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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3.28.새벽예배 -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3(요한복음107)


요1714to19 -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3(요한10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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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7장 14-19절



하나님의 지켜주심, 하나되게 하심, 그리고 예수님의 기쁨을 주심... 이러한 것들이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 제자들을 위해서 요청하신 복과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제자들이 하나님의 것이니 지켜주셔야 한다고 하셨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제자들을 하나가 되게 해 주셔야 하며,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그 완전한 기쁨을 제자들에게도 누리게 해 주셔야 한다고 요청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이미 응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도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이니까요. 우리는 항상 이런 은혜와 복이 우리의 것으로 허락되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믿고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교회를 하나되게 해 주시고, 그 안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믿음으로 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행하며 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위해서 이런 은혜와 복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리실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제자들을 향한 세상의 미움이었습니다. 이미 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있기 때문에 그 미움은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온 세상 전체가 예수님을 미워하고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이란 요한복음의 언어로 말하면 아직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말하고, 그 사람들이 힘을 미치는 그런 영역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부족하다고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서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전히 진리 바깥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 사이에는 아주 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진리 쪽에 속한 사람들은 반대편에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데, 진리가 아닌 쪽에 속한 사람들은 언제나 진리에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진리 편에 속한 사람들은 소수이고 반대편에 속한 사람들은 대다수이기 때문에 괴롭힘과 손해를 보는 것은 대개 진리 편에 속한 사람들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항상 올바른 쪽에 속한 사람들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단지 그 반대편을 택한 사람들이 더 많고 그래서 그들이 더 힘이 세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경도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진리 편에 선 사람들, 올바른 편에 선 사람들은 좀처럼 세력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똘똘 뭉쳐서 세력을 잘 만드는지 모릅니다. 서로 으르렁 거리다가도 이익 하나만 맞으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의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올바른 편에 서는 사람들은 항상 손해와 괴롭힘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무런 저항도 장애도 없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진공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신앙생활처럼 좋기만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 속에는 항상 그 반대편의 반대와 저항이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보다 훨씬 더 센 힘을 가진 세력들의 반대와 저항이 있습니다. 표현은 이렇게 했어도 이 반대와 저항은 우리에게 위험과 손해를 뜻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어렵습니다. 제대로 예수믿는 일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줄 알면서도 섣뜻 그리로 가지 못하고, 또 진리 편에 섰다가도 자꾸 반대편으로 기웁니다. 이런 어려움은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 후에, 하늘나라로 곧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어려움이고 유혹이며 영적인 실패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이런 어려움들을 면제받고 싶어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해 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에 살면서 그런 세상을 구속하고 또 그런 세상에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맡기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성도들은 이런 경우 둘 중의 한 가지의 길을 택하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고민하며 살든지 아니면 적당한 시기에 아얘 거룩하게 사는 삶을 포기하든지 말입니다. 성도의 삶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악으로부터 지켜낼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세상이 제자들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는 이유로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지켜주셔야 한다고 기도드렸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셔야 한다고 기도드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들을 악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실까요? 지켜주지 않으실까요? 분명히 지켜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그냥 지켜주실까요? 악이나 죄와 싸울 의지도 없고 싸우려고 시도도 하지 않는데 그냥 지켜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은 성도에게 악과의 싸움이 있고 그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지켜주시는 것은 우리가 그 싸움을 기꺼이 싸울 때, 그 싸움으로 인해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싸움에서 꼭 있어야 하고 꼭 사용해야 하는 무기를 하나 주십니다. 우리가 그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 한, 그리고 그 무기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한 우리는 죄와 악과 싸우더라도 지지 않을 수 있고, 악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입니다. 어제 살펴보았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누리셨던 그 완전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이나 협박에 넘어가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지금 누리는 기쁨을 빼앗길까 두려워서이고, 또 한 가지는 그렇게 하면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죄 짓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그것이 협박 때문이든 아니면 유혹 때문이든 결국은 만족과 기쁨을 얻거나 지키기 위해서 저지르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누리셨던 그 기쁨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때도 우리는 죄와 악에 쉽게 빠지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가장 크고 완전한 기쁨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간혹 자신도 모르게 실수로 죄를 짓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는 알아차린 죄와는 충분히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이미 죄를 지어야 할 동기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배가 고플 때 마트에 가면 코로 솔솔 들어오는 빵굽는 냄새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됩니다. 그래서 꼭 사가지고 오게 됩니다. 그렇지만 밥을 잔뜩 먹은 후에 가면 ‘음. 냄새 좋다’라고 느끼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 간혹 잠깐의 고민은 있지만 쉽게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미 배가 부르고 만족하기 때문에 같은 유혹이지만 충분히 이겨낼만큼 약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보면 그가 진짜 만족을 모르고 있고, 그래서 진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만스러운 부분을 죄가 건드리니까 그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그 세상에 거룩함을 드러내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시작된 우리의 거룩함을 더 확실하고 든든한 것으로 만들어 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가면서 이 소명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각오에 달린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주님이 주신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기쁨이 없으면 우리는 언제라도 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죄악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이 있으면 그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기쁘기 때문에 악의 협박과 죄의 유혹 자체가 내가 싸워 이겨낼만큼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해야 하고, 그렇게 거룩함을 드러내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거룩해져 가야만 한다면,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 기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기쁨이 없으면 거룩을 위한 싸움은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은 물론 우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때, 요즘 우리가 자주 듣는 표현으로 하면 제대로 성령충만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된 교회 안에 있을 때 더 풍성하고 강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교회만이 성도들이 홀로 힘든 싸움을 싸우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있고, 그 싸움에 지친 지체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며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엄청난 능력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빈틈없이 채워줄만큼 놀라운 기쁨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악과 싸워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놀라운 능력을 교회 안에 넣어두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처럼 온전히 하나되어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교회에 넣어두셨습니다. 


우리는 나 때문에 다른 성도가 사탄과 싸우도록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나 때문에 시험을 당하게 하거나 상처를 입게 해서 다른 성도가 불필요한 데에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빼앗겨 버리고 정작 싸워 이겨야할 죄악과 싸울 힘이 부족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그 기쁨을 더 온전하고 풍성하게 누리게 해 주는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비결이 바로 교회의 참된 하나됨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힘쓰고 더 애쓰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하나됨 안에서 우리도 더 기뻐할 수 있고, 그 하나됨 안에서 우리도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사탄을 이기고 죄악을 이겨낼만큼 강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다 똑같이 어려운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견디어 내야 하는 싸움, 그러면서도 악에 빠지지 않아야 하는 싸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싸움을 싸울 때,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그 도움은 기쁨의 능력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기쁨, 그리고 우리 서로가 온전히 하나된 데서 생겨나는 기쁨 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의 이유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능력의 이유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됨을 지켜나가려고 애쓰고 힘쓸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를 거룩을 위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강한 군대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기쁨의 능력이 넘치는 강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