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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1.21. 새벽예배 -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한복음 58)

요0841to47 -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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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요한복음 8장 41-47절


사람이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고, 어떤 능력이 있고, 또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 사람을 가장 명확하게 잘 드러내 주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행동과 삶입니다. 특히 그 사람이 불리한 입장에 있을 때,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할만한 상황에 있을 때 보이는 그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형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를 말씀하고 계시지만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혈통 이야기만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더이상 둘러 이야기하실 수가 없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 아주 직접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보려는 안타까운 마음과 그들의 완악함에 대한 진노가 함께 담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죄에 매여있는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정확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44절과 45절이 그 내용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여러분, 우리가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 나름대로 은혜롭게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어느 주일 오후에 어떤 사람이 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 ‘너희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다, 너희는 다 마귀새끼다. 너희는 다 지옥에 갈거다’라고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붓는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시고 계시는 이야기는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아마 몇 십배다 더 불쾌하고 화가 나는 이야기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구원확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을 향한 욕도 아니고 저주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욕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자녀라는 껍질 속에 숨어서 욕심이라는 사탄의 법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욕심을 채우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더 이상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짓이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게만 해준다면 그것이 진리보다 더 가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말씀하시며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제거하려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사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가장 큰 특성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욕심, 살인, 거짓... 그러니, 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믿고 있고, 또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들은 사탄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 아비인 사탄의 뒤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다닐 때, 아마 이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햇살이 너무 강해서 커튼을 쳐 놓고 수업을 했습니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선생님은 흑판에 분필로 판서한 내용을 다 지웁니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 되었다고 즐거워 합니다. 그 때, 선생님이 커튼을 걷습니다. 그러면 다시 햇살이 교실을 가득 채웁니다. 그런데, 잘 놀던 아이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자기 입을 막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햇살 덕분에 자신들이 호흡하던 공기가 분필먼지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자신이 어디 속해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스스로도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진리가 들려오면 그 진리 때문에 스스로를 드러내게 됩니다. 자신의 소속과 삶의 모습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햇살 때문에 먼지로 가득 찬 교실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처럼 진리 때문에 죄와 거짓에 가득 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가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의 반응이 그 사람의 그 다음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들려오는 진리 때문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그 진리에 자신의 모습을 맞춰 간다면 그 사람은 비록 그 이전의 삶이 죄와 거짓에 속해 있었고, 그러면서도 자신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빛으로 나오게 될 것이고 다시는 어둠에 다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 때문에 자신의 진짜 모습이 드러날 때, 그것을 대면하기가 싫어서, 그리고 그 모습을 버리고 떠나기가 싫어서 오히려 진리를 거부하고 그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거절하게 될 때는 그 상황이 이전보다 훨씬 더 악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훨씬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고, 더 큰 죄와 거짓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게 되고 맙니다. 


4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상태에 있었던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니라” 당연히 알아들어야 할 사람들이 알아들어야 할 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진짜 문제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알아듣기만 한다면, 그래서 깨닫기만 한다면 되겠는데 도무지 알아듣고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왜 이들은 당연히 알아들을 수 밖에 없는 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주님은 그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니라” 얼핏 보기에 이 말은 그저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 속에는 듣는 것을 견디어 내지 못한다는 뜻, 그래서 듣지 못하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누군가가 어떤 이야기를 알아 듣지 못할 때, 거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로 진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이해력이 부족한 경우가 있고, 둘째로는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두번째의 경우입니다. 이해력은 충분한데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에 알아듣고 깨닫지 못하는 경우 말입니다. 이런 경우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알아듣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정말 큰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원래의 잘못에 어찌보면 더 커다란 잘못을 더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다보면 듣기 싫은 이야기, 받아들이기 싫은 이야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들이 윤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거나 성경과 위배되기 때문일 때도 있지만, 이런 이유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듣기 싫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지 내 취향에 맞지 않거나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떠나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내 편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만약 듣기 싫은 이유가 뒤쪽인 경우라면 우리는 그럴수록 오히려 더 의지적으로 그런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 나에게 내 삶을 움직일만큼의 깊고 큰 깨달음을 줄 때까지 그 이야기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듣는 것을 견디어 내야하고 듣는 것의 무게를 감당해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4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들려주시기 때문에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들려주시기 때문에 정반대로 믿지 않는 자리에 이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진리를 들으면서 점점 더 진리와 멀어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성도는 어느 순간에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듣는 것을 견디어 낼 영적인 귀가 열려있어야 합니다. 들려오는 진리의 무게를 감당해 낼 정도의 영성은 유지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들려오는 진리를 들을 수 있고, 그 진리가 주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며, 그 다음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속해 있는 죄와 어둠을 떠나서 빛과 생명으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소속과 본 모습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과 우리가 어떤 말들을 즐겨듣고 있는가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뒷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즐겨듣는 것이 바뀌면 우리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고 그러면 내가 속해 있는 곳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뒷부분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로 앞부분은 바뀔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즐겨 듣는 것이 변하지 않고, 또 듣는 것의 무게를 기꺼이 견디어 내지 않으면 내가 떠나야할 지금 속해 있는 곳과 나의 모습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귀를 열어 놓으십니다. 혹시 당장 그것을 따르지 못하겠더라도 그것 때문에 들려오는 진리를 향해서 귀를 닫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큰 일 납니다. 정말 큰 일 납니다. 우리의 소속은 우리가 듣고 깨닫는 것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듣는 일에 주의하시고, 또 듣는 것의 무게를 잘 견디어 내셔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하나님께 속한 자의 든든한 자리에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