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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12.02. 주일오전 -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대강절 첫주일)


사0901to07 -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2012 대강절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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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이사야 9장 1-7절


성도 여러분, 대강절이라는 절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오늘부터 그 대강절이 시작되는데요. 대강절이라는 말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으로 성탄절 4주 전의 주일부터 성탄절날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올해 대강절 기간은 23일이 됩니다. 원래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모두 소망하는 절기였지만 지금은 거의 예수님의 탄생만을 기념하는 의미만 지니게 되었습니다. 대개 개신교회에서는 이 대강절이라는 절기를 별로 크게 지키지 않습니다. 이 절기 자체가 카톨릭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절기는 카톨릭의 절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절기죠. 기독교 절기 중에서 성탄절과 부활절은 가장 중요한 두개의 기둥같은 절기입니다. 둘 중에서 부활절은 종려주일부터 시작해서 수난주간, 수난일, 그리고 부활절로 이어지는 기간이 있어서 그래도 의미있게 지켜지는 편이지만 성탄절은 성탄 이브와 성탄절 거의 이틀만 지켜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성탄 이브는 그저 들떠서 밤늦게 까지 지내다가 막상 성탄절날은 그 피곤함 때문에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대강절이야 말로 꼭 필요한 절기일 것입니다. 적어도 일년에 한 달 쯤은 우리에게 그 귀한 구원과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져다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며, 차분한 기쁨과 감사 속에서 그 분의 탄생이 가지는 참된 의미와 은혜를 묵상하며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일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이 절기 동안 주일에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설교하고, 주간에는 묵상자료를 묵상하는 일을 통해서 모두가 이 기간만큼이라도 우리 주님을 많이 묵상하며 그 구원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지내도록 하려고 합니다. 이 절기를 통해서 여러분 각자의 마음 속에 그 옛날 베들레헴 마굿간의 겸손한 구유 하나씩 마련하시고 거기 영광스러운 메시야를 다시 모셔들이고, 다시 오실 구세주를 향한 소망을 충만하게 채우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활동하던 당시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그 어떤 성경보다도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풍성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감격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 말씀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셨고, 우리가 성찬을 할 때마다 함께 묵상하는 성경구절도 이사야서의 말씀이고, 헨델의 오라토리오인 메시야 또한 이사야서 말씀을 가사로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700년도 훨씬 전에 그 분에 대한 이런 정확하고 은혜로운 말씀이 기록되었는지 우리로서는 그저 놀랄 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감사와 감격을 더 생생하고 확고하게 만들어 주는 커다란 유익을 주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앞으로 5년 동안 이 나라를 이끌어 줄 지도자를 선택하기 위해서 전 국민이 고심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사람도 다르고 또 정치적인 성향도 다 달라서 차기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르지만, 아무튼 크게 둘 중의 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지도자를 선택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이 슈퍼맨이 되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 사람에게 의지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어려움과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 세상에 이런 꿈을 이루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유능할 수는 있어도 모든 난관을 뚫고 내가 사는 나라만 잘 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과도하게 의지하는 것은 결국 그만큼 더 깊은 실망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의지할 때도 마찬가지의 심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나라와의 돈독한 관계가 곧 자기 나라의 안전과 번영을 의미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래서 그 나라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잘은 몰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냉혹한 관계가 바로 국제관계입니다. 국제관계는 철저히 힘과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강대국이 약한 나라를 돌봐주는 것은 그 나라가 좋은 나라여서가 아니라, 그 강대국이 그 약한 나라에 주는 것보다 그 나라에서 얻을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주는 것이 얻는 것보다 많다고 여겨질 때는 가차없이 돌아서는 것이 강대국의 심리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에 대해 너무 심하게 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다 그렇게 하고 있고, 그것이 국가라는 집단의 생존방식이니까요. 또한 국제역학관계는 항상 변화합니다. 오늘은 이 나라가 가장 센 나라지만 언제 또 그 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가 그 자리를 차지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도 그렇지만 나라도 너무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는 그것이 그 나라를 가장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든, 혹은 집단적으로든 언제나 그 누군가에게 어느 정도의 소망을 걸고 또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실망과 때로는 위험을 가져올 줄 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안전과 모든 것을 책임지기에는 너무 약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그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또 본능적으로 누구에게인가는 기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딜렘마입니다. 우리 모두의 곤경입니다. 실망할 것이 분명하고 때로는 그렇게 의지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의지해야만 한다는 것 말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래도 우리가 의지해도 좋을만한 대상을 최선을 다해서 찾아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주전 8세기 후반부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굉장히 파란만장한 시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시기와 내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의 통치말엽부터 므낫세 왕의 집권 초기까지 약 50여년 동안 사역하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남유다를 52년동안 다스렸는데, 그는 여러가지 면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다시 보여준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주전 745년경 웃시야 왕이 죽자 남유다에는 권력의 공백이 생겨났습니다.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뒤를 이어 16년 동안 다스린 후, 그의 아들 아하스가 즉위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이미 앗수르가 강성해져 세계 정복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이 때 아하스 왕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앗수르의 협박 앞에 무릎을 꿇고 조공을 바쳤으며,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로 보내서 우상숭배를 배워오도록 했습니다. 