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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3.31.주일오전 - 이것을 네가 믿느냐(2013 부활절)

요1121to27 - 이것을 네가 믿느냐(2013 부활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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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요한복음 11장 21-27절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까? 아니면 두려움이 없습니까? 만약 두려움이 있다면 여러분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 그래서 여러분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나타나는 양상은 모두 다르지만 이 두려움의 맨 아래쪽에는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겉으로 무엇을 두려워하면서 살든 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인간의 모든 두려움의 뿌리에 죽음이 놓여져 있다는 것은 이렇게 생각해 보면 너무나 분명해 집니다. 여러분, 만약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살려고 바둥거리는데 어떤 사람은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니 누구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본능적으로 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구요. 돈을 많이 벌려고 하든, 권력을 가지려 하든, 건강을 위해 노력하든 그 밑바닥에는 결국 조금이라도 더 죽음이 주는 두려움을 완화시켜보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런 시도들이 정말 성공적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런 것들은 항상 우리 곁에 머물러 있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에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더 불안합니다. 그래서 작은 욕심이 탐욕이 되고 나중에는 중독이 됩니다. 나의 평안이 온통 거기에 매달려 있으니 그게 흔들리거나 나를 떠나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은 그런 것들이 항상 움직이고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더 필사적으로 붙들려고 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불안과 두려움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는 해결책이 되려면 그 해결책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죽음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 해결책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해결책을 나를 위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그제서야 참된 평안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을 모든 인류의 소망이며, 나아가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며 또 해답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마지막 답이며, 또 완전한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죽음은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마땅한 결과였지만, 그래서 두려움의 문제 또한 인간 스스로 감당해 내야만 하는 짐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죽음의 짐에 눌려 고통스러워 하며 불안해 하며 때로는 슬퍼하고 절망하며 사는 것을 너무 너무 속상해 하시고 화가 나 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지어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뒷짐지고 구경만하지 않으시고 그러한 인간의 문제의 한 가운데로 직접 뛰어 들어 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점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릴 때, 수많은 사람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까워 하지만 모두가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때 누군가가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낸다면 누가 그 사람을 칭찬하지 않겠고, 누가 그런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 죽음의 위협과 흔적들이 가득 찬 세상으로 뛰어들어 오셨다면, 우리가 어찌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렇게 해서 우리를 구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예전과 똑같은 생명이 아니라 이제는 다시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고, 죽음의 염려를 느낄 필요가 없는 그런 생명이라면 얼마나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겠습니까? 이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리자 나사로의 여동생들인 마리아와 마르다는 멀리 계신 예수님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틀이나 더 거기 머무시다가 출발하셨고, 그래서 나사로를 장사지낸 지 사흘이 지나서야 나사로의 고향마을인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러니 계산해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은 이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아셨습니다. 11절 이하에서도 직접 말씀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에게서 사람이 왔을 때, 이미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바로 움직이시지 않고 이틀을 더 지체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죽은 나사로를 장사지낸 후 사흘이 경과하기를 기다리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나사로의 시체가 부패되기 시작하는 때를 넘기시고 난 후 베다니에 도착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누구도 나사로의 죽음을 부인할 수 없도록, 나사로의 죽음을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예수님을 마중나왔습니다. 그런데, 마중나온 마르다가 예수님께 처음으로 한 이야기는 예수님을 원망하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그럴만도 하죠. 오빠가 죽은 뒤 나흘이나 지나서 어슬렁 어슬렁 나타나신 예수님이 야속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마르다는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을 병도 고치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의 믿음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보이는데 계셔야만 능력을 행하실 수 있고, 그것도 죽은 이후에는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록 마르다가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고백했지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마르다는 ‘무엇이든지’라고 말했지만 그 ‘무엇이든지’라는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나사로가 살아나는 일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보이는 곳에 있어야만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도 똑같은 능력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죽을 사람만 살리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마지막 날에만 사람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마르다는 앞의 것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뒤의 것은 하나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들 또한 이런 식으로 주님을 믿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주님을 만들어 내고 내 생각의 범위 안에서만 주님을 인정하며 믿고 있지 않은지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표현대로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믿음이라는 것이 흔히들 오해하듯이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모두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절대적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신데, 우리가 그 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니까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께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원하는 것이 그 분이 원하시는 것과 일치한다면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내가 원하는데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있다면 그것이 그 분의 성품과 맞지 않거나 그것이 우리를 위한 최선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중병을 알고서도 그를 죽도록 내버려 두셨듯이 말입니다. 