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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11.07. 수요저녁 - 이 마음을 품으라 2 (빌립보서 10)


빌0201to12 - 이 마음을 품으라(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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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2장 1-12절 

건축 재료가 있어도 기술이 없으면 집을 지울 수 없고, 집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이 있어도 재료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집다운 집을 지으려면 둘 다 충분히 갖춰져야 합니다. 실제로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부족해서 다 지어놓은 집들이 여기 저기 금이 가기도 하고, 또 심지어는 무너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둘 중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몇 주에 걸쳐서 교회의 하나됨이 교회의 생명이며, 또 교회가 하나가 될 때에만 그 안에 속해있는 성도들도 공동체에 약속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는데요. 사실 교회를 하나로 세워가고 또 지켜가기 위해서도 이 두 가지, 그러니까 재료와 기술이 모두 필요합니다. 즉, 자원과 그 자원을 사용하는 방법 모두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 수요일에 살펴본 것은 교회를 하나로 만들고 또 지켜가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해야 할 자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용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실은 의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하나로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지혜와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 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 빌립보서는 우리에게 이미 그러한 은혜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가 되는데 충분한 은혜를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가 알려주는 은혜는 네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 그러니까 순종하기만 하면 정해진 결과를 보장하는 약속의 말씀이고, 둘째는 사랑으로 주고 받는 위로이며, 세째는 성령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영적인 교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교회에 이런 은혜가 주어져 있다고 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같이해야 하고, 같은 사랑을 가져야 하며, 한 뜻을 가지고, 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의지해서 일단은 사랑도 생각도 마음도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교회가 하나되는 기초가 만들어 질 수 있고, 그 한 몸된 교회 안에서 우리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내용이 하나의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건축재료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면 오늘은 그 재료들을 구체적으로 사용할 것인가 하는 기술에 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교회가 하나일 때에만 우리가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에게는 이미 그렇게 하나가 되고 또 하나됨을 지켜나가기 위한 자원인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하나가 되고 또 하나됨을 지켜가야 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미 그렇게 할만한 충분한 은혜가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또 거기 의지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충분합니다. 이제부터는 이것을 참으로 믿는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거기 의지해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숨겨놓으신 보석같은 기쁨을 찾아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은혜는 잘 안되는 것, 하기 힘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은혜의 일차적인 사용법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렇게 들으셔야 합니다. 그냥 듣지 마시고 이런 데다 은혜를 사용하겠다, 은혜에 의지해서 이런 일들을 하겠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됨을 세워가고 또 지켜가겠다, 그 안에서 기쁨넘치는 신앙생활을 하겠다.... 이런 마음과 생각으로 말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3절을 중심으로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고 또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꼭 치워버려야 하는 두 가지 장애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꼭 붙들어야 할 것은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이야기 해 주는 첫번째 장애물은 다툼입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무슨 일을 하든 다툼으로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툼으로 하려면 아얘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이 다툼은 정말로 치고 받는 싸움이 아니라 경쟁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는 무슨 이유로건 성도들 간의 경쟁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경쟁을 하려는 마음은 타락하여 교만해진 인간에게는 본능과도 같습니다. 교만해진 인간은 내가 누군가보다 더 탁월하며 더 능력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마음이 편해지니까요. 그렇지만 바울은 우리에게 그런 본성을 거슬러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성도는 무슨 이유에서건 교회 안에서 자신을 증명해 보이려는 태도를 버리고, 또 그런 행동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하나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제 미국에 있는 아는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미국의 한인 교회가 정말 힘들다고 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는 정말 힘들어요. 여기 나와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한국에 있을 때는 한가닥 했던 사람들이거든요. 학벌도 좋구요. 그런데, 여기 와서는 작은 슈퍼마켓이나 세탁소를 운영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존심이 엄청 상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리게 되죠. 말도 잘 안통하고...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모두 교회 안에서 보상받으려고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찔러서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한인교회는 항상 문제가 끊일 날이 없어요.” 