아하스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앗수르와 앗수르 신의 종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뒤를 이은 왕이 바로 히스기야였는데, 히스기야는 알려진대로 경건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고 우상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소망을 두도록 지도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 36-3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를 이은 므낫세는 악한 왕으로 55년동안 남유다를 다스렸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므낫세가 이사야를 톱으로 켜서 죽인 장본인이라고 합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살았던 이 시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의가 거기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로다...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악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그 당시의 상황은 그야 말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망가져 버린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신뢰하지 말아야 할 잘못된 것을 신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유다가 가장 강하게 의존했던 것은 바로 이방의 왕들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위협이 커지자 유다는 이집트 왕을 신뢰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이 쇠약해지자 백성들은 앗수르의 왕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중반에 이르러 앗수르의 예루살렘 포위가 실패로 끝난 후 앗수르 또한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 바벨론이었습니다. 결국 이후에 여기 붙고 저기 붙던 유다는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유다 백성들이 의지했던 것은 이방나라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그 나라들의 신들도 의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동방풍속이 가득했고, 자기 손으로 만든 이방의 우상들을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마술사들을 찾아가 궁금한 것을 묻기도 하였고, 땅은 온통 아세라 기둥과  산당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스올, 그러니까 죽음과 언약을 맺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22장을 보면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 동시에 하나님을 자신들을 위한 보호자로 의지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또 유다는 신실하지 못한 유다의 왕들을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왕들이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로 갈 때, 유다백성들은 그 왕들을 맹종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왕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서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역사가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이야기와 너무 닮아있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지만 종종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시험을 받아 잘못된 것, 우리의 신뢰를 두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신뢰를 두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 때문에 커다란 곤경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걸었던 길과 똑같은 길이죠. 그래서 만약 이런 일이 반복되고 지속된다면, 우리의 삶이, 개인과 공동체의 영원한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쉽게 짐작하게 됩니다. 같은 씨앗에서는 같은 열매만 맺히게 되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할까요? 누구를 신뢰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무엇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유다가 수 백년동안 반복해온 실망을,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반복해온 실망을 멈출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들의 역사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이사야는 6장 1절에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던 때를 이렇게 말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 환상은 그저 우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웃시야 왕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200년 만에 솔로몬의 영광을 되찾았던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도 죽었습니다. 이 왕을 의지했었던 백성들은 얼마나 실망했을까요?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런데 그 때 이사야 앞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있었습니다. 웃시야의 왕좌는 비어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왕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 찬란하던 웃시야의 영광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여전히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 이스라엘백성이 의지해서는 안될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비록 웃시야가 훌륭한 왕이었음에 틀림이 없지만 그는 믿고 의지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온통 그 왕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보좌에 영광스럽게 앉아계신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바로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웃시야만 바라보았던 이스라엘에게 웃시야의 죽음은 그것 자체로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웃시야가 죽고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습니다. 마치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전전하는 음란한 여인처럼 아무에게나 몸을 맡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지하는 바로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또 말씀하시며 유다를 말려보시지만 유다는 그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실망과 고통의 역사는 반복되고 또 반복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진노도 반복됩니다. 


그런데, 그런 반복되는 운명이 끝나는 때가 옵니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지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지금 이사야는 미래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으니 여기서 과거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장래에 그렇게 되어질 일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미래로 놓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 나오는 지역들은 모두가 다 이방나라에 정복당하여 고통을 당하게 될 지역이었습니다. 이리 찟기고 저리 먹히느라 어둡기만한 시간들을 보낼 지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지역을 건져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지역을 가장 영광스러운 곳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흑암에 거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흑암에 거하던 백성,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거절하던 사람들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반역과 죄악 때문에 짙은 어둠만 가득  찼던 그 땅에 빛이 비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나라에서의 기쁨은 추수하는 즐거움과 승전의 즐거움과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을 압제하던 모든 자들을 하나님이 직접 막대기 꺾듯이 꺾어 버리실텐데 마치 사사시대의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칠 때처럼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때가 되면 모든 전쟁이 끝나게 될 것입니다. 