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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12.12. 수요저녁 - 나와 함께 기뻐하라2(빌립보서 15)


빌0212to18 - 나와 함께 기뻐하라(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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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2년 12월 12일 수요일

본문 : 빌립보서 2장 12-18절 


우리는 요즘 대강절을 지내고 있는데요.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와 유익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이후의 시대에 예수를 믿으며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래서 이 절기가 더 의미있고 즐거워 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오신 후에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누리게 된 가장 큰 복은 우리가 희미한 진리의 그림자가 아니라 정말 명확한 구원의 진리를 믿고 있다는 것이고, 또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어마 어마한 특권을 가진 것이겠지만, 실용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굉장히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율법을 이루시고 또 완성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으려면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우선 일상생활 속에서는 정결예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율법이 정한 것들 뿐만 아니라 관습으로 굳어진 것들도 말입니다. 그러면 특히 저같은 사람은 아주 아주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입니다. 꼭 손을 씻어야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니까요. 또 밖에서 집으로 들어갈 때면 발부터 씻어야 하는 것도 엄청 불편할 것 같습니다. 부지런하고 깔끔하신 분들은 이런 이야기 자체가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그렇지 않은 저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을 챙기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수 밖에 없으니, 특히 저같이 게으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여간 편리해 진 것이 아닙니다. 


가장 압권인 것은 제사일 것입니다. 그래도 유대 땅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야 그들이 늘상해 오던 일이니 별 문제 없겠지만 요즘같은 시대에 우리같은 이방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일은 얼마나 번거롭고 복잡한 일이었겠습니까? 우선 제사장으로 세워지는 사람들은 도축허가를 받아야 하고, 소잡고 양잡는 교육도 받아야 하겠지요? 우리는 일년동안 집에서 짐승을 길러야 하겠지요? 그리고 휴가를 내서 제사드리는 곳까지 가야하겠지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린다면 동물보호협회에서는 또 가만히 있겠습니까?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 장소 앞에서는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데모를 하겠죠? 또 여름철에 제사를 드린다면 또 그 피썩는 냄새 때문에 생겨나는 그 동네 사람들의 민원은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분위기라면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이유만으로 혐오스러운 사람들이 되는 것을 각오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자신을 제물로 삼아 드린 단 한번 드린 그 제사로 영원히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덕분에 제사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그 제사의 의미와 정신은 우리 신앙 안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민수기 6장 14절은 나실인 법에 대한 구절인데, 거기에는 어떤 사람이 나실인이 될 때 드리는 제사의 제물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되 번제물로 일 년 된 흠없는 숫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와...” 또 19장 1,2절에서는 속죄제물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를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하나님께서 제사의 제물로 요구하시는 짐승들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바로 ‘흠이 없는 것, 온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제물로 ‘흠이 없고 온전한 것’만을 요구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사의 제물을 통해서 요구하신 것은 제물 자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이방신들에게 드려지는 제물은 모두 그 신들을 달래고 회유하기 위해 바치는 일종의 뇌물이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제물은 그 의미가 전혀 달랐습니다. 실제로 제물은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 자신을 의미했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는 도저히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죄 때문에, 그리고 살면서 저지른 죄들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가 없습니다. 방법은 이 죄를 처리하는 것 뿐인데, 하나님의 법으로 한다면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러니 생명을 잃고 나서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임시방편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제도입니다. 짐승의 목숨을 대신 죄값으로 지불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 동안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물은 아무런 것이나 다 드릴 수 없습니다. 각 제사마다 요구하는 제물의 종류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지만 그 모든 제물이 공통적으로 갖추어야만 할 요건은 바로 ‘흠 없고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흠없고 온전한 짐승을 요구하신 이유는 그 짐승이 죄인을 대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짐승에 흠이 있다면 흠이 있는 인간, 죄가 있는 사람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흠없고 온전한 생명이 대신 죄값으로 지불되어야 그 흠 없음과 온전함이 사람의 죄를 덮어서 그 사람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도록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완전하지도 않고 그 효력이 영원하지도 않은 임시방편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의 제물은 흠없고 온전한 것이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흠 없고 온전한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그렇게 거룩한 것들만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사 제도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원리입니다. 물론 제사제도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의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이렇게 귀중한 정보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러한 정보는 그 옛날 제사를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일도, 그리고 하나님께 받아 누리는 은혜도 온통 우리의 온전함과 거룩함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삶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 또한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제사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그 제사법이 요구하는 거룩은 꼭 지켜나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수요일 설교와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려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반항이 없게 해야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있는 한, 우리도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그러면 우리도 기쁨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불평과 다툼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두번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살펴본 내용은 주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불평과 다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면, 오늘 집중적으로 살펴볼 15절 이하의 내용은 거기서 좀 더 나갑니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그러니까 우리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속에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반항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이것이 바울이 들려주는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반항이 없어야 하는 두번째,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며 진짜 목적이니까요. 