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2.11.23. 금요기도회 -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기도 4)


삼상0101to10 -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pdf


20121123FE(#1).mp3.zip




본문 : 사무엘상 2장 01-10절


한 여인이 살았습니다. 신앙도 좋고 집안도 부유한 남편을 만나 그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지요.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전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 허전함은 남편의 사랑으로도 또 넉넉한 살림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다 가진 듯한 그 여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 꼭 있어야 할 것 한 가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들’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천년도 훨씬 더 전에 유대 땅에 살던 여인이니 지금 우리의 잣대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 시대의 여인들에게 아들이란 아무리 넉넉하고 충분한 다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여인에게 자식이란, 특히 아들이란 소망이며 미래였기 때문입니다. 엎친데 덮친다고 남편의 첩은 이 여인에게 아들이 없다고, 이 여인이 자식을 낳을 수 없다고 이 여인을 대놓고 무시합니다. 그것을 알고 남편은 자신이 열 아들보다 낫지 않느냐고 위로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인에게는 남편이 열 아들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한 아들이 열 남편보다 더 중요했으니까요. 참 불쌍하고 측은한 남편입니다. 오늘날의 남편들을 긴장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 여인은 마음이 괴로워서 기도하고 통곡합니다. 기도가 더 많았는지 통곡이 더 많았는지 알 길이 없는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들을 달라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나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 아들을 나실인으로 드리겠다고 기도 반, 통곡 반...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지냈습니다. 제사장은 그런 그 여인을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여인으로 오해했습니다. 참 분별력 없고 눈치없는 제사장이죠. 그 간절하고 통절한 기도를 술주정으로 생각하다니 말입니다. 자기 처지를 설명하는 여인에게 제사장은 미안한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평안히 가세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당신이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러나, 여인에게 이 못난 제사장의 한 마디는 하나님의 응답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축복에 대해 감사하며 일어서는 여인은 그 이후로 근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을 생각하셨습니다.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생각만 하셔도 아기가 생기니 말입니다. 한나는 그 날 밤 임신을 하고 열 달을 무사히 채운 후 순산을 했습니다. 여인은, 이제 불임의 여인에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여인은 아기를 품에 안고 이름을 붙여 줍니다. 그 이름은 귀하게 얻었다고 귀남이도 아니었고, 부자로 살라고 부남이도 아니었고, 오래 살라고 개똥이도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하나님께 구함이’였습니다. 그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너무 간단했습니다. 이름 그대로 하나님께 구해서 얻은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이는 항상 이렇게 불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함아!’, ‘하나님께 기도드림아!’ 사람들은 이렇게 이 아이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랬더니 주심아!’, ‘그랬더니 허락하심아!’라고 후렴을 넣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의 이름 안에서 이런 하나님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여인은 이 ‘하나님께 구함이’, ‘그랬더니 허락하심이’를 다시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날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런 아들을 주셨다고 한껏 기뻐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이전의 술주정같은 기도와는 완전히 다른 힘찬 기도, 아니 노래였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그저 미세하게 떨리던 나의 입술은 이제 크게 벌어졌습니다. 슬픔과 고통만 있었던 내 마음, 이리 저리 치이고 받히던 내 마음에는 이제 높이 치켜들 큰 뿔이 솟아났습니다. 주님이 주신 구원의 기쁨 덕분에 그 든든한 뿔이 솟아났습니다. 정말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최고입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든든하십니다. 누가 당신 앞에서 함부로 까불겠습니까? 나를 비웃고 교만한 말을 내뱉던 사람들은 다 어디갔습니까? 그들은 없지만 나는 있습니다. 그들은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아픈 탄식을, 술취한 중얼거림같은 그 보잘 것 없는 기도를 그들의 교만한 말보다 더 무겁게, 더 귀하게 여겨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노래할만 합니다. 아니 노래해야 합니다. 소리라도 쳐야하고 기쁨 가득한 괴성이라도 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음 여인의 기도는 조금 엉뚱한데로 튑니다. 여전히 여인은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그 노래로 하나님께 대한 믿으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듣기 좋을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은 온 세상을 휘딱 뒤집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뒤집힐 때는 뒤에 있는 사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좋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과 앞에 있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넘어진 자는 좋아하지만 용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주린 자들은 좋아하지만 풍족한 자들을 싫어하고, 가난한 자들은 좋아하지만 부자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 낮은 자들은 좋아해도 높은 자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노래 자체를 좋아하지 않죠. 그러나, 이 노래는 단순히 그렇게 세상이 뒤집히기를 바라면서 부른 노래도 아니고, 그렇게 뒤집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도 아닙니다. 그 보다는 하나님을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는 분으로 고백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들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의 무시를 당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심한 탄식으로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가장 귀한 분에게 돌려드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듣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두 가지 일이 한나의 인생을 정반대로 뒤집어 버렸습니다.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도 뒤집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뒤집힌 것이 아니라 바로잡아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뒤집으심으로써 바로 잡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한나의 눈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자기 삶의 작은 경험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그 동안은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나에게 주신 은혜는 한나에게만 주시는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한나에게 일어난 일은 한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낮은 자를 높이시고, 높은 자를 낮추시고,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시고, 부한 자를 가난하게 하시고, 아들 없는 자에게 아들을 주시고, 아들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의 높낮이를 조절하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교만한 자들을 낮추시고 절망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의 가장 능력있고 완전한 주권을 가지신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한나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그런 높고 힘있는 하나님, 그러나 한 없이 좋으신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악과 그 악이 만들어내는 부조리라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악과 부조리는 이 세상에 수많은 피해자와 상처를 만들어 내지요. 뿐만 아닙니다. 이런 것들과 상관없이 우리 중에는 힘들고 어려운 일 때문에 고통과 낙심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기도 하구요. 그럴 때 우리는 참 많이 힘들어 집니다. 서글퍼 집니다. 한나처럼 대낮에 술취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게 되기도 하고, 혼자서 아픈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깊은 절망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이럴 때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셔야 할까요? 바로 한나의 하나님입니다. 언제든지 이 모든 일들과 상황을 휘딱 뒤집을 수 있는 하나님, 그렇게 해서 낮추실 것은 낮추시고 높이실 것은 높이시는 하나님, 그렇게 해서 웃을 자는 웃게하시고 울어야 할 자는 울게 하시는 하나님.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지 않으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구원이 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믿으나 마나한 하나님이고, 그런 하나님은 의지하나 마나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다. 


