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11.25. 주일오전 -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가복음 11)


막0201to12 -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pdf


20121125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2장 01-12절


한 번 유명세를 탄 사람, 한 번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들은 그렇게 알려지는 순간부터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닙니다. 자기 몸이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대로 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어디 외식한 번 맘놓고 나가기도 힘들고, 심지어는 집에 있다고 해도 몰려드는 팬들 때문에 휴식도 가지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사역을 시작하시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권세있는 가르침과 또 행하시는 이적들 때문에 아주 유명해지셨습니다. 이 유명세는 예수님을 아주 힘들게 했습니다. 꼭 필요한 휴식조차 갖기가 힘들어지셨던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기도하실 시간조차도 확보하지를 못해 정말 해뜨기전 새벽 밖에는 짬을 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동안의 사역을 마치시고 조금의 휴식을 얻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집이라고 해서 안전지대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집까지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집 안은 물론이고 문 밖까지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발 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느지막하게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늦게 도착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인지 가족인지는 몰라도 이 사람들은 병상에 누워 꼼짝하지 못하는 한 사람을 다른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오느라고 다른 사람처럼 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 진지한 분위기, 또 너무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 도저히 그들을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래도 안되겠지? 그렇지? 이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간다는 것도 그렇고, 또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예수님이 고쳐주신다는 보장도 없잖아. 오늘은 돌아가고 다른 날 또 오든지 하자.” 그래서 그들은 오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었다면 이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얘 기록될 필요조차 없었을테니까요. 실제로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을 몰고 돌아다니실 때, 그 사람들에 치어서 또 눈치를 보느라고 발걸음을 돌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러나 그 이유가 아무리 정당하고 또 이해할만한 것이라고 해도 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왔고 또 어떻게 해서든 주님을 만난 이야기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신앙을 위한 유익한 이야기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치료하려고 어려운 길을 왔지만 사람들의 장벽에 막힌 사람들... 아무래도 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이들은 그 사람을 메고 예수님의 집 지붕으로 올라갑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놀랍게도 예수님의 집 지붕을 뜯어내고 그 병자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달아 내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들은 계획대로 그 집 지붕을 뚫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집 안에서 조용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또 집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다른 병자들은 또 얼마나 괴씸하게 생각했을까요? 아마 거기 있던 사람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이 사람들을 욕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침상에 뉘여서 달아내릴 정도였다면 그 구멍의 크기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구멍으로 올려다 보이는 하늘은,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그 사람들은 얼마나 황당한 모습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집이 자신의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태연하기만 하셨습니다. 오히려 속으로는 기쁘고 대견해서 껄껄껄 웃고 계셨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올려다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 지붕에 뚫린 구멍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 있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제가 이전에 드렸던 질문을 한 번 더 드리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죠? 그렇습니다.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죠. 믿음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을 받는 하나 밖에 없는 손이기 때문입니다. 그 손이 없으면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나름대로의 믿음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믿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결코 예수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진짜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신앙 속에 얼마나 좋은 것들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중풍병자를 메고 왔던 사람들은 사람들에 막혀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집 지붕 위로 올라갔고 그 집 지붕을 뚫었습니다. 다른 집도 아닌 예수님의 집을 말입니다. 세상에! 예수님께 꼭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찾아왔으면서 그런 예수님의 집 지붕을 뚫는다니!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나 자신이나 혹은 우리의 가족이 병이 아주 어려운 병이 걸렸는데 그 병을 고칠 가능성이 있는 한 명 밖에 없는 의사를 만나러 갈 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많다고 진료실 위층으로 올라가서 그 지붕을 뚫고 우리 가족을 그 아래로 내려보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적인 문제는 뒤로 하고라도 그 일을 그 의사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혹시 불쾌하게 여긴다면 병치료고 뭐고 다 끝나버리고 말게 되니까요. 그런데,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 의사가 그 병을 100퍼센트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고, 그 의사는 그렇게 하더라도 병을 고쳐줄 만큼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그 의사에 대한 인격적인 확신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런 무모한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믿음과 예수님을 향한 그런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그 병자의 질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비록 자기 집 지붕을 뚫고 병자를 달아내리더라도 그 병자의 치료를 마다하시지 않으시는 선하신 분이시고 연약한 자들을 향한 큰 긍휼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는 인격적인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치 보지 않고 집 지붕을, 그것도 예수님의 집 지붕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무모한 일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고치지 못할 질병을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성도들을 만나고 또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치 벽을 만난 것같은 느낌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참 안타깝습니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상황에만 묶여 있습니다. 아무리 권면해도 움직이려고 들지 않습니다.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와라, 더 견고한 믿음을 가져라’라고 이야기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직접 안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들을 주욱 늘어놓습니다. 물론 안되는 상황도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인 제가 들어보면 솔직히 그 모든 것이 핑계라고 느껴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 상황적인 장애물들을 넘어서서 더 깊은 믿음으로, 더 견고하고 능력있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려는 의지가 없는데, 그것을 합리화 하려는 핑계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에는 어쩔 수 없이 결단이 필요합니다. 물론 참된 신앙을 가지고, 그러한 신앙의 풍성한 세계로 들어오게 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로 나아오겠다는, 거기로 들어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그 일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넘어서는 것은 우리가 직접 해야할 일입니다. 그 장애물이 상황적인 것이든 아니면 게으름이나 무관심, 혹은 교만함이나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과 같은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이든, 그 무엇이든 넘어서야 합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왔던 사람들도 뒤로 돌아서면서 그 병자를 향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야, 우리가 좀 늦은 것 같다. 여기까지가 우리 한계인 것 같다. 정말 할만큼 했지만 더 이상은 안되겠다. 그냥 돌아가자.”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중풍병자도 이렇게 반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지? 저렇게 사람이 많은데 예수님이 나같은 사람에게 신경이나 쓰겠니? 또 어떻게 이 몸을 해서 저 사람들을 뚫고 들어갈 수 있겠니. 그냥 돌아가자.” 라고 말입니다. 또 자신을 지붕으로 끌고 올라갈 때도 “야야, 그러다가 나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 너희들 미쳤냐? 우리 이런 위험한 모험은 하지 말자. 그냥 돌아가자. 