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1.23. 수요저녁 -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립보서 19)


빌0301to06 -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립보서 19).pdf


20130123WE (#1).mp3.zip




       본문 : 빌립보서 3장 1-6절


       제가 오래전에 부목사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의 요구에 떠밀려서 정말 가기싫은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유난히 강조하는 전도프로그램의 컨퍼런스였는데, 참석하고 있는 2박 3일 내내 정말 불쾌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까지는 좋다고 쳐도, 거기서는 마치 극장에서 연극을 공연하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를 공연하고 있었습니다. 성령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작하고 부릴 수 있는 것으로 여기며, 너무나도 당연스럽게 성령님이 손 끝에 임하도록 요구하면 손 끝에 임하고, 발끝에 임하도록 요구하면 발끝에 임하고, 심지어는 머리카락 끝에도 임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기도하면 치아를 떼운 아말감이 금으로 변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병 고치는 방법에 대해서도 시연하고 있었는데, 병자를 세워놓고 병고치는 기도를 하는데, 그건 기도가 아니라 무슨 주문이었습니다. ‘어깨 일’이라고 해서 어깨를 고치기 위한 기도가 따로 있고, ‘다리 일’이라고 해서 다리를 고치는 기도가 따로 있을 정도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거기 참석한 대다수가 거기에 열광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조금 때늦은 감은 있지만 나중에 우리 교단에서 이 프로그램의 신학이 잘못되었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고, 주의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대학을 졸업하면서 헤어졌던 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통합측 목사가 되어 있었는데,  그 친구 역시 자기 교회 담임목사님과 함께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야, 그런데, 이거 좀 이상하지 않냐? 난 정말 견딜 수가 없다.”고 했더니  그 친구는 자기가 보기에도 이상하다면서도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돌아가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할꺼야. 봐라,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하냐? 정말 강력하지 않니?” 그랬습니다. 제 친구지만 참 안타까웠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지금 이 시대는 무엇이 진리이냐 아니냐 보다 느낌이나 효과가 강조되는 경험을 우선으로 하는 시대입니다. 고정된 진리는 없으며, 진리는 그 때 그 때 변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심지어는 유쾌한 것, 즐거운 것, 나에게 유익한 것이 진리이며 옳은 것이고, 그 반대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거부하기도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흐름의 영향이 여과없이 교회에도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근래 들어 몇몇 이단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를 휘젓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심지어는 한 교회가 통째로 이단에게 먹히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현대의 교회가 이렇게 이단에 대해서 약해졌을까요? 왜 이단이 들어와도 그게 이단인 줄도 모르고, 눈 뜨고 당하는 모습이 되어버렸을까요? 그것은 현대의 성도들이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고, 목회자들조차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교리가 교회 안에서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리와 진리 아닌 것들을 구별해 낼 도구가 없어질 수 밖에 없고, 그러니 이단이 들어와도 그게 이단인지도 모르고, 이단이든 뭐든 예수만 믿으면 되지 않느냐고 당당하게 반문하는 교인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잘못이 아니죠. 다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잘못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느끼기에 좋고, 들어서 마음을 감동시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쁨과 만족을 주기만 하면 그게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쁨과 만족을 준다고 해서 다 진리가 아닙니다. 반대로 내가 듣기에 감동이 없다고 해서,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고 해서 진리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알게 모르게 다 자신이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진리란 실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느냐와 상관없이 내 바깥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 성경책은 내가 성경책이라고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성경책으로 여기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1+1=2라는 것을 알든 모르든 항상 1+1=2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진리에 맞추어야지 진리가 내게 맞출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자기만 택하라면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내 만족일까요? 