사람들은 비싼 보석을 힘들게 사놓고는 그것은 금고에 넣어놓고 가짜를 차고 다니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비싼 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를 드러내고 싶어하십니다. 세상을 향해서 “봐라, 이 사람들이 내가 구원한 나의 백성이다. 이 사람들이 나의 영광스러운 형상이다’라고 자랑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려면 우리 편에서 꼭 갖추어야 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야 하고, 또 달라야 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가치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거나 혹은 그들만도 못하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랑하고 싶어도 자랑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비싼 값주시고 사셔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사람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되고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의 특징을 ‘흠이 없고 순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제가 처음에 제사의 제물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 반복해서 나왔던 말들이 또 등장합니다. 바로 ‘흠이 없고 순전한’이라는 단어들입니다. 이 두 단어는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제물의 조건인데, 여기 15절에서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경은 우리의 삶과 인격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제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의 삶과 인격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이야기하면서 제물이 그렇듯이 우리의 삶과 인격 또한 흠없고 순전하게 되어 하나님께 받아들여 질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짐승으로 피를 흘려 제사를 지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찌보면 오히려 더 온전한 제사를 드러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는 바로 우리의 삶과 인격으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이 제물을 준비하고 또 제사를 드리는 그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만한 것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 반항하며 대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만한 사람이 되는 것과 세상에서 스스로를 빛으로 드러내는 일이 같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하나님께 받아들여질만해야 비로소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어쩌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일과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일, 이렇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으로는 열심이 있고, 또 그런 일을 위해서는 애를 쓰지만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일에는 무관심한지 모릅니다. 사실 생활 속에서의 거룩의 문제와 영적이고 신앙적인 거룩의 문제를 연결시키면 문제가 굉장히 어려워지고 또 복잡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연결시켜야만 하는 문제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원래부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만 율법은 거룩한 백성이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법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안에서는 삶과 신앙이 하나입니다. 얼마나 구체적으로 삶의 자리 자리에서의 정결함을 이야기하고 또 요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사조차도 결코 제사 자체로만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사 제도는 삶 속에서 지켜내지 못한 거룩함을 일시적으로 보완하고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허락하신 은혜의 도구이지, 삶과 전혀 상관없이 거룩을 가져다 주는 요술지팡이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가 나중에 그저 종교적인 의식이 되었을 때, 우리가 이사야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제사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이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처럼 되어버린다면, 우리의 신앙적인 열심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처럼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만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삶 속에서 우선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반항이 제거되어야 하며, 그래서 우리 삶 전체가 흠 없고 온전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점점 더 그렇게 되어져 가야만 합니다. 제가 계속해서 ‘되어야 한다’,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우리의 의지와 힘으로 완전히 그리고 당장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이 ‘무엇 무엇을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단 한 순간에 완전해 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목표지점을 향해서 가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듯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완전을 목표로 달려가라는 것이지 당장 완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당장 흠없고 완전해지지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포기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흠없고 순전하라는 주님의 명령도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과정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놓으시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흠없고 순결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이미 그 방법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바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는 것’, 교회 일이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반항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러한 불평과 반항은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가장 대표적인 불신앙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 불신앙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가 됩니다. 불평과 반항심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 뿌리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평하지 않으려고,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 뿌리부터 제거하는 것이 더 지혜롭고 확실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것은 불신앙과 싸우는 것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 불신앙을 잡으면 불평과 반항이라는 죄도 잡을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우리의 삶은 흠없고 순전한 것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거룩하고 구별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이 불신앙을 잡는 방법, 불신앙이라는 쓴 뿌리를 뽑는 방법은 믿음을 가지는 것,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거하기 힘든 잡초를 제거하려면 그것보다 더 강한 좋은 식물을 심는 것 밖에 없으니까요.