자신을 증명해 보이려는 노력은  항상 다른 사람과의 경쟁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증명이라는 것이 누군가 보다 내가 낫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고, 그래서 거기 걸맞는 대접을 받기 위한 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것이 전혀 필요없다면 사람들은 굳이 스스로를 증명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에게 적어도 선의의 경쟁은 피할 수 없고, 또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항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아직도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오해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정말 선의의 경쟁이라는 것이 존재합니까?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정말 선의를 추구한다면 경쟁을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경쟁을 해서 줄서기를 시켜야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경쟁은 항상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 냅니다. 1등이 있으면 반드시 꼴찌가 생기게 합니다. 그것이 경쟁입니다. 그래서 상처주는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경쟁은 항상 상처를 만들고 갈등을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남을 위해서 그 사람과 경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경쟁은 그렇게 철저히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경쟁에 뛰어드는 사람은 이기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경쟁의 동기가 이기심이기 때문에 경쟁은 결코 남을 진정으로 잘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의의 경쟁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경쟁이 있는 한, 성도들에게 경쟁심이 있는 한 그 교회는 하나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고, 그래서 공동체에 주시는 참된 기쁨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다른 성도와 경쟁해서는 안됩니다. 경쟁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경쟁을, 그리고 그 경쟁을 생기게 하는 이기심을 모두의 참된 기쁨을 위해서 제거해야만 하는 걸림돌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기심에서 나온 경쟁을 그냥 내버려 두는 한 결코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는 허영심입니다. 바울은 둘째로 무슨 일을 하든 허영심이 동기가 된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허영심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기 개구리가 들 판에서 황소를 보고 와서는 엄청 큰 짐승을 보았다고 하자, 지기 싫어서 자기를 부풀리다가 배가 터져버렸던 아빠 개구리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허영입니다. 진짜 자기 크기보다 자신을 더 크게 보이려고 자신을 부풀리려는 마음과 행동이 바로 허영입니다. 이 허영심 또한 경쟁심처럼 인간이 떨쳐버리기에는 정말 만만치 않은 적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허영의 뿌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 허영은 겉보기와는 달리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남이 나를 작게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내가 무시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 허영을 만들어 내고 또 허영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허영은 자꾸 무언가를 가져다가 붙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을 크게 보이게 만들도록 합니다. 아직 나는 큰 사람이 아닙니다. 작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 가져다 붙이는 것입니다. 돈을 가져다 붙이고, 학벌을 가져다 붙이고, 능력을 가져다 붙이고, 집안을 가져다 붙이고... 우리들의 경우에는 거룩한 겉모습을 가져다 붙이고, 기도를 가져다 붙이고, 봉사를 가져다 붙이고, 종교적인 업적을 가져다 붙이고...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나 자신이 아닙니다. 그저 나에게 덧붙여진 것들입니다. 나의 작음과 비어있음을 위장하기 위해서 가져다 붙인 것들 말입니다. 마치 속은 텅 비어있지만 터질 정도로 부풀려진 어미 개구리의 배처럼 부풀려진 껍데기입니다. 그래서, 허영이 있는 사람들, 허영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은 항상 목마르고 항상 배가 고픕니다. 허무하고 허전합니다. 속이 텅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채워보겠다고 계속 가져다 붙이고, 또 그것을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참된 만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겉이 무거울수록 비어있는 속사람은 더욱 더 견디기 힘겨워지기만 할 뿐입니다. 