마음의 평안일까요? 아니면 기적을 경험하는 것일까요? 능력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흔히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한 가지가 확실히 된 후에나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이 됩니다. 그 한 가지란 바로 영적인 안전함입니다. 만족도 평안도 기적도 능력도 모두 내 영혼이 안전한 이후의 일입니다. 내 영혼이 안전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좋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안전하니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과 한 길을 가는 형제의 마음으로, 그렇게 아끼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다른 기쁨을 찾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기쁨은 참된 기쁨이 아니니 주님 안에서만 기쁨을 찾고 그 기쁨을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뻐하라는 말을 거듭 거듭하고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전혀 수고롭지 않은데, 그것이 빌립보 성도들의 영적인 안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 밖에서” 기쁨을 누리려 하고, 그 기쁨을 전하고 다니는 아주 위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2절에서 “개들, 행악하는 자들, 손할례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왔지만 여전히 할례를 주장하며, 할례를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할례를 받아야 하고, 그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더욱 견고히 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가장 큰 자랑거리로, 자신들의 구원을 완전하게 보장해 주는 표시로 자랑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바울은 개들, 행악자들, 그리고 참 할례당이 아니라 손할례당, 그러니까 단지 손으로 몸의 일부에 상처를 낸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욕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었던 사랑많은 바울이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분노와 욕설을 퍼 붓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것입니다. 그만큼 이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걱정와 분노가 컸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컸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더 믿은데 있습니다. 복음도 믿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생각하기 따라서는 별로 문제가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다른 것을 믿는 것도 아니고 복음을 믿고, 적게 믿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이 믿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더하는 문제나, 더 믿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완전히 무효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무언가 다른 것을 더해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어떻다는 이야기가 됩니까?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 됩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이고, 반대로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능력은 복음이 아니라 할례가 가지게 됩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할례가 더해지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으니까요. 이것을 믿고, 또 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만 망하는 것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영적인 멸망으로 이끄는 일이었기에 바울은 이들에 대해서 그렇게 경계하며 도무지 바울답지 않아 보이는 분노를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도 믿지만, 자신들이 한 행위를 거기에 덧붙여서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보장받으려 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했습니다. 자신들도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여한 것이 있다는 자랑과 자부심을 가지고 싶어했고 그런 일을 통해서 만족과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했습니다. 주님 안에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기 힘으로, 자기가 한 일을 내세움으로써 대접받고 자랑하고 싶어했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해 줄 때, 거기서 기쁨을 누리려 했습니다. 