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그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시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여기서도 제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위에서 나온 말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고 순전해지는 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 제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흠없고 순전한 제물을 ‘너희 믿음의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제물이 된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흠없고 순전한 제물이 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을 따라 살 때,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삶이 되고, 또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반항심의 뿌리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분께 불평하고 또 그 분께 대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악한 뿌리를 제거하는 방법은 바로 믿음을 회복하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우리 삶도 거룩질 수 있고, 또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아주 중요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그 믿음으로 살아라.”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자 결론입니다. 본문은 바로 여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우리도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 들어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틀림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그러면 우리도 기쁨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뭔가 허전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무엇이며 또 그 믿음으로 사는 삶은 어떤 삶인가하는 문제가 아직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질문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내용이 들어있어서 한 번에 이야기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요약한다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 약속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적어서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과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믿는대로 다 된다는 믿도 끝도 없는 이야기 하나만 붙들고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은 여기 이 책 속에 한 자 한 자 적혀있는 하나 하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믿음의 걸음을 옮기는 아주 구체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종의 복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그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도 좋습니까? 왜 그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도 괜찮습니까? 우리의 불완전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순종하면 우리 삶이 그렇게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말씀이 죽은 말씀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면 ‘생명의 말씀을 밝혀...’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 말씀은 우리더러 생명의 말씀을 빛나게 만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밝힌다는 말은 원래 ‘꽉 붙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속에는 우리가 밤에 길을 갈 때, 횃불을 밝혀 그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자기 앞길을 비추는 것처럼,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 삼아서 꼭 붙들고 가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말씀, 우리가 붙들고 살아가는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생명의 말씀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사용하셨던 그 말씀입니다. 그렇게 생명을 만들어 내고 변화시키고, 능력이 있는 말씀, 선지자의 말씀대로 그래서 결코 열매도 없이 헛되이 없어지지 않는 그런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는 이 말씀이 그러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일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며 우리를 거룩하고 기쁜 삶, 하나님 앞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삶으로 인도해 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약속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삶에 역사하는 능력있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확신만이 우리를 순종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말씀을 그저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무나 혹은 그렇게 살 가치가 있는 귀한 교훈쯤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없고,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결심과 결단이 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것도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말씀을 향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생명의 언약임을 믿을 때,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 존재를 바꾸고, 삶을 바꾸고, 충만하게 하며,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게 할 그런 능력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믿을 때 우리는 크게 결단하고 애써 각오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아도 그 말씀에 그야말로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가 믿는대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흠없고 순전하게 만들어 갈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삶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우리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우리의 삶이 주님께 받아들여질만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분 앞에서 흠 없고 순전한 것이 되어, 그 분의 영광을 빛나게 할만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오나 결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언약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그 순종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들, 이 능력있는 수많은 생명의 언약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꼭 이 믿음부터 챙기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어차피 첫 순간에는 모험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첫 발자국을 내딛지 않고는 결코 그 놀랍고 풍성한 세계 속으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미루지만 마시고 그저 한 걸음 내딛어 보십시오. 잘 안되시면 이 무기를 사용하십시오. 제가 자주 사용하는 건데요, 효과가 아주 좋습니다. 일단 눈 을 질끈 감으신 후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에이, 까짓거!”라고 외치십시오. 그리고, 그 외침과 함께 첫발을 내딛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순종하는 자의 복을 얻으실 것입니다. 그 발걸음이 계속되고 더 많아질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실 것이고 우리에게 약속하셨던 더 풍성하고 기쁜 삶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므로 그 말씀이 일으키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며 사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우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있고 분명한 생명의 약속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회복되게 해 달라고. 그래서 말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서 나도 기뻐하며 살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