한나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뒤집어 제 자리로 돌려놓으시는 하나님이, 불임이었던 자신과 같은 이스라엘, 그렇게 소망이 없고 미래가 없는 이스라엘을 소망있게 하실 것이라고, 온 세상을 바로 잡아 소망있게 하실 것이라고 믿으면서 닫혔던 입을 크게 열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한나의 고백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임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아무런 미래도 꿈도 없었던 이스라엘을 위해서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미래도 소망도 없이 멸망으로만 치닫던 이 세상을 위해서 그 분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온 세상을 위한 아들로 주셨습니다. 그렇게 가장 절망스럽던 상황을 완전히 뒤집으셔서 소망있게 하시고 또 가장 확실한 구원의 미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닫혔던 한나의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던 하나님은 그렇게 닫혔던 이 세상의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렇게 언제든지 모든 상황을 당신의 뜻대로 뒤집으실 수 있는 그런 능력있는 하나님이십니까? 절망을 뒤집어 소망이 되게 하시고, 곤경을 뒤집어 구원이 되게 하시며, 또 탄식을 뒤집어 찬양이 되게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까? 언젠가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악과 부조리들을 뒤집어 엎으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게하실 그런 정직한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진실로 믿습니까?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또 찬양하고 있습니까? 혹시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기대하지도 못하고 또 믿지도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하나님을 알고 또 믿으며 목소리 높여 찬양하는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나가 이런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되었고, 믿게 되었고,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이 계시다고, 또 이런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해 줄 수 있게 되었던 이 모든 일들이 모두가 다 그저 자신의 입술만 들썩일 수 있을 뿐이었던 그 연약한 기도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그런 기도를 통해서 한나를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를 위해 그렇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거를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이 엄청난 상황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회의와 실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응답이 없을 때, 커다란 바위같은 현실이 꿈쩍하지 않고 버티고 있을 때, 우리의 기도는 힘을 잃고 희매해지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구하는 것을 들으시는 분이 다른 신이 아니라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을 언제든지 뒤집어 버릴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나의 그 희미한 기도를 들으시고 불임의 이스라엘에게 든든한 미래를 허락하셨던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믿음도 부족하고 또 기도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는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능력도 지혜도 권세도 그 무엇도 그 분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나의 희미한 기도를 통해서도 온 세상을 온전케 하실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울고 때로는 통곡할 때가 있더라도 기도하면 됩니다. 불임의 여인을 사무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분이 들으실 것입니다. 분명히 듣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기대하지 못했던 좋은 것으로 가장 좋은 나의 삶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채워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