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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5.18. 매일성경 묵상

몇 주간의 게으름을 용서해 주세요.

개인적으로 급하고 힘든 일들이 많아서 글을 올릴 여유가 좀 없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대상1716to27.pdf



오늘 본문은 역대상 17장 16-27절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언약궤를 놓아둘 성전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정반대로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가문, 왕국)을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은혜로운 언약을 받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드리는 부분이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다윗은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을 받고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는다. 그는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 세상에 공포하거나 자랑하거나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는다. 그 대신 그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를 받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이것이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맛보도 또 깨달은 사람은 그런 은혜의 크기와 무조건성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며 또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실제로는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자신을 직시하게 된다. 사실 참된 은혜가 원래 하기로 되어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은혜는 그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또 그 은혜를 받는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인간을 무한히 행복하게 하는 동시에 가장 겸손한 상태가 되게 한다. 이것이 은혜가 만들어 내는 기적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높일 때 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자랑하고 교만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는 그것을 정반대로 뒤집어 버린다. 사람을 가장 겸손하게 만드는 동시에 가장 행복하고 만족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를 존귀한 자같이 여기셨나이다.”


우리는 존귀한 존재들인가? 어떤 점에서는 그렇고 어떤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는 그렇고, 또 죄인이라는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그 답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존귀한 자처럼 여기신 자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져야 할 정체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만 보면 결코 존귀함을 주장할 수 없다. 원래는 존귀했으나 그 존귀를 모두 잃어버리고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존귀한 자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셔서 다시 존귀해진 자들이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존귀함은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귀함의 이러한 특성을 망각하고 다시 그 존귀함 때문에 스스로를 높인다면 우리는 다시 비천한 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여호와여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이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신이 없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로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만약 죄인이 하나님을 직접 본다면 그 인간은 소멸하시는 불이신 하나님 앞에서 존재가 소멸되고 만다.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은 비록 우리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어느 형태, 어느 정도로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서 스스로를 우리에게 맞춰주신 결과이다. 스스로를 제한하시고 낮추신 결과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주시는 은혜 뿐만 아니라 그렇게 자신을 낮우시고 제한하시거나 혹은 대리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은혜이다. 대개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거나 느끼는 것은 그 분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서다. 다윗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식했고, 또 느꼈다. 그가 은혜를 통해 알게된(아마도 재차 확인하게 된) 하나님은 비교할 바 없으신 분이고 유일하게 참되신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의 그러한 위대함과 놀라우심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이 세상에 자기 백성을 구속하고 또 그렇게 건진 백성을 영원한 언약으로 ‘자기 백성’을 만든 그런 신은 없었다. 그 언약을 통해서 스스로를 내어주시고 ‘저희 하나님’-오! 이런 표현 자체가 기적이다. 세상에!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하고 또 독점하다니, 그리고 그 하나님이 흔히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다니! 그 극치는 예수 그리스도이리라!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도록 자신을 내어주셨으니 말이다!-이 되셨다. 이런 하나님은 이 세상에 둘 도 없는 신이시며 비교할 바가 없는 선한 분이시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종을 위하여 집을 세우실 것을 이미 듣게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주 앞에서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기도는 약속을 믿는 자들의 ‘청구’이다. 그냥 하소연이나 근거 없는 요구도 전혀 기도라고 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실제로 우리가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 그리고 기도를 드리면서 확신과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모두 기도라는 신앙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더 확실하고 명확한 근거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해 주시겠다고 하신 언약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 언약은 일종의 계약서이다. 그러나 그래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권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에 대한 약속은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철저히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에 ‘기도할 권리’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기도할 은혜’, ‘기도할 소망’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계약서라고 표현한 이유는 기도를 들으시겠다는 약속이 이미 주어졌으며, 우리가 일정한 조건만 갖추면(때로는 그렇지 않아도 일방적으로도... 다윗의 언약과 같은 언약이 그렇다. 다윗의 언약은 완전히 무조건적인 은혜 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기도할 마음이 생겼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그 조건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 우리 편에서 만족시켜야할 조건이란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 말이다. 다윗이 기도할 마음이 생겨난 이유는 그 언약을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고, 그래서 그 언약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그 믿음이 그를 자극해서 기도하게 했던 것이다. 단순하고 평안한 가운데 확신을 가지고서 기도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부족한 사람도 기도할 수 있고, 그러한 기도도 하나님은 분명히 들으신다. 그렇지만 누가 참으로 기도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즐겨 들으실까? 