제가 이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집사님 댁으로 심방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댁에는 그 집사님의 아버님도 계셨는데, 이 분은 다른 교회에서 나름대로 중직을 맡았다가 은퇴하신 분이셨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다과가 나오기 전에 그 분으로부터 자기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가 전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다, 무슨 기독교 단체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다, 어떤 업적을 남겼다, 자기가 누구 누구랑 잘 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궁금해 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이야기해 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런 이야기를 30분이 넘도록 계속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허영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상관없는 것들로 자신을 치장해서 자신을 크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 속이 빈 허무함과 두려움에서 나오는 행동, 그것이 바로 허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허영이 심한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 줄 아십니까? 굉장히 방어적이면서도 또 공격적입니다. 자기가 작고 비어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방어적이 되고, 또 자기보다 커 보이는 사람에게는 공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면 그 공동체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자기를 열지 않고, 공격적이기만 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 과연 하나가 되고 또 기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아픈 모습의 뿌리에는 바로 이런 허영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에게 자기의 진짜 크기를 들키면 안되니까 개방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보다 커 보여야 하니 서로에게 공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우리 우리의 바램과는 다르게 이렇게 분열이 심하고 또 기쁨이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경쟁하지 말라. 허영심을 부리지 말라. 그런 것들을 동기로 움직이지 말라. 듣기는 쉬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해야한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를 안다면, 그리고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고 산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이런 것들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경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경쟁을 하고 그래서 자신을 증명해 보이려는 이기적인 동기를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미 우리를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우리의 가치를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을 하나님의 독생자와 맞바꾸실만큼 귀하게 여겨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귀하게 여김과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인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하나님의 인정해 주심 속에서 그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경쟁해야 합니까? 왜 아직도 경쟁해서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까? 하나님의 인정으로는 아직 부족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만큼 귀히 여겨주시는 것으로는 부족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절대로 우리를 서로 서로 비교해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상대평가자가 아니라 절대평가자이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정말 엄청난 은혜이지만 우리가 경쟁에서 벗어나고 또 경쟁이 만들어내는 쓴 열매들을 없애려면 이것을 알고 또 믿고서 여기 의지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 정말 선한 목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저는 아주 의도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하는 행동들을 정말 거의 자동적으로 하실만큼 착한 분이셨습니다. 말 그대로 저는 그 분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분 때문에 얼마나 좌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득 너무나 기초적인 진리가 다시 깨달아 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나를 저 분과 비교하시지 않는다. 그저 저 분은 저 분으로, 나는 나로 바라보신다. 저 분은 저 분대로 점수를 매기시고, 나는 나대로 점수를 매기신다.”라는 진리였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다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아무런 질투나 거리낌 없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빨리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남과 비교해서 내가 그 사람보다 더 잘하는 것은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각자 각자 모두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능력도 성품도 그 어떤 것도 전혀 같은 것이 없게 만드셨습니다. 다르게 만들어 놓고 같은 것을 요구하실까요? 출발점을 다르게 해 놓고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실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하나 하나 바라보시며, 각자 각자를 평가하십니다. 얼마나 선하고 거룩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하늘나라를 위해서 살았는지, 얼마나 믿음을 지켰는지 따로 따로 점수를 매기십니다. 그래서 내가 저 사람보다 잘 하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들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매일 매일 한 걸음씩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게 필요한 전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 은혜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교회 안에도 존재하는 지긋 지긋한 경쟁을 던져 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이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그 성도는 사회에서도 충분히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남과 경쟁하지 않고도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언제나 줄서기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도 그 안에 사는 여러 사람 중의 하나니까요. 그렇지만, 그 결과 때문에 생겨나는 상처와 쓴 열매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적어도 비교하고 경쟁하느라 잃어버린 기쁨을 되찾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허영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는 성령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허영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자신을 더 크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스스로가 작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가 비어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들키기 싫어서 허영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허영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존재와 삶을 꽉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분에 대한 변함없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님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충만이 무엇이죠? 꽉 찬 상태가 충만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필요한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는, 더 이상 더할 것도, 더할 수도 없는 상태가 충만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해 지면 우리 영혼과 존재는 바로 이런 상태가 됩니다. 점점 그런 상태로 가까이 갑니다. 