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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1.02. 새벽예배 -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요한복음 45)


20121102D (#1).mp3.zip


요0701to09 -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pdf





날짜 :  2012년 11월 2일 금요일

본문 : 요한복음 7장 1-9절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자기 주변의 사람이 탁월한 능력이나 큰 힘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의 덕을 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안되는 것을 그 사람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자기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자기 보다 인격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훌륭하고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자기 식구나 친척, 심지어는 친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무척 자랑스러워 합니다. 이것은 조금 유치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기본적인 심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시는 이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종하고 인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대단한 능력과 인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태도가 조금은 바뀌었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런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들에게는 불만이 하나 생겼습니다. 


쉽게 말해서 집안에서 큰 인물이 났는데, 이 인물이 중앙으로 진출하지는 않고 자꾸 촌구석만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처로 나가서 이름을 떨치고 유명해져야 자신들이 덕을 좀 볼텐데, 예수님께서는 동네만 머물고 계시면서 도무지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지역으로 가려하지 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불만거리이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보아하니 예수님께서 이런 저런 이적도 행하시고 또 사람들을 끌어모아 연설도 하시고 하시는데, 그것이 형제들의 눈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또 이름을 떨치려는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런 불만과 의문을 가지고 언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아주 적당한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초막절이라는 유대인들의 큰 명절이 돌아왔던 것입니다. 이 초막절은 유대교의 절기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절기였고 그래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이 때를 잘 이용하면 큰 세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간파한 예수님의 친척 형제들은 유대 지역에 있는 제자들, 즉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핑계를 대며 예수님을 유대 땅으로 가시도록 설득하려 했습니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마치 예수님의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슬쩍 부추기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능력을 사용하셔서 무언가 큰 일을 하시려고, 크게 성공하고 인정받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어제 본문에 이어서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똑같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불신앙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났던 제자들이야 남이니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모르고 또 그래서 믿지 않는다니 이것은 더 큰 비극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사람들은 능력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자신을 앞세우며, 자기가 스스로의 길을 결정합니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더 크게 성공하는 길, 더 크게 인정받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때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때를 자신이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기 전에는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기대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자기 영광이나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길은 정반대의 길이었습니다. 1절을 보면 그 당시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이 말은 죽기 싫어서 피해다니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돌아가실 ‘때’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십자가에 달릴 때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룰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그러니까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 가장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내가 잘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성도들을 위로하고 또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저희 집안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해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많은 분들은 그것에 대해서 굉장히 의아해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댁에도 그런 일이 있어요?” 성도님들이 이해하시길 목회자의 집안은 항상 평안하고 걱정거리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의 집에 왜 그런 어려움이 있느냐고 질문하시는 것이죠. 그러나,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들은 평등합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찾아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이기 싫어도 어떤 경우에는 어려움을 당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꼭 알아야 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끝을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하는 일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놓아두시는 일 하나 하나가 나에게 항상 선하고 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한 일이건, 악한 일이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마지막이 최고로 아름다워지도록 우리 삶을 이끄십니다. 인류의 역사도 똑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과정에서 때로는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때로는 오해를 받는 것이, 심지어는 고난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때가 있습니다.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고난에 대해서 설교하고,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하면 별로 인기가 없다고 합니다. 그 대신 능력이나 성공, 축복에 대한 설교들이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특히 근래에 들어서는 사회적 조류에 편승해서 비젼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 만큼 요즈음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원치 않고, 고난에 대해서 듣는 것 조차 피하려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고난을 받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계실 때에는 항상 사람들의 오해와 미움을 받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적대하는 사람들이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건,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과 식구들이건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려고 오셨는데, 오히려 자기 백성들이 오해하였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미워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시고, 안타까우셨을까요? 때로는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디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가 행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것이 가장 완전한 것이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다보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참아야 하고, 견디어야 하는 부당한 대접과 오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럴 때는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이 땅에 계실 때에 주님은 그 모든 오해와 편견, 적대와 미움을 견디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견디며 참아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때에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선한 것임을 믿는 믿음가운데서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우리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일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자꾸 유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지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며 갈릴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유대로 가게 될 때라도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목적을 생각하면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바른 길, 정직한 길,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을 가기 위해서 뻔히 보이는 쉽고 빛나는 방법이 있는 대도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묵묵하게 가던 길을 계속 가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래야 그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동행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그것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워 집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가장 값진 진주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참으면 아름다우니라” 주님때문에, 그 분의 때를 기다리고 그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받는 “애매한 고난”은 우연히 찾아온 불운이 아닙니다. 쓸데 없는 부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줄곧 감당하셨던 것이어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크고 작은 애매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생각하면서 참아라. 그것이 아름답다. 내 앞에서 너의 삶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이 길을 끝까지 갈 때, 마지막 날 우리를 품에 안고서 이렇게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 너도 나처럼 살다 왔구나”하고 말입니다. 저는 주님께 이 칭찬을 받는 사람이 그 나라에서 가장 큰 영광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삶의 진가는 지금 여기서가 아니라 그 때 거기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워도,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오해를 하더라도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올곧고 아름답게 사시길 바랍니다. 그 분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 앞에서 빛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 날 우리를 가장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높여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크고 작은 고난과 오해들을 견디어 내셔서 그 날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참으로 영원히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