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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3.23.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20장 9-18절입니다. 많이 늦었죠. 한 주간 많이 바빴습니다. 오늘도 조금 전에 겨우 설교준비를 끝냈구요. 저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본문이었습니다. 신앙에 도움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실은 앞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셨던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대신에 비유로 대답하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래야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을 것이고 그러면서도 악한 사람들이 더 심각한 악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명확하지 않은 대답을 주심으로써 ‘때’가 이르기 전에 쓸데 없는 구설수에 올라 사역에 방해를 받는 일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구약 역사 전체와 예수님의 죽음까지를 포함하는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소작농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그리고 보냄받은 종들은 선지자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종들을, 그리고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소작농들은 포도원의 관리를 맡았다. 주인은 일정기간 부재상태에서 포도원을 그들에게 맡긴다. 그런데, 이 부재상태의 기간은 실은 부재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의 자신들도 알아차리지 못하던 착각의 이유를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설정하신 상황이었다. 이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은 결코 부재상태이실 수가 없다. 그 분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소작농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가졌던 상황인식이었다. 그들은 시간이 흐르자 주인, 그러니까 하나님이 부재상태라고, 먼 나라로 가서 오래동안 머물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겉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변화는 그들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은밀한 생각을 이야기해 준다. 그들의 모습은 주인이, 그리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코 생겨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의 요구는 무리한 것이 아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거나 때도 되지 않았는데 소출을 요구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요구하실 때는 틀림없이 적절하고 정당한 때이다.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그렇지 않은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분에 대한 오해일 뿐만 아니라 악한 곡해이다. 우리는 무언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을 하려고 할 때, 그 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 분이 그렇게 불합리하고 악한 분이셔야 내가 행하는 일탈이 정당화 되기 때문이다. 

“농부들이 종을 때리고, ...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쫓은지라”

주인은 정당한 때에 정당한 요구를 하기 위해서 종들을 보낸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보냈다. 그러나 소작농들은 그 종들을 빈 손으로 돌려보냈을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폭력과 모욕을 퍼 부었다. 그리고 그 정도는 거듭해서 심해져 갔다. 도둑질도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 부터는 쉽다고 했던가? 종들에 대한 소작농들의 학대는 점점 정도가 심해졌고, 악의도 더 깊어졌다. 죄의 심리가 이렇다. 한 번 틈을 타 어떤 사람 속에 들어와 버리면 그 죄는 약해지는 법이 없다. 그 길에서 돌이킬 때까지 계속해서 더 심해지고, 더 쉬워지게 마련이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주인의 초인적인 인내(하나님이시니 당연하다), 그리고 아들까지 보내는 기대와 사랑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은 그 아들까지 죽인다. 소작농이 아들을 죽인 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의해서 죽음을 당하시는 일을 가리킨다. 그런데, 주님은 소작농들이 아들을 죽인 것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신다.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이 설명은 매우 충격적이다. 이 설명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포도밭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욕심 때문이라고 설명하신 것이다. 왜 이전의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그리고 앞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는가?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그러니까 포도밭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회개하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대로 하고 있는 ‘포도밭’을 내놓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포도밭을 내어놓느니 차라리 종들을, 그리고 아들을 죽이는 편을 택했던 것이다. 

무엇이든 우리에게 있는 것은 다 ‘맡은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고 이것을 불변의 사실로 고정시켜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맡은 것’들을 슬금 슬금 자기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언젠가 그렇게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어떤 요구를 받게 되면 바로 거기서 심각한 불순종의 길로 갈 수 있다. 소작농들은 처음부터 포도밭을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들을 죽일 때까지도 자신들의 그러한 속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인의 아들을 죽이기로 작정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되었고, 자신들의 탐욕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그것을 알아차렸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를 그들이 이미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포도밭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였다고 평가하고 계신다. 때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우리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우리의 속마음은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더 가치있는 일, 혹은 우리의 소명을 위해서 그런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그 때라도 그 착각과 탐욕을 알아차리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지켜내는 것은 정당화되어 버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크나큰 불순종을 저지를 수도 있게 된다. 

“주인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그렇게 해서 소작농들의 시도가 성공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결과는 처참하다. 농부들은 모두 진멸당했다. 포도원은 커녕 자신들의 목숨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귀한 포도원, 그들이 그토록 탐내던 그 포도원은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 관리자는 항상 관리자에 머물러야 한다. 그 신분을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 선을 넘으려고 할 때, 모든 비극은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선을 넘어 욕심내는 것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범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처해질 운명에 처해지게 된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모든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있다. 그 분은 아들로 오신다. 포도원 주인의 아들, 그러니까 그 대리자로 오신다. 그래서 그 분은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신다. 그 주장은 지극히 정당하고 당연하다. 원래 그 분의 것을 찾으려는 것이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의 참된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비롯한 내게 맡겨진 모든 것들의 참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 소유권을 되돌려 드려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을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공경하는 유일하고 정당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분은 사람들에게 건축자의 버린 돌이 된다. 사람들은 그 분을 그렇게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지만, 그 분은 그런 이들을 깨뜨리고 부수신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이 모든 비극을 막고, 그 비극을 칭찬과 영광으로 만드는 방법은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 그러니까 소작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심지어는 나 자신일지라도 그것을 내 것으로, 내 포도원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그러면 그것이 내가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를 변하게 할 것이다. 그 부분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그리고 그 분의 아들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려 들 것이다. 관리자로 남아 있자. 소작농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소작농의 영광, 소작농의 몫, 소작농의 즐거움으로 만족하자. 비록 그것이 소작농에게 주어지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영원하고 또 온전히 만족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우리 주인을 믿자. 그 분의 후하심을 믿자. 그 분은 내가 소작농이라고 해서 나를 함부로 다루시고 또 내 몫을 주지 않으실 분이 아니니 말이다. 


“하나님, 항상 소작농으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단 한그루라도 포도나무를 탐내지 말게 하시고, 그저 주어지는 것을 충분함을 알게 하소서. 그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아들로 ‘공경’하게 해 주시옵소서. 소작농의 몫도 우리에게는 충분히 영광스러움을 깨닫게 하시고 기꺼이 그 영광을 붙잡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