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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3.20. 새벽예배 -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복음 101)


요1616to24 -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10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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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요한복음 16장 16-24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령님께서 오시면 제자들에게 행하실 일, 그런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또 그렇게 진리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끝에 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있고, 둘째는 이 말씀이 성령님과 관련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성령님께서 임하신 이후에야 제자들이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었음을 생각해 볼 때, 아마도 예수님의 뒤쪽의 의미로 이 말씀을 주셨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야기를 갔다가 온다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알아듣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제자들이 그 앞에 나오는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들었을 가능성은 더 낮은 것 같습니다. 아얘 딴 나라 이야기 같으니 무슨 뜻인지 조차 궁금해지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서 당장 자신들과 직결된 문제인 예수님께서 떠나가신다는 이야기, 그리고 다시 오신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만 궁금증을 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이야기 조차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다 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영적인 일에 대한 관심, 진리에 대한 관심이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또 그 관심 안에서도 표현을 하지만 등급이 천차만별입니다. 신앙이 어릴 수록 자기 자신의 지금 당장의 삶과 상관있는 내용에만 관심을 갖다가 신앙이 성장해 가면서 자신의 영혼에 관계된 일에, 그리고 하나님에 관계된 문제들에 대해서 점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궁금증도 마찬가지죠. 처음에는 영적인 것들, 영적인 은혜에는 거의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그저 현실의 문제를 해결받는 방법, 복 받는 방법에만 관심을 가지죠. 그렇지만 신앙이 성숙해 가게 되면 그 때부터는 이런 것들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부터는 ‘하늘의 복’ 그러니까 하늘나라나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 주시는 은혜에 더 큰 관심과 무게를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더 큰 궁금증을 가지게 됩니다. 제자들이 성령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떠나심과 다시 오심에 대해서만 궁금해 했다는 것은 제자들의 영적인 성숙도가 그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아셨습니다. 그래서 묻기도 전에 그 마음을 헤아리시고 제자들에게 그 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은 제자들에게 애통함과 슬픔의 이유가 될 것이고, 또 고난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세상에게는 기쁨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떠나있는 동안만 그렇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인이 잉태를 하고 진통이 시작되면 아이를 낳을 일을 생각하며 근심하지만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를 보면서 그 근심을 다 잊고 이전보다 훨씬 더 기뻐하게 되는 것처럼 제자들의 슬픔과 근심은 더 큰 기쁨을 기다리기 위한 잠깐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니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분명히 주님이 죽음을 당하시는 일이 당장에는 제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근심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주님도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 뒤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시 보게 될 때 그들이 얻을 그 슬픔보다 기쁨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크기 때문에 제자들을 떠나실 것입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슬프게 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런 약속도 해 주셨습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떠나셔야만 제자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이중입니다. 첫째는 떠나셨던 주님을 다시 보게되는 기쁨이고, 두번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기도의 응답을 받는 기쁨입니다. 이 두 가지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고 충만하게 흘러넘치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잠깐의 슬픔을 그들에게 맡기셨던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에게도 예수를 믿기 때문에 감당해야할 크고 작은 슬픔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제자들처럼 슬픔의 시대에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기쁨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날’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때가 우리에게는 미래가 아니라 이미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승천하셨고,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을 통하여 언제나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온전하게 예수님을 볼 수 있게 해 주셨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기도드려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는 풍성한 기쁨의 이유이고,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 비해서 손해도 많고, 아픔도 많고, 고난과 불편한 것도 많은 반면에 그래도 충분히 현실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을 보며,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우리 마음 속에는 흘러넘치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만약 성도가 이 두 가지 복을 놓치면 신앙의 실제적인 유익인 기쁨을 놓치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복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도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눈 앞에 보물이 있어도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보물이 아닙니다. 아무리 큰 복을 받아도 그게 복인 줄 모르고, 나에게 그 복이 이미 주어져 있음을 알지 못하면 그 복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두 가지 복, 우리에게 풍성하고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주는 두 가지 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두 가지 복을 누리며 그 능력으로 이 세상을 믿음으로 소명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복은 바로 성령님 안에서 우리 영혼으로 주님을 볼 수 있는 복과 또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복을 통해서 세상은 알 수 없는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 안에서만 주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나에게는 어떤 기쁨이 얼마나 있는지 한 번 돌아보시고, 나에게 약한 부분은 어디인지를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요즘에도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으로 주님을 보는 일이 상대적으로 많이 약한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이 일에 있어서 더 간절함을 가지고 더 헌신하고 애쓰려고 합니다. 주님이 마음으로 주님을 온전히 볼 수 있게 해 주실 때까지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두 가지 놀라운 기쁨의 원천을 잊지 마시고 놓치지 마셔서 이 세상에서 그 기쁨의 능력으로 슬픔과 근심을 넉넉히 이기며 주님을 섬기는 참 성도의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