분이 나타났는데도 그 분이 메시야인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 성경을 보면서도 그 성경이 이야기하는 메시야가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이상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편견이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왕의 면모를 가지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다시 찾아줄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땅위의 나라를 자신들이 원하는 강대국으로 만들어 줄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기 전에 미리 그 시각을 가지고 항상 성경을 대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수천년 동안 유일하게 성경을 알고 또 묵상해 온 사람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의 가장 깊은 이유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거도 믿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증거로도 믿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원하는 모양의 메시야만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온전한 신앙생활과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 여러가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악한 방해물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편견입니다. 편견은 신앙생활의 무서운 적입니다. 제가 목회자의 길을 걸으면서 발견한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설교를 잘하는 설교자들은 항상 설교를 잘한다는 평가를 듣고, 그렇지 못한 설교자들은 거의 항상 설교를 못한다는 평가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설교자들 개인의 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설교자들에 대한 편견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도들이 처음에 어떤 설교자의 설교를 듣습니다. 한 번, 두 번 들었는데, 설교가 정말 좋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목사님은 정말 말씀이 좋아.” 그리고는 그 다음 부터는 그 설교자가 설교할 때는 들을 준비를 하고 마음을 열고 듣습니다. 그래서 왠만큼 망친 설교가 아니면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50을 했는데도 성도들은 80이상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몇 번 설교를 듣고 “저 목사님은 설교를 잘 못하시는 것 같다”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면, 그 설교자의 설교를 들을 때 듣는 태도부터 다릅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니까 설교를 듣기는 듣지만 듣기 전에 이미 “오늘도 뭐 별 말씀 없겠지.”라고 하며 기대도 하지 않고 마음도 닫은 채로 듣습니다. 그래서 그 날 설교하는 설교자가 100을 전했다면 성도들은 50도 채 못 듣고 돌아갑니다. 그래서, 여전히 이 설교자는 설교를 잘 못하는 설교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 스스로도 성도들의 반응을 통해 자신감을 더 잃게 됩니다. 이게 편견입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신앙을 돕기도 하지만 반대로 신앙의 건전한 성장을 방해합니다. 주님은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굉장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께로 가지 못하는 것은 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더 확장시키면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신앙의 성장을 진정으로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인 편견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편견이 우리가 원하는 것만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보고싶은 것만 보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신앙의 뿌리라고 평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굳은 마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끊임없이 마음을 굳게 하는 편견과 싸워야 합니다. 저는 사람에 대한 편견 때문에 신앙에 손해 보는 수많은 성도들을 볼 때 참 안타깝습니다. 편견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으며, 메시아를 봐야할 그들의 눈을 닫아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편견은 동일하게 위험하고 무서운 신앙의 적입니다. 편견은, 고정된 생각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하고, 처리해야 할 죄입니다. 하나님께 사람에게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자신의 편견을 기꺼이 깨뜨릴 수 있는 사람만이 항상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또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여러분의 영혼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항상 새로운 은혜를 누리며 넉넉한 구원에 이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