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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1.27. 주일오전 -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2(마가복음 16)


막0307to19 -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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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3장 13-19절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열 두 사도를 부르신 가장 중요한 목적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볼까요? 그게 무엇이었죠?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목적들도 있지만 이 목적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은 열 두 사도를 통해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다름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고 만드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열심히 그리고 빼먹지 말고 꼭 챙겨야 하는 것이 있다면, 과연 나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예수님과 함께 거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일을 위해서 주신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과 함께 거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그 이외의 목적들 또한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분의 친 백성이라면 우리들은 그런 모든 부르심의 목적 또한 우리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목적들은 첫번째 목적,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머무는 일이 기초가 되어야만 온전히 행할 수 있는 일이 되고 또 부작용이 없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되니까 자꾸 교회가 삐걱거리며 소리를 내게 되고 성도들 간에 상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기쁘게 하지 못하고 매말라 가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이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포도원 농부 중에서 보고 즐기기 위해서 포도나무를 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은 것은 열매를 거두어 들이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의 가지들 또한 똑같은 목적에서 돌보는 것이죠. 그런데, 비유에서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포도열매’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지인 우리가 열매맺는 가지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열매를 맺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농부이신 하나님은 가지인 우리들에게 분명히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우리가 끙끙거리며 만들어 내야하는 것이 아니라, 줄기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만 맺히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매가 아니라 예수님께 단단히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과 나에게 항상 은혜를 공급해 주신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주님과 찰싹 붙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고 예수님과의 관계는 소홀히 한 채로 열매만 맺으려고 하니까 줄기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매말라 가기만 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그리고 여러분의 신앙생활 자체가 푸석푸석하고 매마른 느낌이 든다면, 생활에 기쁨과 만족이 없다면 일하려고 하기 전에, 열매를 맺으려고 하기 전에 다시 예수님 가까이로 나아오셔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또 기도하며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함에 우리의 모든 풍성함과 열매가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예수님과의 관계에 먼저 신경쓰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주님과 함께 거하는 주님의 백성인지 그것을 가장 먼저 챙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장 중요한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것들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가지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결국에는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열매도 원하십니다. 14절과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시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전도와 귀신 쫓는 일, 이 두 가지는 예수님이 하셨던 일들 전체를 요약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일들 때문에 제자들을 세우셨다는 것은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똑같이 하게 하시려고, 그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세우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열 두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신 것도 바로 이 열매 때문임을 알려 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까? 첫째는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서 사람들을 돕고 구하며, 하늘나라의 그물에 건지는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단어로 표현하면 ‘전도’해야 합니다. 드디어 어쩌면 우리가 가장 부담스러워하고 또 힘들어 하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라면, 제자들이 그랬듯이 우리들 또한 이 문제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힘든 것입니다. 데리고 오기까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리고 데리고 오면 된다고 생각하니 어떻게든 데리고는 오는데 남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거하게 새가족 초청잔치를 하고, 수 십명, 수 백명씩 초청되지만 결국 남는 것은 거의 없는, 그래서 힘만 소진하고 또 실망하게 되는 그런 일이 해마다 거의 모든 교회에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정말 열심히 하는데, 힘을 쏟는데 그러니 말입니다. 전도는 엄밀하게 말해서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자에게, 알아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고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교회에 오겠느냐고 질문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믿겠느냐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 말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지 않은 방법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 말입니다. 우리는 전도에 성공해야하기도 하겠지만, 사실 전도는 성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는 써야 하겠지만 성공이 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열매는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뒷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잘 드러나있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을 보면 항상 복음이라는 말과 함께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동사입니다. 심지어 헬라어 성경은 복음을 그냥 ‘선포되어 지는 것’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복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복음은 선포되는 것이라는 것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그저 큰 소리로 외침으로써 많은 사람을 구원받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는 곳에서는 항상 있는 그대로의 복음이 선포되곤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교회로 데리고 온 사람들은 굉장히 많은데, 거의 남은 사람이 없다면 오늘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내가 그저 교회 가자고, 교회가서 복받자고 말하지는 않았는지, 그러면서도 정작 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믿지 않는 영혼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예수님에 대해서,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성경대로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멀어지면 어쩌냐구요. 그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저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진지하게 여러분이 믿는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그들에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십시오. 여러분의 경험을 말해주시더라도 항상 그 두 가지가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교회에 가자고 권면하더라도 ‘예수’와 ‘믿음’ 그리고 ‘구원’이라는 말을 꼭 집어넣으시기 바랍니다.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복음 속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실 성령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몫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복음을 선포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믿음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면 그런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첫번째 이유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귀신들을 내어쫓을 수 있는 힘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이 귀신이라고 번역해서 우리가 오해하기 쉽지만, 성경이 말하는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성경의 귀신은 하나님께 반역한 타락한 천사들, 그래서 악해져 버린 영적인 존재들을 말합니다. 