여러분, 나사로의 죽음이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나쁜 일이죠. 그렇지만 나사로의 죽음은 나사로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지금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께서 행하신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나사로야 말로 예수님께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과 권한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 가장 강력한 증인이 되었고 그 스스로도 다시 살아난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으니까요. 우리 삶에 일어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 게다가 나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내 삶에 끼어든 듯이 보이는 일들은 모두가 다 나사로의 죽음과 같은 일들입니다. 그저 당장 보여지고 느껴지는 대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불평과 불만, 그리고 분노로 반응해서는 안됩니다. 당장은 그렇게 했을지라도 곧바로 돌이켜서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일들은 우리 주님이 사용하시려는 방향대로 흘러가고 그래서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마르다에게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풀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실 마르다의 부족한 믿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말씀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에 대한 부족한 믿음을 고백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을 열 때마다 이 놀라운 구절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성경 속에서 이런 비슷한 일들을 볼 때마다 불신앙이나 부족한 믿음도 이렇게 아름답고 놀랍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리는 고백과 반응들은 하나님의 손에서 얼마나 더 놀랍게 사용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믿음에서 나온 반응을 드리려고 애쓰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들 중에서 저 만큼 이 구절의 덕을 많이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장례식을 치를 때, 특히 그 절차 중에서도 가장 슬픈 하관식을 행할 때, 이런 구절이 성경에 있다는 것은 목회자들에게는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그 상황에 이 구절보다 더 적절하고 위로가 되며 힘이 되는 구절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실은 이 말씀은 그런 상황에서만 사용되고 또 생각되어지는 구절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구절의 참된 유익을 놓치고 있기도 합니다. 이 구절을 마르다의 이야기대로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는 장례식 전용의 구절로만 사용하고 또 생각하기 때문에 이 구절의 진짜 유익과 능력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부활을 ‘줄 것’이라든지, 너희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내가 부활이고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닙니다. 그저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현재의 사실에 대한 말씀이고,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나중에 우리가 죽은 후에만 부활이 되어 주시고 또 생명이 되어주실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부활“이시고” 지금도 여전히 생명“이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놓치고 살아서 그렇지 실은 과거에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부활이시고 영원히 생명이신 분이시니까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복과 은혜는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주어질 수 없는 복과 은혜들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것이 마르다가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정말 엄청난 복입니다. 죽어도 산다니 말입니다. 비록 그것이 언제인지 모를 먼 미래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죽더라도 다시 산다니 얼마나 놀라운 복이고 은혜입니까? 


누군가가 여러분 손에 있는 여러분의 손에 있는 만원짜리 빼앗아간다면 여러분은 어떠시겠습니까? 화가 나시겠죠?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하시겠죠. 또 며칠 있다가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전 재산을 다 빼앗아 버릴 것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안절부절 못하시겠죠? 이제는 다 망했다고 자포자기 하거나 그 때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두려워지시겠죠? 그런데 여러분이 만원을 준 다음에 여러분이 천만원을 받게 되어 있다면, 전재산을 내어준 후에 100억원을 받게 되어 있다면 그 때는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기쁘게 그 만원을, 아니 전 재산을 내어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난 아니라구요? 나는 그냥 만원이면 되신다구요? 그리고 난 지금 있는 것으로 충분하시다구요? 그러시다면 다른 도리가 없겠습니다만, 만약 그게 완전히 보장되어 있다면 아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엿을 사먹는 한이 있더라도 분명히 만원을 내주시고, 가져가지 않는다고 해도 전 재산을 억지로라도 그 사람 손에 들려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부활이 보장되어 있다면 그래서 정말 내가 죽어도 다시 산다면, 내가 그것을 전혀 의심없이 믿을 수 있다면, 이 한계투성이 목숨 내어주고서 영원히 영광스러운 영생을 얻는다면, 다시는 죽을 걱정 없는 완전한 생명을 얻게 됨을 믿는다면, 그 때도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그래서 욕심내며 집착하며 불편하고 힘들게 살아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아니, 오늘날 지구 구석 구석에서, 저 북한 땅에서 신앙 때문에 자기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주는 성도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목숨을 내어줄 지언정 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에게 있어서 목숨은 1,000만원을 얻기 위해 내어주는 만원짜리 한 장이고, 100억을 얻기 위해 내어주는 보잘 것 없는 전재산이니까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주님이 부활이심을 믿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이 부활이심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이 복과 은혜를 얻습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성도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목사는 어떠냐구요? 글쎄요. 