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11.04. 주일오전 -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마가복음 9)


막0135to39 - 거기서 기도하시더니.pdf


20121104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장 35-39절


제가 제 아내와 만난 서울의 남산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길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렇다고 제 연애나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니 너무 솔깃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절은 요즘같은  초겨울이었고, 그 날은 금요일이었는데요,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시간을 조금 지체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서 부랴 부랴 서둘러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너무 늦어서 차가 끊기고 그래서 택시를 잡아 탔습니다. 그 때만해도 늦은 시간에는 합승이 빈번한 때였는데, 그 날도 집으로 가는 도중에 중간에서 택시가 승객을 한 분 더 태웠습니다. 고급스런 양복을 입고 있는 나이가 지긋한 신사분이었는데, 약간 약주를 드신 상태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택시를 타고 조금 가다가 기사분에게 말을 걸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야. 기사양반, 인생이란게 참 허무해. 내가 돈도 벌만큼 벌었고 사람들도 나를 인정하지만 이제 와 보니 별게 없네.” 그러시면서 쓸쓸하게 웃음을 짓는데 그 웃음이 초겨울의 날씨처럼 쓸쓸해 보였습니다. 


인간에게 허무라는 것은 마치 그림자와도 같습니다. 나와는 상관 없는 듯이 보여도 항상 옆에 있고, 이제는 나를 떠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내 곁에 와서 우리를 당황시키기도 합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짙어지듯이 이전의 영광이 클수록 그 뒤의 허무 또한 크고 짙어집니다. 여성의 경우에는 자식들 다 키우고 나서 겪게 되는 허무함이 제일 크고, 남자의 경우에는 자기가 올라가려고 하던 자리까지 올라갔을 때나 혹은 일생을 투자해서 열심히 하던 일에 실패하거나 혹은 그만두게 될 때 느끼는 허무가 제일 클 것입니다. 이 허무의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자살하는 사람도 없고, 유명하지 못해서 자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그리고 유명세를 떨쳐도 그 영혼 속에 있는 허무함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서 해로운 쾌락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아마도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허무는 인간에게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또한 죄의 부작용인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이 자신의 하나님 노릇을 하려고 들면서 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첫번째로는 원래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 꽉 채워질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그 자리가 항상 비어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허무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혼을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면 도무지 참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무한한 것도 없고 영원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필연적으로 허무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방법은 다시 하나님으로 그 자리를 채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으로 그 자리를 메꾸는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그 구멍은 완전하게 메꿔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다시 하나님으로 채울 때, 적어도 우리는 허무함을 거의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신의 참된 목적과 가야할 길을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허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모든 만들어진 것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목적을 정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정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그러지 않아도 말 그대로 살아갈수는 있습니다. 자신이 정한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건의 예를 든다면 전혀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거지왕자 손에 들린 옥쇄처럼 왕의 뜻을 상징하도록 귀하게 만들어졌는데, 호두 까먹는데나 사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열심히 사용되고 있을 때는 그것이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부작용인 허무함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간에라도 심각하게 자신의 인생이 잘못된 목적을 향해 달려왔음을 깨닫게 되면, 그리고 이루려고 하던 목적을 이루고 난 후에라도 하나 뿐인 자신의 인생이 잘못된 길을 걸어서 잘못된 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커다란 허무함에 직면하게 됩니다. 