난 지금으로도 충분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에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을 만날 방법을 찾았고 찾은 방법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또 그렇게 하면 안되는 많은 이유와 핑계들을 그렇게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모두가 가장 원했던 것을 모두 함께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길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장애물을 넘어서는 모험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믿는 것의 진짜 유익과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적당하게, 편안하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번번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의 문 앞에서 힘없는 발걸음을 돌이킬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쉽지 않지만, 또 그렇게 할 수 없는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님 앞으로 데리고 와서 주님과 만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하나님은 그렇게 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믿음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믿음에 만족해 하시며 하나님의 선하심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믿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길을 찾으십시오. 장애물들을 넘어갈 수 있는 용기를 내시고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러면 거기 주님께서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손에 들려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병자를 고친 일 때문에 예수님의 집 안에는 작은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저 그 사람을 향해서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듣자 마자 거기 와 있던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화를 내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하나님 밖에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없는데! 이 사람은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다.” 사실 이들의 판단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보기에는 일개 인간에 불과한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니 그것은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일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생각해 보아라. 내가 이 사람에게 네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쉽겠느냐? 아니면 네 병이 나았다고 말하는 것이 쉽겠느냐?” 사실 이 문제는 수수께끼 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것이 쉬울까요? 그냥 말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게 책임질 일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확인 가능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병이 고쳐졌다는 말이 하기가 더 쉽습니다. 정말 죄가 용서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전혀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이 답이 될수도 있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것이 답이 될수도 있는 그런 수수께끼입니다. 이렇게 알쏭달쏭한 문제를 내놓고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나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이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은 원래부터 병을 고쳐주는 것 자체에 가장 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리새인들의 말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중풍병자가 고쳐졌다면, 그것은 그냥 병고치는 이적이 한 번 더 일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이 일은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만 한 번 더 보여주는 일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네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이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면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도 있으며,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병자는 아직도 누워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람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 아시죠? 그 병자가 겨우 겨우 걸어간 것이 아닙니다. 1년 넘게 재활훈련을 받은 후에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목발을 짚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누워있던 침상, 조금 전에 천장에서 부터 타고 내려온 그 침상을 자기 손으로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그 병자는 자신의 병을 완전히 고침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죄도 완전하게 용서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병고치는 능력 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도 가지신 분이심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진실로 믿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 하나님께 속한 모든 능력과 권세가 있음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은 그 어떤 연약함이라도 치유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오늘날도 살아계셔서 이와 같은 일을 일으키시는 능력있는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저는 예전에 아주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그 청년도 그렇고 그 청년의 어머니도 그렇게 저와 무척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그저 책에 기록되어 있는 일화가 아닙니다. 이 청년은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약간 세속적인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이 청년이 수업을 마치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삼층 난간에 걸터 앉아 있다가 뒤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머리를 다치지는 않았는데, 척추가 다 망가져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그렇게 진단을 내렸구요. 그런데, 이 청년의 어머니 집사님께서 이 청년을 돌보며 기도하는 중에 하루는 성경을 읽는데, 나면서 부터 일어나지 못했던 사람이 일어나는 대목에서 ‘내 아들도 나았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신다’라는 확신이 생겼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 그대로 되었습니다. 물론 완전히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평생 누워있어야 하고 자기 힘으로는 걷지도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던 이 청년이 생활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이 되어서 그 이후로 정말 하나님을 잘 믿고 교회를 잘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 어머니의 믿음은 그 청년의 몸과 영혼을 함께 치유하는 매개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한 사람의 고침받을 수 없었던 병자가 고침을 받은 치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어떤 사람의 어떤 심각한 질병이라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려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일이 매개가 된 것은 바로 그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던 사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선하심을 믿는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통해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해결할 수 없는 곤경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집 지붕이라도 뚫어낼 만큼의 주님을 향한 적극적인 믿음의 행동이 사랑하는 사람의 병을 고쳤고, 그의 죄가 용서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도 주님은 똑같이 일하십니다. 성도들의 믿음을 통해서 똑같이 일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선하심을 진실로 신뢰하게 될 때, 우리의 참된 믿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게 될 때, 주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오늘날도 똑같은 일을 행하십니다. 나에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부족하게만 보이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들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만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여러분의 삶의 일부로 만들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더욱 은혜로운 사실은 이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은 이 사람들에게만 유익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은 하나님께도, 그리고 예수님께도 말할 수 없이 유익했습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그 어떤 이유에서건 그 장애물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돌아서고 말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면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병상에 누워 고통당했을 것이고, 그의 죄 또한 용서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병자를 데리고 왔던 사람들은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예수님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사용했을 때, 그 믿음을 사용해서 안되는 이유들, 할 수 없는 이유들을 넘어서서 예수님께로 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얻었으며, 믿음의 능력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예수님께서도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찬란하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선하심을 믿는 믿음은 우리의 신앙에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은혜를 위해서도 우리의 믿음은 필수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우리의 믿음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주시며,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온전하게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일하십니다. 이제 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움직할만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안되는 이유, 할 수 없는 이유를 넘어서는 그런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온전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우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믿음을 소유하고 또 회복해서 크고 선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 분께 영광돌리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