막상 지금 당장 목에 칼이 들어오면 어떻게 될지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까짓거 죽으면 죽지 뭐”라고 진지하게 그렇지만 별 생각없이 생각할 수 있는데 까지는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죽으면 저희 가족은 어떻게 하냐구요? 그거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어차피 지금까지도 제가 잘 돌봐서 우리 가족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니까요. 저도 제가 왜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저에게 부활이 무거워질수록 두려움이 가벼워지고 하늘나라가 확실해 질수록 현실이 힘을 잃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고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던 옛날로 돌아가기가 싫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다가 한 가지 복을 더 약속해 주셨습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우리들 중에서 죽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죽어서 예수를 믿을 사람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으면 믿음 자체가 필요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 살아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뒤에 약속해 주신 복은 우리 모두를 위한 복이 됩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원히 죽지 않는 복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제부터 실험해 보십시오. 진짜로 죽나 안죽나 말입니다. 죽을까요? 안 죽을까요? 죽습니다. 아무리 눈 부릎뜨고 버텨도 죽기는 죽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저 육체적인 죽음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영생’이라고 부르는 가장 큰 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성경이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영생은 그것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늘나라의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미 여기서 하늘나라의 삶을 살고 있으니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하늘나라의 삶을 땅에서 하늘나라로 옮겨간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부활이시고 생명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땅에서도 영생을 누립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닮은 그런 삶을 땅에서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점점 더 진해지고 확실해 집니다. 요한복음에는 이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아주 은혜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4장 14절입니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구절인데요.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도저히 그 갈정을 해결할 수가 없어서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여인에게 해 주신 말씀인데요. 정말 너무 너무 굉장한 말씀입니다. 모든 인류가 찾는 답이 이 한 마디 말씀 속에 들어있으니까요. 


여러분, 왜 인생은 목마를까요? 계속해서 물을 마시고 또 마시는데도 왜 인생은 계속 목이 마를까요? 그 이유는 그 물이 항상 입을 통해 들어와 몸 밖으로 나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물이 결코 우리 속에 마르지 않는 샘을 만들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 가지는 한계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마시는 물과 같습니다. 아무리 마셔도 다시 목마른 물, 그래서 또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그래서 매달리고 집착하게 하는 물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 주님을 마시는 순간 주님은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샘물이 되십니다. 위에서 들어와 아래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와 내 영혼을 계속해서 만족시키고 또 밖으로 흘러넘쳐 다른 이들의 목마름도 해결해 주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근원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이 말씀을 들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봅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갈증 조차도 해결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길을 바가지를 다섯 번이나 바꿨고, 그 때마다 새로운 물을 마셔보았지만 여전히 목말랐습니다. 지금도 그 갈증을 해결하지 못해 한낮의 뙈약볕에 우물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샘근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여인은 충분히 만족했고, 그래서 그 샘물을 다른 이들에게로 흘려보냈습니다. 자기 마을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우물,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부활이요 지금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리는 복입니다. 그는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래서 현실 속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속에 샘근원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가 흘러넘치는 샘물 하나를 선물받게 됩니다. 그래서 만족합니다. 마시고 또 마셔도 목마른 세상에 속한 불완전한 물들에 더 이상 매달려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착하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을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기쁨과 풍성함 가운데 살아갑니다. 항상 갈하지 않고 은혜로 풍성하게 젖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공허함, 우리의 갈함, 우리의 불만, 두려움과 욕심 그리고 집착... 이런 것들은 우리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모셔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위한 부활이요 나를 위한 생명으로 믿는 믿음이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향해 소리치는 우리 영혼의 외침입니다. 더 큰 믿음을 가지라고, 그래서 네 영혼을 예수님으로 더 온전히 채우라고 외치는 우리 영혼의 외침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믿음을 이 땅에서 완전하게 갖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만큼, 갈증을 느끼지 않을만큼, 근심과 걱정에 빠져 살아가지 않을만큼은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샘물을 남들에게 나눠줄 수 있을 정도는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우리의 가장 큰 만족이요 기쁨으로 삼아 그 분께 영광돌려 드릴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다시 이렇게 물으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가 이것을 진실로 믿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지금 여기서 나를 위한 부활이며, 지금 여기서 나를 위한 생명임을 진짜로 믿기를 원하십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게 해 주는 그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생각에 머물지 마시고, 믿음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끊임없이 이 믿음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을 부활과 생명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짐으로 죽음과 현실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이 땅에 살지만 하늘의 그 넉넉하고 만족한 영생을 가져와 사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