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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11.18. 주일오전 -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추수감사주일)


요0601to13 -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pdf


20121118SM (#1).mp3.zip




설교본문 : 요한복음 6장 1-13절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거둬들이게 하신 수확을 가지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날이죠.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동안의 수확이 많이 풍성하셨습니까? 아마 우리 중에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거두신 분들도 계시겠고, 반대로 기대만큼 수확이 풍성하지 못한 분들도 계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까지 만 10개월 17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셨고, 숨쉴 수 있는 공기를 주셨으며, 직장을 주셨고, 양식을 주셨으며 건강을 주셨습니다. 오늘까지 2012라는 숫자와 함께 지낸 10개월하고도 17일, 321일, 7,704시간, 462,240분, 27,734,400초 동안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우리의 들숨과 날숨을 지켜주셨습니다. 단 한 순간도 빗나감 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근심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수많은 일들을 만났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넘어 올 수 있었고,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감사의 예배를 드리러 모였습니다. 실제로 이 모든 것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 내 힘으로 완전하게 붙들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또 온전히 어찌해 볼 수 있는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감사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혹시 마음에 감사가 없는 분들은 오늘 이 예배를 통해 감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것, 없는 것만 보지 마시고 이미 주신 것들, 충분하게 주신 것들을 헤아려 보시고, 또 앞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허락하실 것들을 생각하시면서 참된 감사의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날로 치솟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고, 그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모여드는 사람들도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5,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경의 다른 곳을 보면 남자만 그렇다고 했으니 아마 줄잡아서 15,000명은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언덕 위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향해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광경을 말입니다. 정말 장관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전부 꽤 먼 곳에서부터 아무런 대책없이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에,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해결할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빌립을 향해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넌지시 물으셨습니다. 빌립은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주 조금씩만 나눠주더라도 200데나리온이라는 돈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200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의 8개월치 품삯이었습니다. 금새 구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런 돈이 있다고 하여도 떡을 구할 곳이 없는데, 돈초자 없으니 빌립의 대답인 즉 그 일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안드레가 한 아이와 함께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안드레의 손에는 그 아이로 부터 받은 도시락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그 도시락을 내어놓으며 시큰둥하게 말했습니다. “여기 아이가 가져다 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가 있지만, 이것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안드레가 괜히 끼어들어서 던진 대답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은 아주 정확합니다. 일단 최소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지만 그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어린아이 하나가 자기 도시락을 가지고 왔지만 그것은 어른 한 사람 먹기에도 빠듯한 양입니다. 정말 새발의 피인 셈이죠. 말 그대로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비록 두 가지 대답 모두 부정적인 대답이기는 했지만 상황판단 만큼은 틀림이 없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답은 완전히 틀린 대답이었습니다. 6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이런 설명을 덧붙여 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이 일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개입하시고 또 해결하셔야할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지도 이미 다 생각해 놓고 계셨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물으신 것이니 그것은 제자들을 향한 시험문제였던 것입니다. 빌립이나 안드레나 모두 이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역할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들판이라는 장소, 15,000명이라는 숫자, 그리고 오병이어라는 정말 아무 쓸데 없어 보이는 답답한 대안만 바라보았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았습니다. 틀린 것이 없지만 완전히 틀린 답을 말입니다. 