그래서 자신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감추기 위해서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미 자신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채워져 가고 있기 때문에 남이 그것을 인정해 주건 인정해 주지 않건 신경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더불어 이미 무한하신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자신을 더 부풀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허영이 차지할 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 수 있게 됩니다. 아니 그 충만함으로 저절로 밖으로 흘러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공격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미 내가 더 크다는 것을 증명해야할 필요가 없을만큼 큰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경쟁과 허영을 삶의 원동력이라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만약 그것에 대한 대안이 전혀 없다면 그 말도 일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경쟁과 허영은 우리의 참된 삶의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소위 필요악도 아니고, 그저 악한 것에 불과합니다. 때로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될 때도 있고, 때로 허영을 떨쳐버리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건 우리가 유혹과 욕심에 약해서 이고 이전의 습관을 떨쳐 버리지 못해서이지 그게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위를 한 번 보십시오. 우리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경쟁과 허영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지 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경쟁심과 허영심을 따라 살면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 살아왔습니다. 마치 무한경쟁을 추구해야할 미덕처럼 여기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누구나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높이는 것을 자신의 권리로 여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세상은 고사하고 교회 안에 조차 평화가 없습니다. 쉼이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질투하며, 무시하는 모습이 허다합니다. 세상은 어떻습니까? 이겨야 하니, 이기면 된다고 하니 방법은 신경조차 쓰지 않습니다. 남이야 불행해지든 상처를 입든 나만 이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크게 보이면, 강하게 보이면 된다고 하니 겉모습은 커져가는데 속은 점점 더 텅 비어갑니다. 점점 더 유약해져 갑니다. 사람들은 방어적인 동시에 공격적이 되어서 거칠기 이를데 없는 사회가 되어져 갑니다. 아마도 앞으로도 세상은 이 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경쟁과 허영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자기 의지로 그런 것들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그런 삶의 모습을 포기한다고 해도 다수는 여전히 그것을 내려놓을 용기도 대안도 모르는 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대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리고 믿음으로 따라 살기만 한다면 우리를 그 악한 경쟁과 그 공허하고 거친 허영으로부터 자유로롭게 해 줄 수 있는 대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은혜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소명에 따라 살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만족하면 만족할수록 소명에만 집중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다른 곳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으니 그저 소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정말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에는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모르는 부분이 항상 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에도 단계를 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제가 보기에는 각각의 단계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단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다름아닌 믿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정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맡긴만큼만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조금 맡기면 하나님은 조금만 책임져 주십니다. 그런데 다 맡기면 전부 다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가 이 말을 좀 더 크게 적용해 본다면, ‘하나님은 믿는 만큼 은혜를 주신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바로 은혜의 신비입니다. 은혜는 우리가 믿는 만큼만 일합니다. 신뢰하는 만큼만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만족하지 못할까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로 만족하지 못할까요? 원래부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우리가 진실로 믿지 못하고 그 은혜로만 만족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할 수 있다고 믿는 그 만큼만 우리를 만족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그 만큼은 스스로 근심하고 걱정하며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되고, 그 만큼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소명대로 살아갈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만족이 주는 힘으로 소명을 따라 살면 우리는 경쟁이나 허영을 따라 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느라고 부대끼고 상처를 주고 받으며 가리고 공격하며 살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그 분이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부분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만 살아가도 충분히 만족하며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살다가 보면 다시 은혜가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려는 모습이 다시 생겨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다시 은혜에 의지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경쟁과 허영을 내려놓고도 충분히 기쁘고 만족스런 삶을 살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고,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하나되고 또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교회에만 허락하시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려면 우리는 다툼과 허영이라는 장애물들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일에 사용할 은혜가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미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의 가치를 온전히 증명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꾸미고 덧붙여 크게 보여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는 이미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 성령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충만하고 그렇게 큰 존재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두 가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진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나의 가치를, 그리고 그 분 안에서의 나의 크기와 충만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 만큼, 이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경쟁과 허영심에서 벗어나 참된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게 해 주실 것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또한 분열과 상처가 치유되어져 가는 기쁨의 자리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광현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능력 안에서 다툼과 허영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누리는 그런 하나된 공동체, 기쁨 넘치는 공동체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