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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2.06. 새벽예배 -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대강절 네째날)

살전0213to20 -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pdf


20121206D (#1).mp3.zip




날짜 :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20절


목사가 되어서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있던 어느 날, 저는 왜 나는 목회자가 되었고, 또 왜 목회를 하고 있는가? 왜 다른 일이 아니라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 하는 목회자에게는 굉장히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떠오른 질문이니 피할 수도 없었죠. 사실 저에는 큰 일이 난 것이었습니다. 제 성격상 제가 그 질문에 스스로 만족할만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굉장히 힘들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저는 그 질문에 스스로도 수긍할만한 신앙적인 답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의 목적을 하늘나라에서 조금이라도 더 큰 영광을 얻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비록 그런 거창한 목적에 비하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목적만큼은 그렇습니다. 제가 목사의 일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더 큰 상급을 받는 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목회를 통해서 이런 목적을 이루려면 바로, 저의 목회의 대상이 되는 여러분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 목회의 이유와 목적은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 조금이라도 더 영광스러운 성도로 세우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에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말이죠. 그것보다 목사로서의 저를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이기적인 목적인 것 같기는 하지만 저는 이것보다 모두를 위한 더 좋은 목회의 이유를 찾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이 목적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 목적이야 말로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고, 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동시에, 여러분들의 영원한 유익을 위한 최선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 어려움이란 박해와 이단의 유혹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사도 바울이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썼던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요즘 표현으로 정말 좋은 교회였습니다. 1장 3절을 보시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균형을 이루었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둥을 모두 든든하게 세우고 있었고 그래서 마게도니아 지역의 모든 교회의 본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를  쓰는 사도 바울은 굉장히 흥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 속에는 애정어린 권면은 있어도 다른 편지들과는 달리 교회에 대한 심한 책망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교회가 있다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는 정말 정말 큰 복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야 말로 바울이 그 큰 어려움과 핍박가운데서 얻은 확실한 열매였고 그래서 그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목사여서 조금 압니다만 정말 자신이 가르치고 양육한 성도들 중에서 이런 성도들이 있다는 것은 목회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이고 복인지 모릅니다. 솔직히 일을 하다보면 굉장히 낙심되고 자신의 사역에 대한 확신이 약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런 성도들을 기억하는 것은 사역자들을 다시 회복시켜주기에 충분한 은혜가 됩니다. 


바울은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끊임없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큰 흥분과 기쁨 속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물론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주는 여러가지 구체적인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기도 하지만 바울이 정말 흥분하면서 감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보다 근본적인데 있었습니다. 13절이 그 이유인데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 


이 편지를 쓸 당시 사도 바울은 굉장히 안타까운 현실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도하며 가르친 복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공격하는 사람도, 이유도 다양했지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진짜가 아니라 꾸며낸 가짜라고 주장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주장에 교회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울이 의심받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거부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복음이 거부된다는 것은 첫째로는 그렇게 거부하는 사람들의 믿음과 구원이 흔들리는 것을 말하며 둘째로는 그 복음을 믿는 믿음만이 줄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즉, 복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여기 저기서 발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바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사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이 그렇게 흥분해서 칭찬할만한 교회로 성숙해 가고 또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그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이유는 바로 복음에 대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을 통해 복음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이 성숙하고 균형있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교회, 그리고 성도 개인의 신앙을 균형있게 만들어 주고 또 지켜주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 힘은 바로 복음을 있는 그대로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오늘날 복음이라고 이름붙여진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물질적인 복만 약속하고 믿음의 고난을 이야기하지 않는 값싼 은혜라고 불리워지는 ‘영광의 복음’이 있구요. 단지 영혼의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반쪽짜리 복음도 있구요. 사회의 개선에만 관심을 가지는 땅만 생각하는 사회복음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물론 어찌보면 다 일견 타당한 듯 보이지만, 이런 복음들의 약점은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딘가는 턱없이 부족하고 어딘가는 완전히 빠져있기도 합니다. 물론 복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또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일, 그리고 그렇게 전해진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정말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정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복음, 생짜배기 복음, 십자가의 피 뭍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런 복음을 믿지 않으면 결코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가기 쉽습니다. 사람을 이 땅에 묶어놓거나, 도덕적으로 무책임하고 이기적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인간의 능력과 결단에 대한 자만심을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복음이 진짜로 하려는 일과는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11절에서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목적이 나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13절로 가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 복음이 그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복음이 그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행하는 일이란 결국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들로 바꾸는 일을 의미했고,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서는 그런 놀라운 변화가 풍성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흥분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의 믿음을 칭찬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늘의 영광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바울에게 있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변화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장 확실한 자랑거리요 면류관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리고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은 성도를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에게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복음을 믿는 믿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대강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계절이기 때문에, 복음을 다시, 그리고 제대로 들어야 하는 계절이어야 하기도 합니다. 


복음의  참된 능력은 변화입니다. 죽었던 우리,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하늘나라와 그 영광에 합당한 사람들로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는 것이 복음과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 가지는 능력입니다. 


이번 대강절에는 내가 믿고 있는 복음에 대해서 곰곰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마태복음을 정직하게 묵상해 보시는 것이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 믿음을 꼭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속사람 속에서도 데살로니가 성도들 속에서 일어났던 그 기쁘고 영광스러운 변화가 다시 시작되도록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복된 계절에 우리 모두가 참된 복음을 다시 듣고 믿음으로써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자랑스러워 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로 거듭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제목입니다. 오늘은 나에게도 복음을 믿음이 일으키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그 무엇보다도 그 영광스러운 변화를 소망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회복되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에 합당한 사람으로 새출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