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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1.07. 새벽예배 -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요한복음 48)


20121107D (#1).mp3.zip


요0731to36 -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pdf




본문 : 요한복음 7장 31-36절


성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가끔씩 친구들이나 지인들과의 관계 문제로 고민을 하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전에는 잘 어울려서 잘 지내고 또 재미있게 대화도 나누었던 사람들이 언젠가 부터 거리가 생기게 되고 또 말도 통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친했던 친구들까지도 관계가 소원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신앙이 성장해 가는 성도들이라면 대개가 이런 문제를 경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이런 고민거리가 생기는 이유는 어떤 사람이 예수를 제대로 믿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살아가는 세상이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개의 경우 환경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사는 동네도 변하지 않고, 이전에 옆에 있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대로 있고, 직장도 학교도 그대로 입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사는 세상과 그 속에 사는 자신에 대한 시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환경에 살아도, 또 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어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세계관이 변하면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심사들도 다 변하게 되어 있어서 예전에 가치있게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가치가 없어지기 시작하고 예전에 재미있던 것들은 시시해지기 시작합니다.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의사소통에 문제를 만들어 내게 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문제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문제는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중간에 이런 문제를 겪었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줄곧 이 문제를 안고 살아가셨습니다. 도통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 예수님께는 무척 안타까운 문제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사람들이 속해 있는 곳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셨지만 하늘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땅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그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땅에 속한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여전히 거기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 당국자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했고, 또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 당시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아지고 있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복을 얻게 되었던 것은 이들이 편견과 속설을 깨뜨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일 것이라는 확신을 얻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그러니까 그들은 이 사람이 그리스도가 틀림없다는 결론을 얻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무리 중 더 많은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무시하며 비난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자신들을 위한 기회로 삼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조금전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완전히 묵사발이 되었던 유대인의 당국자들, 그러니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감이 더 큰 것을 간파한 이들은 갑자기 성전 경찰들을 불러서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무엇보다도 진리를 분별하는데 민감해야 하고 진리라고 판단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행동을 취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로는 그 판단이 틀릴지라도 판단이 선대로 움직여야 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자신들의 분별력을 책임있게 사용하는 대신 사람들의 분위기에 편승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로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사람들의 여론에 의해서 움직였고, 그것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신분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여전히 그리고 철저히 땅에 속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사주를 받은 성전경찰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예수님께로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이것은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잡아갈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잡으러 온 사람들이지 잡혀가야할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잡혀가야 할 때가 아직 다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주님의 이 말씀은 다가올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일, 귀환하는 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하늘의 가장 큰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영광, 그러니까 이전에 예수님께서 누리시던 그 영광을 다시 누리게 되는 일로 이해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예수님 자신의 시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손에 잡혀서 억지로 당하는 사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때가 와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최고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셨던 그 틀로 우리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고 또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삶과 죽음을 예수님과 똑같이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 틀은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뜻이라는 틀에서 자신의 삶을 이해하셨습니다. 자신의 삶은 하나님의 때에 따라 움직여 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듣는 사람들에 따라서는 하나님, 하나님 하는 것이 굉장히 답답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가 우리 삶을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틀에서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인생을 굉장히 힘있고 확신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아가겠다고 다가온 성전경찰들 앞에서 전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너무나 여유롭고 당당하셨으며, 또 확신에 차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이란 성전 경찰이나 그들을 사주한 권력자들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믿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 땅에서의 삶과 죽음이 사람들의 계획이나 스케쥴이 아니라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움직여 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으셨기 때문에 때이르게 찾아온 협박과 위험 앞에서도 그렇게 담대하고 당당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이해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도 같은 틀에서 보셨습니다. 하늘의 입장에서 보셨습니다. 땅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억울하고 비참한 처형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그런 죽음을 하늘 영광을 향한 출발로, 다시 그 영광으로 되돌아가는 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닥쳐오는 일들에 대해서 지레 겁먹고 두려워하면서 사는 이유는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의 스케줄은 우리 손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까? 사람들의 손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내 손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손도 아닙니다. 내 삶의 스케줄은 모두 다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또 우리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하늘 영광을 향한 출발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주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는 그 기쁜 여행을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어떻게 그 스케줄을 알 수 있을까 하는 것과 두번째는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스케줄에 순종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스케줄에 자신의 삶을 맞춰 가시기 위해서 기도하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홀로 기도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실 수 있으셨고,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입니다. 진실로 내 삶이 하나님의 손에, 그 분의 스케줄을 따라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믿는다면, 이제는 그 스케줄을 알아내고 또 그 스케줄에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 기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항상 기억하면 됩니다. 그 믿음이 삶 끝에서 만나게 되는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끝이 아니라 나를 위한 영원한 영광을 향한 여행의 출발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세계관, 우리의 인생관은 이렇게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셨던 그 눈으로 우리 자신의 삶과 죽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내 중심, 사람들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여 가야 합니다. 아직 우리 속에 두려움이 있고 또 불확실함이 있는 한, 우리의 인생관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생각하는 그 생각에 맞춰져 가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이 그 분의 손에 있음을 진실로 믿고 또 그 믿음에 따라 살 때, 우리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세상이 주는 시험과 협박 앞에서도 흔들림 없고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가지셨던 믿음의 눈으로 삶과 죽음을 바라봄으로써 당당하고 담대한 삶을 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