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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0.30.새벽예배 -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한복음 42)

요0652to59 -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pdf


20121030D (#1).mp3.zip




본문 : 요한복음 6장 52-59절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실의 구석구석까지 돌보시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일들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필요한 물질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양식을 주시고... 또 정말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신지 지내놓고 보면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주시고, 또 반대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너무 풍성하게 부어주시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구체적인지 놀라울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현실적인 은혜를 주시면서 우리에게서 보기시를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계속해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며, 또 그렇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를 해결해주시고 채워주시면서 그 은혜 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 현실의 문제는 너의 아버지인 나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라. 그러면 너의 삶은 내가 채워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다 이것을 진실로 믿는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왜 나의 삶의 필요를 그렇게 반복해서 채워주시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필요를 채움받는 일에만 집중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커져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나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해서 받아내는 과정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또 현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고 기뻐하고 또 여기 저기 자랑하기까지 하지만 부족함이나 결핍이 조금 오래 지속되면 잘 견디어 내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채워주시는 삶을 살았으면 이제는 좀 느긋할 때도 되었는데, 굉장히 조급해 하고 또 쉽게 불평하고 불만스러워 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열 번이나 반복된 기적적인 은혜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았고 매일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을 먹고 살아갔지만, 광야를 통과하는 내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또 하나님과 싸우는 일을 정말 습관처럼 반복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는 마실 물 때문에, 16장에서는 양식 때문에, 17장에서는 또다시 물 때문에, 민수기 11장을 보면 피곤함 때문에, 그리고 만나만 먹여주고 고기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투덜거리고 따졌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고질적인 불신앙적인 태도는 40일이면 들어갈 약속의 땅을 40년이나 걸려서 들어가게 만들었고, 그것도 1세대는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를 잘 알고 있었고, 또 왜 자신들의 조상들이 그런 고통을 당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후손들 또한 이런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지니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처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늘에서 주신 음식을 배부르게 먹도록 해주셨습니다. 단지 아주 작은 것을 가지고 감사와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일을 통해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떡을 먹고서 배부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그들에게 ‘너희들은 먹고 배가 불러지는 양식을 얻으려고 나를 찾아왔지만 나는 너희 영혼을 영원히 배부르고 만족하게 할 양식을 주기 위해서 왔고 내가 바로 그 양식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 아니 자신의 영혼과 영생을 위한 양식과 물을 눈 앞에 놓고서는 불평을 늘어놓고 또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본문 첫 절인 41절을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수군거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실은 투덜거리며 불평했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당한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투덜거리고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51절을 보면 이제는 예수님과 다투려 들고 있습니다. 마치 계속해서 물을 주시고, 계속해서 만나를 주시는데도 그것을 먹고 마시면서도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고 하나님께 대들었던 자신의 조상들처럼 영원한 만나요, 영원한 생수가 눈 앞에 있는데도 하나님께 불평하며 대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이렇게 하고 있는 이유를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그저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또 다시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하늘나라를 보여주고, 또 하나님의 풍성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예수님만이 참된 양식이고 음료임을 보여주시려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도록 하려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그 이적을 통해서 배만 불렸고, 또다시 배만 불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떡은 주시지 않고 자꾸 다른 이야기만 하시니 예수님께 불평을 늘어놓고 또 예수님께 대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 중심, 만나 중심의 신앙이 가지는 한계입니다. 그런 신앙이 굉장히 생동감있고 좋은 것같지만, 그런 태도가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발전하지 못하면 현실 때문에 하나님을 믿다가도 바로 똑같은 현실 때문에 하나님께 원망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화를 내고 대드는 그런 신앙, 정확하게는 적극적인 불신앙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한 번 두 번 하나님께서 나의 현실적인 문제와 필요를 해결해주시고 채워주시는 일을 경험할 때, 그것을 얼른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연결시켜야 합니다. ‘아하, 이제는 하나님이 나더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는구나.’라고 깨닫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리들은 자기 조상들처럼 예수님께 대들고 싸우려 들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생에 대한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듣지 않는다고 해도 들려주어야만 하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3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먹고 마신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먹고 마신다는 말은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난 번에 이미 살펴본 대로이지요. 예수를 믿는 것은 그 분을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분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만큼 절실하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죽습니까? 예수믿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에 대해서 그렇게 절실하게 생각하며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를 믿는 믿음에는 반드시 그런 절실함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육체가 음식이 자신의 생명유지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먹는 것을 확보하고 그것을 섭취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듯이 우리 영혼이 예수님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영혼 또한 그 무엇보다도 예수를 믿는 일, 그렇게 그 분을 먹고 마시는 일을 가장 절실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다른 힘에 비해서 빠는 힘이 엄청나게 셉니다. 그것은 그 빠는 힘에 자신의 모든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영혼의 생명을 위한 절실한 의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 영혼의 생명이 온통 그 분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살려면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영혼의 구원하고만 관계된 일이 아닙니다. 56절을 보면 믿음을 통한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연합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5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한 명의 인간이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입지 않으면 춥고, 자지 않으면 피곤하고... 악함을 제외한 인간의 모든 필요와 연약함을 지닌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 땅에서 사실 때 그 분은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셨습니다. 그 분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먹는 것, 그러니까 믿는 것에 대한 말씀 뒤에 나오는 말씀이니 그런 뜻을 지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셨을 때에 그 연약함 때문에 힘들어 질 때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능력으로 견디어 내시고 승리하셨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삶을 위한 승리의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분이 모든 것이 되어주시고 또 이기게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또 그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우리의 능력으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만나입니까? 메추라기 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언제든지 또 부족해 질 수 있고, 우리를 실망시킬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주었던 그 믿음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살려 주셨으니 앞으로도 살게 하실 것이라는, 그 분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나는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그 분을 향한 절실한 신뢰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분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삼고 내내 하나님을 신뢰하고 또 신뢰하며 살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를 믿고 사는 그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계속해서 먹고 마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계속 목마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계속 배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살리셨듯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게 하셔서 땅에서 풍성하고 이기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