인간의 허무함은 원래부터 떨어져사는 안되는 하나님과 떨어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어서, 그 영혼을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대로 살아가지 않는 한 결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뜨리려는 사탄의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본래의 목적과 길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번잡하고 긴급한 일들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 영혼을 계속해서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고, 그 분이 주신 목적을 향해, 그 분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 구절은 그냥 흘려보면 그저 예수님께서 일찍 일어나셔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다는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그 앞에 나오는 이야기와 함께 읽어보면 “어? 왜 그러셨지?” 하는 질문이 생기게 합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1장 32절과 33절을 보시면 전날이었던 안식일 저녁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로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앞에 모였더라” 예수님께서는 그 저녁에 모여든 모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또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아 주셨습니다. 중간 중간에 예수님을 방해하려는 귀신에게 주의를 주기위해 그 일이 지체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 날 일찍 주무셨을까요? 늦게 주무셨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아주 늦게 잠자리에 드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린 예수님이셨다면 얼마나 피곤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2장 첫 구절은 “그 다음날 너무 피곤하셔서 느지막히 일어나신 예수님께서는...”이라고 시작되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셨더라도 전날 다 고치지 못한 사람들을 고쳐주셨다는 내용으로 이어져야 훨씬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1장 37절은 예수님께서 새벽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은 한 사람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시각에 일어나셨다고 이야기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기도하시기 위해서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아무 때나 해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굳이 기도를 하시려고 그 새벽에, 새벽도 꼭두새벽에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여기서 ‘한적한 곳’이라고 번역된 말은 1장 12절의 ‘광야’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하시기 위해서 그 피곤한 몸을 일으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시간에,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는 광야를 찾아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이렇게 기도하는 일이 예수님께는 평범한 일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아침 일찍부터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제자들은 무척 당황했습니다. 고침을 받으려고 찾아온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아우성인데, 정작 보여야 할 예수님께서 전혀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어디 볼 일을 보러 가셨나 기다려 보아도 오실 기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마을 구석 구석을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다 성장한 어른이 길을 잃어버리실 일은 없고, 혹시 누구에게 납치당하신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을 안을 다 뒤지고 마을 밖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아주 뜻밖의 장소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태연하게 기도만 드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굉장히 허탈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예수님, 사람들이 아침부터 고쳐달라고 아우성인데 예수님은 여기서 무얼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전날 정말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날이 밝자마자 전날 치료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서둘러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날 그 시각에 거기 계셔서는 안됩니다. 마을 안에서 병자들을 고쳐주고 계셔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고 또 사람들에게도 가장 절실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유집회라도 열어 사람들을 고쳐주셔야 마땅한 상황에서 태연하게 그것도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으니 제자들이 그렇게 이상하고 또 허탈하게 여겼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진짜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은 “그래, 내가 기도하느라고 깜빡했구나. 어서 가자”라고 하시며 서둘러 마을로 돌아가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어제 그렇게 많은 사람을 기쁘게 고쳐주신 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그대신 예수님은 아주 냉정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도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성경은 그 다음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줍니다. “이에 온 갈리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니라” 그 말씀과 함께 예수님은 그 마을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뒤로 한 채 갈릴리의 여러 곳으로 가셨고,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귀신들을 내어쫓으셨던 것입니다. 


이야기가 중간 중간에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듭니다. 34절에서 35절로 넘어올 때도 그렇고, 37절에서 38절로 넘어가면서도 그렇습니다. 이런 어색한 끊김을 해결하는 열쇠는 바로 ‘기도’입니다. 전날 밤 늦게까지 피곤하게 일하시고서 꼭두새벽에 일어나 광야로 나가시는 이상한 행동을 하신 것도 그렇고, 자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의 긴급한 필요를 뒤로 한 채, 어찌보면 냉정하리만치 단호하게 갈릴리의 다른 지역으로 가신 것도 그렇고, 이 모든 의문점들을 해결하는 열쇠는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일찍 극도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가셨고, 또 그 기도를 마치시고 그 마을 사람들의 긴급하고 절실한 필요를 뒤로 한 채 갈릴리의 다른 지역으로 가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표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많이 일하셨기 때문에 기도하셨고, 사람들의 필요가 너무 절실했기 때문에 기도하셨고, 또 너무 피곤하셨기 때문에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유일하고도 든든한 끈이었고, 하나님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목적을 잃지 않고, 또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나침반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사용된 우림과 둠밈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절실한 필요들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필요를 돌보는 일을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느라고 몹시도 지쳐 있었습니다. 


