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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2.11.06. 금요기도회 -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기도3)


민1411to19 -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pdf


20121106FE (#1).mp3.zip



본문 : 민수기 14장 11-19절


제가 보기에 지금의 한국 개신교회는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위기를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는 천주교는 물론이고 이미 불교보다도 뒤쳐졌고, 조금 지나친 것 같기는 해도 교계 내에서도 개신교 역사상 현재의 한국교회처럼 타락한 시기는 없었다는 이야기가 터져 나올만큼 여러가지 면에서 볼 때 심각한 상태인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성도 개개인의 신앙의 형태로 보더라도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그저 자신의 평안만을 추구하며, 신앙은 점점 자기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목회자들까지도 무엇은 꼭 해야하고 무엇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지 조차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대로 움직이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지금은 한국 교회가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느냐, 앞으로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거나 지지하는 정치색에 따라서 이리 저리 부화뇌동해도 좋은 때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더 긴급하게, 그리고 더 절실하게 기도해야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그 기도는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성도가 자신이 속한 나라나 세상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을 모르는 도성들이었고 아브라함은 그들과 함께 이웃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오늘 살펴볼 모세의 기도는 요즘으로 말하면 성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이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기도는 그 기초가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이 땅의 나라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위치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맺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이 있지만, 이 땅의 나라들에게는 그러한 언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약백성이지만 이 세상은 언약백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나 이 세상을 위해서 기도드릴 때는 그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복되게 해야할 사람으로써 일반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뿐이지만, 교회를 위해서 기도드릴 때는 언약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지켜주시며, 우리 또한 그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헤깔리면 나라를 위해서 기도드릴 때는 교회를 위한 기도처럼 드리게 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드릴 때는 나라를 위한 기도처럼 기도하게 됩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드릴 때는 국민들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드릴 때는 그저 부흥성장하게 해 달라고, 그리고 만사형통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게 됩니다. 물론 두 기도 모두 필요한 기도이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두 기도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드리는 기도는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를 위해서 드린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크게 보면 한 교회가 전체 교회를 위해서 드린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 바로 앞에서 자신들의 모습에만 붙들려서 하나님께 대한 극심한 불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계속 용서하시고 참아오셨던 하나님은 더 이상 참으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더 이상 못 참겠다. 내가 언제까지 이 백성들에게 멸시를 당해야 하겠느냐? 언제까지 이들의 불신앙을 참아주어야 하겠느냐? 이제 전염병을 일으켜서 모두 죽이고 너로부터 이들보다 훨씬 크고 강대한 나라를 세워야 하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였고 계획이었지만 사실 이 말씀은 듣는 모세에게는 모세를 충분히 갈등하게 할만한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모세의 표현대로 스스로 낳은 자식도 아닌데 고생과 수모를 겪으면서도 결코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을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들은 모세에게 가장 큰 상처와 실망을 가져다 주기도 했습니다. 계속 반복하면서도 결코 그만둘 줄 모르는 범죄와 반역이 모세를 신물나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중 앞부분 반쪽은 모세가 받아들이기에 굉장히 힘든 내용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백성들을 멸망시키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뒤쪽 반쪽은 이들에게서 상처와 실망 밖에 얻은 것이 없는 모세에게는 큰 유혹이 될만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 앞에서 더 온전하고 강한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더 강한 나라, 이것이 그동안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가 꿈꾸었던 나라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모세는 이 이야기에 솔깃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온전하고 강한 자기 나라가 세워지는 것보다 이스라엘이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로 남게되는 것을 더 원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 이스라엘에게 극도로 분노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그런 줄도 모르고 지금도 극도의 불신앙을 보이는 철없는 이스라엘 사이에 섰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약점은 신앙이 너무 개인적이라는데 있습니다. 나와 직접 상관이 없는 일이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또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다른 교회나, 이 나라의 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우리를 누군가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 아브라함 식으로 표현하면 다른 이들을 위한 복이 되도록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 부르심에 대한 직무유기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일로 부르심을 받았고, 또 그 부르심에 순종하려면 우리는 나만 생각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내 문제로 여길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을 내 문제처럼 기도할 수 있는 영적인 감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요즘 왕따 문제로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문제를 자기 일처럼 느낄 수 있는 ‘공감능력’이 이슈가 되고 있는데, 우리들도 영적으로 볼 때, 이 ‘공감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선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기도에서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직접 백성들의 문제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모세가 처음으로 마음쓰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모세의 첫번째 기도를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주변의 다른 족속들이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것을 다 보았는데, 이제와서 하나님께서 저들을 멸하시면 그 사람들은 ‘거 봐라. 