혼란도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평화의 때가 올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저 은혜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그들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은혜로운 회복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바로 ‘한 아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 임마누엘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그 아기에 대해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태어나게될 아기는 평범한 아기가 아닙니다. 그 아이는 다른 아기들처럼 여인의 몸을 빌어 태어날 것이지만 그는 아주 특별한 왕이 될 것입니다. 그의 어깨에는 왕의 홀이 놓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왕이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반항했고 그래서 가장 짙은 흑암 가운데 거하며 고통당하게 되었던 그 사람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그들이 살았던 땅에서 원수들을 내어쫓고 그 땅을 가장 영광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위해 이런 위대한 왕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왕의 이름이 이상합니다. 그리고 하게 될 일들은 더 이상합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한 모사입니다. 즉, 불사사의한 일을 계획하는 자입니다. 불가사의한 자? 왕이 계획하게될 불가사의한 일이 무엇일까요?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이름들은 사람에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평강의 왕자’입니다. 그 왕에게는 권세가 무한하고 영원히 더해질 것입니다. 또 그의 다스림 덕분에 더해질 평화도 무한하고 영원할 것입니다. 그 왕이 통치를 시작하면서부터 정의와 공의로 그 나라를 영원히 세울 것입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날 한 아기, 그래서 사람들에게 주어질 왕은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영원히 계시는 아버지입니다. 그 권세가 무한하고, 그가 베푸는 평화가 무한하며, 그의 나라는 정의와 공의로 영원히 굳게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전능하고 영원하시며 무한한 권세를 지니셨으며 무한한 평화를 주시는 평화의 왕자, 그 나라를 영원한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실 분... 이런 존재는 사람 중에 없습니다. 인간 중에는 사람이면서 하나님인 사람도 없고, 아버지이면서 아들인 사람도 없고 영원하고 무궁한 사람도 없고, 특히 자기에게 맡겨질 나라를 영원한 정의와 공의 위에 세울 수 있는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아기는, 이 왕은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습니다. 임마누엘, 그러니까 그저 저 하늘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실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를 또 무엇인가를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지해야할 대상을 선택하는 일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될 수 밖에 없고, 우리는 우리가 의지해야할 대상을 잘 선택할 때 신중의 신중을 다해야 합니다. 내가 의지하려는 사람 혹은 그것이 우리를 우리의 모든 고통과 어둠으로부터 건져줄만한지, 우리를 빛으로 인도해 줄 수 있는지, 그래서 우리에게 참된 즐거움을 줄 수 있는지 잘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아얘 이러한 고통과 어둠의 원인도 완전히 끝장내버릴 수 있는지, 그럴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는지, 다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할 가능성은 없는지도 더불어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유다가 의지했던 왕들과도 같을 것입니다. 스스로도 악하며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왕 말입니다. 또 그렇지 않은 것들은 이방나라들과 같을 것입니다. 지금은 천하를 호령해도 결국에는 꽃 시들듯이 스러져 버릴 나라들, 그래서 의지했던 나라들을 더 큰 곤경으로 몰아넣을 수 밖에 없는 이방 나라들 말입니다. 


우리를 진실로 평화롭게 해 줄 수 있는 왕, 마음놓고 신뢰하고 의지해도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왕, 한 번의 구원을 영원히 이어지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왕이 되려면, 그 또한 평화를 지극히 사랑해야 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치우침이 없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자기의 죄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자기 유익에 전혀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그의 권세와 능력은 영원하고 무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누구도, 심지어는 시간의 흐름도 그 통치를 방해하거나 망가뜨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우리의 작은 잘못으로 실망하지 않아야 하며,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지 않고 영원히 지켜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마음놓고 의심과 불안함이 없이 신뢰하며 우리의 영혼까지도 믿고 맡길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이런 것이 있나요? 재물이, 사람이, 그리고 그 어느 강한 나라라도 우리에게 이런 의지의 대상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 땅에서 난 사람들, 이 땅에 속한 것들 중에서는 이렇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영원히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또 그 누구라도 우리를 영원히 안전하게 해 줄 수도, 영원히 온전하게 인도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또 우리를 영원히 책임져 줄 능력도, 그리고 선함도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의지하고 의존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믿고 의지하면 언젠가는 마치 갈대지팡이처럼 부러져 우리의 삶과 영혼을 찌르고 말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낸 후에라도 분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러면 더 큰일입니다. 그 곤경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잊으면 안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원히 의지할 수 있는 영원하고 또 무한한 능력을 지닌 대상, 그리고 우리를 변함없이 선하게 다스릴 수 있는 그런 의지할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우리를 영원히 책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전체라도 우리에게 이런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유한하고 흔들리며 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영원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만을 의지해야 하며, 또 그 분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십니다. 그리고 전능하십니다. 그 분은 또한 영원하십니다. 그 분은 지극히 선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향한 꺼지지 않는 열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미 이런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습니다. 이런 한 아들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바라보던 그 왕, 유다가 고대하던 그 임마누엘은 이미 우리에게 오셨고 또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끈질긴 열심이 그 모든 은혜로운 언약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영원한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믿음의 주로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영원한 안전과 영원한 평화, 영원한 든든함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대강절에는 내가 과연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지, 어디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과연 그런 것들은 내가 온전히 의지할만한 것들인지를 꼭 한 번 정직하게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과감히 그 손을 놓으시고 영원한 피난처요 영원한 산성이며,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신 우리의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 분을 믿는 믿음을 새롭고 든든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번 대강절을 지내면서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의지하며 유다처럼 사는 삶, 그 어리석고 불안한 삶을 내려놓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서 살아가는 참되고 기쁜 삶, 영원히 든든하고 안전한 삶을 선택하게 되는 가장 복된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