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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2.01. 금요기도회 - 느헤미야의 기도(기도 11)


느0104to111 - 느헤미야의 기도(기도11).pdf


20130201D (#1).mp3.zip




본문 : 느헤미야 1장 4-11절


오늘 살펴볼 기도는 느헤미야의 기도입니다. 느헤미야는 우리가 지난 금요일에 만났던 에스라와 동시대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에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재건한 사람이라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재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팎으로 다시 세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최악으로 절망스러운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세우는 일에 어떤 사람을 부르시고 또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직접하시면 더 확실하고 빠를텐데 그렇게 하십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성경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역사를 보아도 하나님은 항상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어느 시대, 어느 교회나 무너진 곳은 있고 그래서 그 곳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성도들은 각자가 바로 그 ‘한 사람’ 혹은 ‘소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속한 개교회에서, 혹은 한 나라나 온 세상의 교회 속에서 그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자신만 생각하는 신앙이 편하고 좋은 것 같지만, 그런 신앙은 오래가지 못하고 풍성해 지지도 못합니다. 나만 생각하면 내가 속한 교회는 등안시되고 그러면 그 교회가 든든해지지 못합니다. 결국 그 영향은 고스란히 나에게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은 결코 손해보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든든해지고 온전해 지면 그 은혜가 고스란히 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편할지는 모르지만 그런 신앙생활에는 기쁨도 적고 보람도 없으며,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신앙은 오히려 자기 자신이라는 좁은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신앙의 큰 세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 3세대로 유대 본토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고, 특히 페르시아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그의 주류담당 관리라는 굉장한 고위직에 올랐던 정말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같으면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끄러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온통 본토에 있는 동족들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도도 느헤미야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자기를 넘어선 더 큰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드릴 수 밖에 없었던 그런 기도였습니다. 


동생인 하나니가 예루살렘에 다녀오면서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에 대한 소식을 전합니다. 그것은 포로로 끌려오지 않은 동족들이 성벽도 성문도 없는 예루살렘에서 주변 이방민족들의 피박을 받으면서 위험하고 궁핍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풀썩 주저 앉아 며칠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울면서 기도드렸습니다. 그의 기도 맨 처음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나오지만 이것은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는 기도자의 모습입니다. 에스라도 그랬지만 느헤미야도 자기 동족들의 죄를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죄로 뉘우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느 곳인가 무너지고 망가진 곳이 회복되고 다시 세워지려면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이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중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교회를 풍성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하늘의 하나님!” 어디서 많이 보던 구절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앞부분과 같습니다. 실제로, 여기서 “하늘의”라는 말도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하늘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가 부르는 하나님은 주기도 속의 그 하나님, 저 하늘나라, 온 우주, 그리고 모든 삶의 영역 구석 구석까지 모든 하늘들을 다스리시는 하늘들의 하나님입니다. 온 천하를 아우르는 초강대국의 고위관리였지만 느헤미야에게 그 나라는 큰 나라도 아니었고,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에게는 하나님만이 크신 분이시고, 그래서 두려워할 대상이었습니다. 느헤미야에게는 하늘의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크신 분이시고 페르시아도 그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환경 속에서도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 어떤 환경보다도 크신 분이시며, 그 모든 상황들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확신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그만큼 상황을 더 두려워하고 환경을 더 크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도 여전히 근심과 걱정 속에 빠져있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떤 상황보다도 능력있고 크신 모든 하늘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그 분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면, 우리 편을 들어주신다면 그래서 우리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때, 그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온 우주보다 더 크시고, 그 구석 구석을 온전히 다스리시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그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신실하심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라는 두 가지 은혜로운 성품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해결할 방법은 있습니다.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리고 느헤미야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던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모세에게 주셨던 약속을 지켜달라고, 범죄하고 흩어졌다가도 돌이켜 하나님을 찾으면 다시 모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셨던 그 약속을 지켜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조건을 다 갖추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하라는 식으로 기도드리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그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도였다고 해도 느헤미야가 그 기도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간구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은혜였습니다. 긍휼히 여겨주시는 은혜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얼마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면 얼마나 신실하겠습니까? 또 회개를 하면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완전’이라는 하나님의 잣대를 우리에게 그대로 가져다 댄다면 우리는 모두 탈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족한 우리들, 연약한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은혜는 결코 우리가 그것을 얻을 만해서, 우리가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긍휼이 하나님을 강권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기도를 드릴 때에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겸손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낮은 마음으로, 정말 불쌍히 여겨주심을 소망하면서 기도드려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만큼 절실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내가 무엇을 해도 하는 것이 아니며, 또 하려고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습니다. 사실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제대로 해 보려고 애는 쓰지만 이상하게도 그러면 그럴수록 그것만으로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더 절실하게 제게 와 닿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저절로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말들이 옛날에는 기도하다가 기도할 것이 생각나지 않으면 붙이는 추임새같은 것이었는데 이제는 가장 절실하게 흘러나오는 기도의 제목과 내용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되시고 모든 것을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으신다면 아무런 열매도, 아무런 소용도 없을테니까요. 여러분도 저를 위해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서 장목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실 때도 이 기도를 잊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고 훌륭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하고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기도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기도를 마치면서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갑자기 기도가 자신의 복을 비는 기도로 바뀐 듯이 보입니다. 형통, 그러니까 성공과 사람들의 호의를 얻게 해 달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성공과 사람들, 특히 페르시아 왕의 호의를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가 말하는 성공, 그리고 왕의 호의란 것이 무엇이며 또 왜 필요한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가져다 줄 결과를 생각하면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집니다. 


느헤미야는 왕을 만날 것이고 분명히 자신을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위해서 보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거기 필요한 인력과 자원도 요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허락받는 것이 그의 성공이고 또 왕의 호의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로 느헤미야의 개인적인 성공을 의미할까요?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고위관리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런 느헤미야에게 반대자들이 득시글 거리고, 낙심해 있는 동족들만 있는 곳, 그것도 성벽도 성문도 없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거기서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성공과 형통이란 실은 개인적으로는 이미 얻은 성공을 모두 내려놓고 사서 고생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느헤미야는 그것을 성공이며 형통이라고 불렀을까요?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이스라엘의 형통이 곧 자기 자신의 형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인생의 성공을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입장, 하나님 나라라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가 잘 되는데 도움이 되면 그 인생은 형통한 인생이지만, 그 반대가 된다면 전혀 성공적인 인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왕의 호의 또한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성공과 형통을 위해서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왕의 넉넉한 지원을 허락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가서 굉장히 짧은 시간에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는 진짜로 형통했습니다. 진짜로 성공했습니다. 그 자신의 생각에,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굉장히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히 기뻐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레미야의 기도를 닮은 기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나와 상관없는 하나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나도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기도는 바로 나를 위한 기도입니다. 나의 형통, 나의 성공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를 나 자신을 생각하듯이 생각하며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분명 우리의 인생을 성공한 인생이 되게 할 것입니다. 형통한 인생이 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빛나는 삶이 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보다 큰 상황, 그 분보다 큰 어려움은 하나도 없습니다. 천하의 페르시아도 하나님의 손 아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도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항상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족해도 연약해도 때로는 하나님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도 긍휼을 구할 수 있고 그러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이 모든 은혜의 샘근원이며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 나라 백성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며 그 나라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고, 그 나라의 형통이 나의 형통이라고 여기며 기도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진실로 형통하고 영원히 성공한 인생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이 있는 기도,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기대하는 기도, 그리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기도를 드리심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형통한 기도자로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