이들의 목적은 첫째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들의 삶과 이 세상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어떤 사람들은 진짜로 이러한 이러한 악한 영에 사로잡혀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이 악령들은 사람들의 타락한 마음에 영향을 미쳐서 악한 생각을 하게 하고 악한 선택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망가뜨리고 자신의 삶을 망치는 선택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에게 이런 소명이 있다는 것은 실제의 삶 속에서는 주로 이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에 악한 영향을 미쳐서 세상과 사람들의 인생을 망치는 악한 영의 세력을 몰아내는 일과 관련이 더 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우시고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사탄의 악한 영향력을 몰아내는 일을 맡기신 것이고, 우리를 통해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을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 우리에게 귀신을 내쫓는 권위와 능력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삶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악한 영향력을 몰아내려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위와 힘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싸워야할 그들도 일종의 힘을 가진 악한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뿔달린 도깨비랑 싸우는 것? 아니면 귀신들린 사람을 앞에 놓고 안수하는 것? 아니면 그 지역 귀신을 내쫓는다고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땅을 밟아대며 기도하는 것을 떠올리십니까? 실은 우리가 영적인 전쟁에 대해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사탄은 지금 세상을 활보하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너무나 편하게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심성을 자신의 영토로 정복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로들로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현대의 영적인 전쟁은 거의가 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되는가하는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택을 하면 그것은 영적인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탄의 악한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뜻과 반대가 되는 선택을 하면 그만큼 이 세상과 내 삶 속에서의 사탄의 악한 영향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하더라도 이 전쟁은 승패가 우리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권능’이라는 말, 그러니까 권위와 능력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전쟁의 승패에 있어 관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권세와 능력을 주시고, 그래서 그 권세와 능력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열매를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영과 싸울 수 있고, 우리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도 살고 또 이 세상도 살릴 수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세우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후에 열 두 명의 사도들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죽 읽어내려가다 보면 그 명단의 마지막에가서 꼭 걸리게 됩니다. 바로 19절의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라는 부분입니다. 이 명단,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부르시고 세우신 열 두 사도들 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를 굉장히 당황스럽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왜 예수님은 그 중요한 사람들 중에 가룟 유다를 포함시켰을까요? 그리고 왜 오늘 본문은 굳이 유다에 대해서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유다를 열 두 사도들 중에 포함시키셨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해 보건데, 어쩌면 예수님은 가룟 유다 속에서 가장 큰 어둠을 보았기 때문에 그를 열 두 사도로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어둠을 몰아내고 그를 어엿한 사도로 만들어 하늘나라의 일꾼으로 사용하시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빛나는 존재로 만들어 보시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실패했습니다. 그대신 스승인,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장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열 두 사도들 중에서 떨어져 나가 사탄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담임목회자가 되기 전까지는 이 일이 어떤 일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어찌보면 담임 목회지를 달라는 기도,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과 좋은 생각대로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달라는 기도를 제일 열심히 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담임 목회자가 되고나니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담임목회자가 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담임목회자 다운 담임목회자가 되는 것이 진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자체가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직분을 맡거나 혹은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굉장히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맡은 일을 맡은 일 답게 해 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도가 되는 일, 사도로 부름받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라는 직분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임에 분명합니다. 그들로부터 교회가, 하나님의 참 백성이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부르심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직분이 영광스러울수록 그 사람이 짊어져야 할 불명예와 치욕도 그만큼 커집니다. 대부분 당사자는 그걸 모르고 있지만 말입니다. 


가룟 유다는 사도로 세움받았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사도가 된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 주일 본문에 나왔던 사람들처럼 계속 자기 중심적인 생각만 품고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기 목적, 그러니까 경제적인 목적, 정치적인 목적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따라다녔기 때문에 그렇게 수많은 놀라운 일을 보고, 그렇게 능력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없이 들었으면서도 그 존재의 단 한 구석도 사도가 되지 못했고 사도의 명단에 포함되는 명예를 얻었으면서도 ‘예수를 판 자러라’라는 영원히 치욕스러운 꼬리표를 달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다운 성도가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을 여러분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의미가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복음을 전파하고 세상과 우리 인생을 망치는 사탄의 힘을 깨뜨리는 권능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삶의 중심에 놓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 인생의 최대 관심사가 되게 하십시오. 그러나,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이것은 결코 여러분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나 손해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 곳에서 구원얻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악한 영과 죄의 영향력이 약해져가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또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날은 또 얼마나 비교할 수 없을만큼 영광스럽고 찬란한 날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런 일들에 대한 우리의 소명이 분명해질수록 우리는 더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된다면,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성령님만이 주실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소명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은혜와 능력이 없이는 결코 복음을 선포하여 영혼을 구원해 낼 수 없고, 악과 싸워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 일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언제 이 일이 가능해 졌습니까? 이들이 언제부터 귀신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까?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고 승천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면서도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 했고 그 세상과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시면서부터 이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야 말로 권능을 힘입게 되었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악한 영이 힘을 잃고 쫓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에게 항상 여러분을 넘어지게 하는 고질적인 죄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충만하셔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옆에 항상 여러분이 감당하지 못할 강하고 악한 영향력을 지닌 유혹이나 사람이 존재합니까? 그러면 그 유혹과 그 사람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을만큼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떨쳐버리기 힘든 못된 습관, 계속해서 여러분을 좌절시키는 못된 습관이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꼭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계십니까? 그러면 더욱더 성령충만 해야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이 세상을 이기고 변화시키기는 커녕 그 앞에서 맥도 추지 못하고, 자신을 지켜내는데도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성령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권위와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복음을 전하며 우리의 삶과 세상을 망치는 악과 싸워 이기도록 말입니다. 이제 이것을 우리 삶의 목적으로 삼으십시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을 덧입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합시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고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덧입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만 아는 흰 돌 위에 새겨진 우리 만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성령의 권능을 힘 잆어 우리 삶의 자리에서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건지는 천국의 어부로 능력있게 사용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