저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끌어내기는 했는데, 가나안에 들어가게 할 능력이 없으니 저렇게 광야에서 다 죽게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오해하고 또 비웃게 될 것입니다. 그려면 하나님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물론 모세는 이스라엘을 무지 무지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하려고 화가 잔뜩 나신 하나님과 그 순간에도 철모르고 하나님께 대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섰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받게 되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백성들에게 능력없는 분으로 오해되고 멸시받는 것이 더 걱정이었습니다. 모세는 그만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기도를 기뻐하실까요? 그래서 흔쾌히 응답해 주실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걱정해 줄줄 아는 속깊은 사람의 기도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는 지금 모세가 드리는 기도처럼 긴급하고 아주 중요한 문제 때문에 드리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긴급하고 어려울 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자리에서 기도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급한 문제를 위해서 기도드릴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헤아리게 되어 있습니다.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어느 권사님의 기도제목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아들은 교회에 잘 다니다가 우리 표현으로 장기방학에 들어가신 분이었는데, 그 권사님은 하나님께서 한 대 때리셔서라도 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그 분은 그저 아들이 잘 되는 것보다도 아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더 절실하게 소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드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아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면서도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가 위대했던 이유는 이렇게 그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사랑하는 진심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말씀하신 대로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것은 앞으로 나올 내용을 보면 알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는데 사용하지 마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드리는 일에 사용하여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다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시옵소서.” 모세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은 시내산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직접 하셨던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런 성품을 가졌으니 나는 앞으로 이렇게만 움직이겠다고 하신 약속 말입니다. 지금 모세는 그 약속을 하나님 앞에 내밀면서 약속을 지키시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능력있는 기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뢰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그것을 말씀드리면서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게 그 분의 약속이시니 그게 그 분의 성품이시니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이렇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드리면 하나님은 꼼짝 못하십니다. 이것이 진짜로 능력있는 기도의 비밀입니다.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그 약속을 붙들고 기도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꼭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약속이니 지키지 않으실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면서 결코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가져다 쓰지않습니다. 용서만 구하려고 한다면 “여호와께서는 노하시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셨으니”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굳이 그 반대편에 있는 이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것이 기도드리는 자가 지녀야할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입니다. 기도드리는 자는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도 기도자는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말씀만을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무언가 꼭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할 때, 이렇게 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직할 때, 우리 스스로도 스스럼 없이 확신있게 기도드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정직한 영혼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모세는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시옵소서” 그러나, 결국 모세가 의지하고 있는 것, 모세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모세는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께는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도 알았고 또 죄에 대해서 엄격하시고 단호하신 거룩하신 성품도 알았습니다. 그 성품에서 나온 하나님의 약속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말씀드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인자하심에 의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다함이 없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에 의지해서 그 모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결국 우리의 기도가 의지해야할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그 분의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 우리가 구해야할 것도 그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가 구하는 것들이 다 그 분의 사랑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가능한 것부터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어떤 기도를 드리던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의지해서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은혜가 베풀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요즘 한국 교회는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같은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 백성의 길을 너무도 멀리 떠나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러는 줄 조차 모릅니다. 이제 누군가는 그 모습에 진노하신 하나님과 그렇게 무너져 버린 백성들 사이에 서야 합니다. 그 사이에 서서 기도드려야 합니다. 모세와 같은 마음으로 모세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제 잠시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얼마나 급한 상황에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굉장히 긴급한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정직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지해서 기도드렸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목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이스라엘을 살리려는 모세의 심정으로,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지해서 우리나라의 교회를 한 번 더 용서해 달라고, 이 모든 죄들을 없애시고 사하시고 한 번 더 사랑해 달라고 정말 간절하게 한 번 함께 부르짖어 나의 문제로 여기면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세 번 외치시고, 한 목소리로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