문제에는 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변수들 중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변수도 있지만, 또 결정적인 변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소한 변수들도 그렇지만 이러한 결정적인 변수를 생각하지 않고 문제를 풀려고 한다면 아얘 정답 근처에도 가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놀라운 일들을 많이 행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셨지만 예수님이라는 결정적인 변수를 전혀 고려해 넣지 않고서 그 문제를 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대답은 정답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틀린 답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 그리고 가진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들을 만나게 됩니다. 15,000명이나 되는 배고픈 사람들이 산 위로 올라오고 있는데 돈도 없고, 양식도 충분하지 않은 것같은 그런 상황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상황을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빌립처럼 계산부터 하고 냉정한 답을 내놓습니까? 아니면 안드레처럼 없는 것이나 부족한 것만 보고 비관적인 대답을 내놓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가져다 놓으시는 해결 불가능한 상황, 그리고 가진 것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한 상황은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힘으로 해결책을 내놓아 보라고 내시는 시험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는 네 힘으로는 안되니 다른 곳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출제하시는 문제입니다. 내 계산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 능력으로는 턱도 없기 때문에 답은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그 답이 있는 곳은 바로 하나님 입니다. 시험은 학교나 선생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학생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시는 내 힘으로 풀기 불가능한 문제들도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의 가장 중요한 변수이자 해답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게 하시기 위해서 출제하시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빌립에게 문제를 내실 때 “어떻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어디서?”라고 물으셨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떻게’와 ‘어디서’... 이 두 가지 질문은 비슷한 것같지만 실은 굉장히 많이 다릅니다. 주님은 돈을 문제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음식에 대해서 물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느냐고, 너 같으면 어디서 구하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원래 모세가 광야에서 수많은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드렸던 질문이었습니다. 민수기 11장 13절을 보시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자 모세는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당할수 없나이다” 하나님은 이 탄식을 듣고 3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고기를 먹게 해 주셨습니다. 물론 그들의 탐욕과 불평불만에 대한 징계는 내리셨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질문을 예수님께서 그것도 하나님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질문은 이런 질문이 되는 셈입니다. “모세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스스로 먹였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먹이시도록 했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어디서 저들이 먹을 그 많은 양식을 얻겠느냐?”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하나입니다. 바로 “하나님이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이 주신 힌트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래서 정답을 내놓는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저는 어느 마트건 처음에 그 마트에 가면 그 마트를 한바퀴 돕니다. 돌면서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없는지를 찬찬히 파악합니다. ‘아! 이런 것도 파는구나. 아! 이건 여기있구나’하고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나중에 꼭 필요할 때, 거기서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래서 꼭 필요한 물건을 샀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겠고, 더 고생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전에는 ‘노우하우(know-how)’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가 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많은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것보다는 ‘노우웨어(know-where)’ 그러니까 어떤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이나 자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또 문제들이 어려워져서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는 예나 지금이나 ‘노우하우’가 아니라 ‘노우웨어’가 중요합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속에 답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엉뚱한데서 헤매게 됩니다. 괜한 시간 낭비만 하고, 고생만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우리의 삶은 불신앙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얻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대답을 듣고 가타부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답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모두 앉히라고 하신 후에, 아이가 가져다 준 그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을 손에 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의 배고픔을 채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작은 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풍성함을 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정말 잘 먹겠습니다. 아멘.” 그리고는 제자들을 시켜서 음식을 나눠주도록 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리떡이면 보리떡, 물고기면 물고기...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정말 배가 터지도록 먹게 해 주었지만, 열 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처음 예수님 손에 들려 있었던 것보다도, 모두가 배부르게 먹고난 후에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남았던 것입니다. 