막 유명해지기 시작할 때, 또 갑자기 일이 예고도 없이 많아질 때, 그리고 그 일이 자신에게 아주 즐거운 일일 때, 이런 일들이 겹치시 시작할 때는 우리는 그런 것들 때문에 목적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어버리게 되기가 무척 쉽습니다.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가 쉬워집니다. 주님도 그 때 이와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설마 예수님께서 뭐 그러셨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는 우리와 꼭같은 인간이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죄만 없으셨다 뿐이지 모든 상황이 주는 유혹과 시험은 그 분에게도 똑같았습니다.  그 분에게도 시험 때문에, 그리고 긴급한 일과 또 많은 일, 그리고 그 분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일 때문에 목적과 길을 잃어버리게 될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피곤함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시험을 이겨내고 자신을 제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 사용하신 방법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모든 시험과 또 위험성은 모두가 다 사람들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열광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또 이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는 일을 예수님께서는 무척 즐거워 합니다. 이런 상황들이 주는 위험과 시험을 이기고 제 자리로 돌아가려면 계속 사람들 속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광야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셨고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 앞에서 홀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길을 잃게 만드는 것은 주로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 사람들의 시각, 또 다른 사람들의 필요, 그들의 긴급한 일들... 여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일들까지 가세하면 우리는 그 속에서 마치 생각을 하지 않고 지하도로 들어간 길치처럼 방향과 길을 잃어버리게 되기가 쉽습니다. 당장은 그런 삶이 꽉 찬 듯이 보입니다. 다른 것 생각할 여가도 없이 분주하고 또 이것 저것 되어져 가는 일들도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다 어느 순간 보면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또한 주님은 그러시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여기에 우리의 이기심이라는 강력한 적수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기심까지 가세하면 우리는 남의 긴급한 필요와 요구에 응답하느라고 또 자신의 욕심을 채우느라고 그야 말로 정신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나 자신도 허무해지고, 하나님과도 상관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런 시험과 갈등을 이기고 항상 능력있고 충만한 삶, 그리고 가야할 길을 제대로 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라는 방법을 택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온전히 사람들을 섬기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갔고, 거기서 하나님과 이야기하며 그 분의 뜻을 다시 듣는 일을 반복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 때문에 생겨나는 갈등과 시험들은 잠시라도 사람들을 떠나야 해결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죄성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들은 나 자신만 바라본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을 떠나고 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떠나서 절대자 앞에 섰을 때라야 그 모든 것들의 제 위치와 크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정열적인 전도자였던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는 그렇게 쉴새없이 이어지는 전도일정을 소화하면서도 하루에 8시간 이상씩 하나님과 씨름하였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하루에 3시간씩 기도하고 묵상했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가 이들처럼 오래 기도해야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이런 예를 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분들이 그렇게 바쁘고 또 긴급한 일들 가운데서도 왜 그렇게 많은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었겠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바쁘기 때문에 더 많이 기도한다.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기도하지 않는 날은 마귀에게 빼앗긴 날이다” 마틴 루터는 엄청난 압력과 협박 속에서도 종교개혁을 진두 지휘하며 수많은 서적을 써서 그 사상을 확고히 해야하는 막중한 책임과 과중한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두려움과 책임, 그리고 과중한 업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소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는 어디에서 그런 집중력과 능력,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방향감각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밝힌 듯이 기도에 있었습니다. 너무나 무거운 일을 맡았기 때문에, 그가 너무나 바쁜 일정과 과중한 일들을 소화내 내야 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가 기도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그를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가야할 곳과 길을 잃지 않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저에게는 한 2년전부터 우리 교회와 비슷한 사이즈의 교회를 혼자 섬기고 있는 친구 목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 친구가 얼마 전에 전화를 걸어와서 목회가 어떠냐고 물어보길래 힘들고 일이 많지만 그래도 참 기쁘다. 그런데 정말 엄청 무겁다고 했더니 “그래. 너나 나나 혼자서 다 해야하니 무한책임이다, 무한책임이야.”라고 해서 서로 공감하면서 함께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적으나 많으나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혼자서 감당한다는 것은 너무 너무 무거운 일인 것 같습니다. 또 그런 여러분을 담임목회자로 섬겨야 하는 저 자신에 대한 책임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져서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이전보다 훨씬 더 예민해졌습니다. 