바로 하나님이 이미 주신 언약을 확실히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의 조건을 만족시킨 기도이기 때문에 들으실 수 밖에 없다. 그 분은 그 “계약”을 지키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주 기쁘고 흔쾌하게...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주의 종에게 허락하시고 이제 주께서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이제 주께서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두시기를 기뻐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 하니라”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한 기도를 따라 기도한다고 할 때, 그 내용을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 복을 비는 기도를 발견하면 그 기도 속에 들어 있는 복을 나에게도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한 때 유행했던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읽고 성도들이 받았던 ‘도전 아닌 도전’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기도를 본받아 기도한다고 할 때, 우리는 기도의 내용보다는 그 기도를 하는 사람의 내면, 그러니까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그가 왜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어떤 믿음, 무엇에 대한 믿음이 저 사람으로 하여금 저런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일차적인 본받음의 목표는 바로 그 믿음이다. 그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그 기도를 억지를 부리지 않고서도 나의 기도로 만들 수 있다. 이제 다윗 기도의 결론 부분에 이르렀다. 그래서 다윗의 기도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처음에 다윗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그러나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의 언약을 듣고 거기 감사하고 감격하며 기도를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은혜, 그러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받은 은혜로도 차고도 넘친다고 고백한다. 자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구원하시고 또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또 그렇게 그 백성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감격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충분하고 온전하게 이루셨음을 고백하며 감사한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그 약속에 근거해서 이제 미래의 은혜(내가 가장 사랑하는 표현으로는 ‘장래의 은혜 future grace’)를 구한다. 그런데, 이 기도의 마지막은 기도가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성품이 다윗의 가문과 이스라엘에 복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은 그저 그 약속해 주신 복을 ‘영원히’ 누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고백한다. 이것이 이 기도의 이상한 종결이다. 우리는 다윗의 기도 전체를 살피면서 그의 기도의 이러한 발전을 본받아야 한다. 감사 때문에 기도하게 되든지, 아니면 무언가 긴급한 일이 있어서 기도하게 되든지 그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과거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다. 그 분이 내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 분이 과거에 그 분의 언약에 얼마나 신실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하며, 적어도 그 과거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 잇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의 관심은 그 과거를 근거로 해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과거에 언약을 지키셨던 하나님은 현재에도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며 장래에도 그 언약을 변함없이 지키실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과거의 어떠함은 분명의 미래의 어떠함이라고 확신해도 좋다. 과거의 은혜 덕분에 나의 현재가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이 과거의 일이 될 때, 우리는 그 때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을 현재를 돌이켜 보며 또다시 동일하게 고백하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순간이든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과거에 신실하셨던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신실하실 것이며, 과거에 충분했던 은혜는 미래에도 충분할 것이라고 믿는 믿음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믿음이 없었을 때에도 그런 나를 이끌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면 내가 하나님께 대한, 그 분의 언약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면 미래의 하나님은 나를 얼마나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실까 하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장래의 은혜를 지금 여기서 선취하여 누릴 수 있다. 미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말이다. 히브리서는 믿음이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믿음은 미래의 것을 지금 여기서 누리게 해 준다. 왜냐하면 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도 훨씬 더 확실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 실재를 지금 여기로 끌어당겨 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본문과 같은 확신에 이르러야 하며 미래의 은혜를 지금 여기서 선취하여 누리는 그런 믿음의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기도가 다다라야 할 참된 목적지이다. 이럴 때, 기도는 우리에게 하늘의 평강을 가져다 주는 능력의 통로가 되어줄 것이다. 


또 한 가지...


“...사람으로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다윗이 감사하며 기도하는 진짜 목적이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기도를 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면 그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유익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지향해야할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 기도의 성취를 통해 그 분의 이름이 높여지며 그 분이 칭송되어지는 것, 그 분이 그 분으로 인식되는 것말이다. 실은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목적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님되심을 온전히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기도하게 된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한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 기도가 이루어질 때 그 기도의 이루어짐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의 만족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기가막힌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이 하나님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욕심을 채우려는 기도, 우리가 어떤 것을 의지하고 자랑하기 위해서 그것을 달라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과는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된 기도는 우리의 철저한 무능함과 지혜 없음을 고백하며 도움을 구하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언약들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우리의 삶에 이런 기도들이 채워져 갈 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또한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 우리의 기도가 참으로 다윗의 기도를 닮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취하시고 우리들은 가장 놀랍고 풍성한 은혜를 얻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