이게 답이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내신 시험문제에 대한 정답이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비슷한 문제들이 나오면 또 내놓아야할 하나 밖에 없는 정답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굳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셔야 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 분의 능력만으로도 충분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을 먹이실 수 있으셨으니까요.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감사기도는 단순한 감사기도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시청각교육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감사기도를 통해 제자들에게 정답 뿐만 아니라 풀이과정까지도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적은 것, 턱없이 부족한 것을 손에 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감사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일반적인 감사는 이미 있는 많은 것으로, 그것도 결과적으로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많이 주셔서 감사하다, 지내보니 은혜다, 그래서 감사하다... 이런 식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감사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분은 없는 상황에서 감사했습니다. 부족한 상황에서 미리 감사드렸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으셨을까요? 무엇이 그런 감사를 가능하게 했을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게 감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지금은 부족합니다. 그러나 감사합니다. 그 없는 것과 부족한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그 분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시니까 그러실 수 있으셨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어치피 자기 힘으로도 그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고, 그래서 그런 기적쯤은 언제든지 일으키실 수 있으시니까요.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완전히 다릅니다. 이번에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은 예수님이 직접 행하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믿음과 신뢰에서 나오는 감사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기적에 대한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하시는 일상적인 일을 단시간에 아주 큰 규모로 그것도 인상적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바로 이랬습니다. 보리를 심으면, 심고 또 심으면 한 알의 보리에서 수 백만, 수 천만을 먹일 수 있는 보리 떡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알을 낳고 낳고 또 낳으면 그 물고기 또한 수없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날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하실 일을 단 한 순간에 이루셨을 뿐입니다. 아이가 가져다 준 그 작고 부족한 것을 씨앗으로 삼아서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작은 것 그리고 부족한 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렸을 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엄청나게 풍성해질 수 있다면, 그 작고 부족한 것은 얼마든지 시간을 두고 조금씩 조금씩 풍성해 질 수 있으며, 또 어느 순간에 얼마나 더 풍성해 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감사기도를 통해서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는 우리의 삶에, 우리가 사는 이 땅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얼마든지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을 만나거든, 가진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해결불가능한 상황을 만나거든 머리부터 쓰거나 지레 포기하지 말고, 또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불평부터 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풍성하심을 믿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성도들을 심방해 보니, 우리 교회는 정말 크게 넉넉하신 분들이 없습니다. 그저 먹고 사시기는 하는데 부자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우리가 모여서 이룬 교회가 바로 우리 광현교회니까요. 또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어쩌면 여러분 중에는 해결불가능한 상황을 앞에 두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자기 능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문제를 대면하고 계신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렇게 부족한 우리, 이렇게 방법없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계산입니까? 그 계산을 통해 내려진 차가운 결론입니까? 아니면 그저 그렇게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도 아니면 그냥 포기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 제일 좋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모든 일의 가장 크고 결정적인 변수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 풍성하시고 넉넉하시며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해답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개인도 교회도, 그리고 복잡하게만 보이는 도저히 해결불가능해 보이는 이 나라의 정치도 모두가 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적고 부족한 것으로 넉넉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풍성하심을 아는 사람은 믿음에서 나오는 감사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없는 것, 지금 부족한 것을 붙들고도 거기 역사하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없는 것조차도 하나님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니까요. 그 분은 예나 지금이나 오병이어의 하나님이시니까요.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보이는 것 때문에 주저 앉아서는 안됩니다. 이것도 없고 또 저것도 부족하다고 불평만 늘어놓아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 똑같이 묻고 계십니다. “너는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너는 어디서 능력을 얻어 이 어려움을 해결하겠느냐?”고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풀이과정을 따라 올바른 답, 그리고 그 능력있는 답을 내놓은 일입니다.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는 일, 그 부족한 것, 그 없는 것을 손에 들고 이것으로 충분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믿음으로 감사드리는 일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삶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으로 풍성해 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부족하기 때문에 넉넉해 지고, 없기 때문에 풍성해 지는 그런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적은 것으로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를 남기는 그 기적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두고 두고 이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믿어지십니까? 그 때 오병이어의 하나님은 지금도 오병이어의 하나님이심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오늘 우리는 성찬식을 행하게 됩니다. 주님의 명령에 따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렇게 우리를 영원히 배부르게 하는,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참된 떡과 음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성찬식을 행할 때, 우리의 영혼은 그 떡과 음료로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은혜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무엇보다도 감사함으로 성찬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나를 배불리기 위해서, 나를 만족하게하기 위해서 그 귀한 피와 살을 내어주셨음을 기억하며 참된 감사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함께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고 이 은혜로  충분하다고 믿음을 다하여 고백하십시다. 그러면, 주님은 오늘의 성찬을 우리 모두의 영혼을 영원히 배부르고 갈하지 않게 하시는 우리를 위한 온전한 오병이어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추수감사절을 통해 우리 모두의 삶과 우리 교회에 참된 믿음의 감사와 그 능력이 회복되게 해 주셔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외치며  사는 오병이어의 은혜를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1. 그 동안의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하겠습니다. 부족한 것, 없는 것만 붙들고 불평불만했던 것을 고백하며 용서를 빌겠습니다. 
  2. 우리가 이제는 그 없는 것과 부족한 것을 손에 들고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해 달라고. 그래서 우리의 삶과 우리 교회에도 언제나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끊이지 않게 해 달라고.
  3. 오늘 성찬식이 정말 내 죄를 씻고 새롭게 하며, 다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시간이 되게 해 달라고. 오늘 내 속으로 들어오는 떡과 잔이 우리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오병이어가 되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