또 제 생각인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모든 시선과 기대가 저를 향하고 있는 것같고, 또 객관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들도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저는 체질상 일을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스타일인데 이런 저에게 지금의 일들은 그 분량 자체로 저를 많이 힘들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저는 우리 교회를 담임하기 전에는 매일 기도다운 기도를 드리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새벽예배 설교를 제가 다 해야하니까 싫으나 좋으나 새벽에 나와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담임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에 억지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지금도 억지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피곤할 때도 있지만 기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서 저는 정말 엄청난 유익을 누리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모든 부담과 무게를 새벽기도 시간에 다 내려놓고 많은 부분을 처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은 저에게 재충전의 시간이고, 영적인 전투의 시간이며, 제 삶의 질서를 잡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또 제 사역의 방향과 목적을 다시 붙들고 더 견고하게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자칫 잘못하면 일만 하느라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하루 하루 흘려보낼 수도 있는데, 아침에 드리는 기도 덕분에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살며 또 사역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기에 아침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어도 정말 절실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단지 예수님의 행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가르침이며 또 모범입니다. 그 분은 제자인 우리들을 위한 스승으로 오셨고, 거듭난 우리들에게 온전한 삶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두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기도는, 그저 그 분이 이렇게 기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가르침이고, 또 우리를 위한 모범입니다.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필요들, 우리 자신의 욕망들, 그리고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절실하고 긴급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기록된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또 거기에 필요한 능력을 계속 공급받으려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기록된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홀로 ‘광야’로 가셨고, 거기서 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는 예수님께서 처음 영적인 전쟁을 벌이셨던 곳이고, 또 처음 사탄을 누르고 대승을 거두신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리로 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분이 싸우는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어도 그 본질과 승리의 비결은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싸움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붙드는 싸움이었고, 또 하나님만 의지했을 때,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섰을 때만 승리할 수 있는 그런 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광야로 나가셨고, 거기서 하나님을 붙드는 싸움, 하나님을 붙들고 이기는 싸움을 싸우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 분의 인생으로 하나님을 섬기셨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의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런 우리에게는 항상 사람을 붙들 것이냐, 하나님을 붙들 것이냐 하는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삶을 살 수 있고, 질서잡히고 방향이 분명한 삶을 살면서 인생의 허무라는 짙고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만 서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분 앞에서 다시 내 삶의 목적을 확인하고, 방향을 조정받으며, 또 그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 싸움을 위한 가장 좋은 장소는 바로 광야입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서 하나님 앞에서 서고 또 하나님만 붙들 수 있는 광야가 이런 기도를 드리기 가장 좋은 장소이고 또 싸움에서 이기기 가장 적당한 장소입니다. 광야는 주님의 골방이었습니다. 꼭두새벽 또한 그 분의 골방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만의 골방을 가져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그 분께만 말씀드리며 또 그 분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골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성도들로 부터 골방을 빼앗아 갔습니다. 너무나 분주한 삶, 정신없이 주어지는 요구들, 또 주변 사람들의 시선들은 우리에게서 우리만의 골방을 빼앗아 갔습니다.  우리는 골방을 회복해야 합니다. 장소의 골방, 시간의 골방을 만들어야 합니다. 꼭 새벽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시간, 가장 좋은 장소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독대하십시오. 그 분 앞에서 그런 것들 때문에 잃어버린 삶의 목적과 방향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은혜로 여러분의 영혼을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엊그제, 금요일 부터 금요기도회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회 시간이 우리 개개인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 개인을 위한 골방으로써의 의미가 크다면, 금요기도회 시간은 우리 교회 전체를 위해서 주신 공동체를 위한 골방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에게 개인의 골방이 필요하다면 한 몸된 교회에게도 그 교회의 골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기도할 때, 같은 기도제목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있어야 할 목적을 보여주실 것이며, 또 가야할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과 능력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쉽지 않은 시간이지만 함께 모여주십시오. 그리고 기도에 힘을 합해 주십시오. 우리 공동체가 하나로 주님 앞에 홀로서는 이 일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개인에게나 교회에게나 사람들을 떠나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우리는 목적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나 모두 하나님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고 자신도 충만하게 되지 못하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홀로 하나님 앞에 거하는 시간의 광야, 시간의 골방을 잘 지켜서 바쁘고 허무한 세상을 아름답고 충만하게 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