       회원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만으로도 충분하고 남습니다. 그 분의 보혈이, 그 분이 지신 십자가가 구원하기에 부족할만큼의 큰 죄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단지 십자가가 충분하지 않다고 믿으며, 무언가 다른 것을 더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견고히 하려는 사람을 제외하면 십자가가 부족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부족하다고 여겨서 자꾸 거기에 무언가를 덧붙이려 하는 사람, 무언가 신앙의 공을 세워서 그것을 자랑하려 드는 사람이 아니라면 십자가는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위는 믿음 이후의 문제이고, 구원 이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신앙 안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고양이가 고양이 다운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까요? 강아지에게 강아지 다운 것이 특별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은 거듭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앙인이라면 사실은 신앙의 미덕들을 행하며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한들 뭘 자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랑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죠. 


     사람들이 그렇게 자랑할거리를 만들고 또 그렇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사람들은 자랑거리가 있을 때에만 행복하고, 자랑거리가 있을 때에만 당당하고 또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렇게 자기 자랑을 만들지 못해서 힘을 쓰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야 자기가 만드는 자랑거리를 통해서라도 그런 기쁨과 그런 행복을 얻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믿는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없고, 우리에게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을 때, 그제서야 참된 기쁨이 무엇이며 참된 만족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첫째로 마음에 할례를 받아서 참으로 새로워진 속 사람을 가지게 된 성도들은 자신의 힘으로 봉사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성령으로 봉사합니다. 일하는 이유도, 능력도, 지혜도 모두 성령님으로 부터 나옵니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그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좋아서, 기뻐서 하는 일이 됩니다. 그 기쁨이, 그 만족함이 그가 그 일을 통해서 얻는 만족의 전부이고, 또 그것으로 족합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한 일을 자랑할 수 있어서 얻을 수 있는 기쁨과 성령님으로 부터 오는 기쁨 중 어느 것이 크고 참되겠습니까? 당연히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성령을 봉사하는 사람들이 된다면 우리에게 다른 기쁨은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성령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해야 하고 그 다음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힘으로 섬기는 일에서 만족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봉사하는 일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 가장 유익합니다.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기쁘게 섬길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것은 우리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됩니다. 한 번 돌이켜 보십시오. 이 세상의 것들로, 혹은 내가 한 일들을 자랑거리들로 삼았을 때 과연 우리가 진짜로 만족했었는지, 우리 영혼이 진짜로 기뻐했었는지 말입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잠시의 짜릿한 만족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텅 빈 마음만 남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봉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자기 자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은 성도가 피해야할 가장 큰 유혹이며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참된 성도가 자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자기 자신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새 생명을 얻었고, 그 분 안에서 모든 좋은 것을 얻었습니다. 이제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얻은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것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참된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의 몸과 그 몸으로 한 일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참된 성도들은 중요한 것은 영혼이고 속사람이지 겉사람이나 겉으로 보이는 일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몸에 표시를 하고, 몸을 괴롭히며, 그 몸으로 무언가를 하며 그것을 자랑하며 얻으려고 했던 만족이 결국은 속사람의 거듭남에 달려있음을 자신의 속사람이 거듭나고서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항상 그 속사람을 새롭게 하고 충만하게 하는 영적인 일들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성령충만, 은혜 가운데 사는 일, 하늘의 영광,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알아가고 또 더 온전히 신뢰하는 일, 그런 것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 등. 자신의 참된 만족이 자신의 겉사람이 아니라 영혼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을 찾고 또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어집니다. 그 모든 속사람의 새로워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다른 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니까요. 그래서 참된 성도는 점점 더 겸손해 집니다. 은혜의 은혜됨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사심 없이, 편한 마음으로, 기쁘게 봉사하고 계십니까?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좋은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것임을 알고 감사하고 계십니까? 이제는 겉이 아니라 속사람이 진실로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것을 충분합니다. 그게 진짜이고 사실은 그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것은 허울이며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자극으로 우리를 속이는 모조품 기쁨과 모조품 행복입니다. 힘들고 더뎌도 진짜를 붙들어야 진짜가 옵니다. 가짜나 모조품을 통해서는 가짜와 모조품 밖에 얻을 수 없습니다. 물론 거기에도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흥분이 있고, 뜨거움과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무리 크고 대단하게 여겨져도 가짜는 가짜일 뿐입니다. 이런 가짜들의 특징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가짜는 점점 큰 갈증, 그것도 굉장히 불쾌하고 짜증스러운 갈증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이나 칭찬을 통해서 만족을 얻으면 당장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랑거리가 없어지고, 그래서 칭찬을 받지 못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우울해 지거나 아니면 반대로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 만족과 기쁨은 다 가짜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여도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위험한 것은 이런 기쁨과 만족 때문에 우리가 참된 만족과 기쁨을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는 얻으면 결코 불쾌한 갈증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절대로 집착과 중독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 만족과 기쁨이 너무 좋은 것이어서 계속 찾고 사모하게 하기는 해도 그러면서도 마음에는 항상 풍성하고 충만한 만족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가 누리는 기쁨, 우리가 누려야 할 기쁨은 주 안에서 얻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항상 여러분의 영혼이 참으로 안전한 상태에 있는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바른 것을 믿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체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교리를 가르치는 목적은 여러분의 영혼이 진리 가운데서 기뻐하게 하려는 것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바른 신앙의 길 안에서, 자기 열정이 아닌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자신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자신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위해서 살면서 얻는 진짜 기쁨이어야 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참 할례당으로써 누리는 안전한 기쁨이어야 합니다. 


      이제 무엇을 하든 예수님 안에서 안전한 기쁨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하시고, 성령 안에서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겉사람에 덧붙여지는 것들로부터 만족을 찾지 마시고 여러분의 속사람의 만족을 중심에 놓고 신앙생활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기쁨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항상 주님 안에서 기쁨을 찾으시고 그래서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