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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4.02.새벽예배 - 안나스와 베드로(요한복음110)


요18012to18 - 안나스와 베드로(요한110).pdf


20130402D (#1).mp3.zip




  문 : 요한복음 18장 12-18절


권력이라는 말이 대단한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권력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사이의 관계가 생겨나면 그 사람들 사이에는 영향력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영향력이 큰 사람은 권력이 큰 사람이고 영향력이 작은 사람은 권력이 적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권력은 국가지도자나 정치가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친구사이나 가족지간, 저와 여러분 사이 심지어는 부부지간에도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힘, 권력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그것은 질서와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더 큰 권력을 지닌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돕고 관계가 원활하도록 질서를 만들어서 작은 권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죠. 그래서 성경은 권력을 섬김의 도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고 바르게 이끄는 도구라고 말합니다. 


요근래 장관인선이나 고위공직자 선정과 관련하여 국민들을 실망시켰던 일들이나 너무도 자주 들려와서 우리를 너무 자주 슬프고 부끄럽게 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비리와 세습문제는 결국 이 권력을 써야할 때 쓰지 못하고 잘못된 곳에 사용하거나 혹은 그렇게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요량으로 권력을 얻었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권력은 원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위임받은 힘이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주어진 힘이니까요. 그렇지만 권력은 그것이 힘이기 때문 굉장히 위험합니다. 모든 힘들이 그렇듯이 잘못 사용하면 다른 사람들도 힘들게 하고, 자신도 망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부터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로마군대의 입회 하에 유대인들, 그러니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부하들에 의해 결박되어서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셨습니다. 원래는 절차상으로 안나스가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끌려가셨어야 하지만 안나스에게로 인도되었습니다. 오늘 본문만 보아도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장인이었는데, 실제로 그 자신도 주후 6년부터 15년까지 대제사장을 지낸 인물이었고, 다섯 아들과 손자까지 모두 대제사장을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가족은 주후 6년부터 41년까지 35년동안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직을 독식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안나스는 이미 오래전에 대제사장직을 은퇴했지만, 이런 집안의 어른으로서 여전히 현직에 있는 어떤 대제사장보다도 더 큰 권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위인 가야바가 이전에 공회에서 예수님의 문제로 설왕설래가 있었을 때에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한 마디 말로 상황을 완전히 정리했을만큼 영향력이 있었던 것을 보면 그 당시 안나스의 위치와 권력이 어떠했을지 우리는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재판과 전혀 상관없는 그가 가아바를 재치고 단독으로 제일먼저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그의 권력과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나스에게 인도되었다는 이야기를 기록한 후에 곧바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바로 베드로의 첫번째 배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붙들리시자 다른 제자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지만 본문이 ‘다른 제자’라고 부르는 그 제자와 함께 슬금슬금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제자가 대제사장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관저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는 문을 지키는 여종에게 말해서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 여종이 베드로를 어렴풋하게 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도 저 예수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닙니까?” 베드로는 아니라고 시치미를 뚝 뗍니다. 그리고는 마치 그저 구경온 사람인 듯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피워놓은 불을 쬡니다. 그리고 그런 부인은 결국 나중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반복해서 부인하는 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안나스와 베드로, 이 두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상관도 없고 공통점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아주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 다 권력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나스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권력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고, 베드로는 권력이 없었지만 권력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권력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태도가 양상은 조금 다를지라도 이들의 삶을 바른 방향에서 어긋나게 했던 것입니다. 가야바는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얻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 그 동안 제사장으로써 온갖 온전치 못한 일들을 저질러 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일을 처리하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어떻게 사용해 왔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도 아니며 증인들도 없는 상태에서 단독으로 재판장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자신이 가진 권력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했다면, 그는 정반대로 행동했을 것입니다. 가야바와 공회원들이 불법으로 모의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 때, 그 힘을 사용해서 일이 불의하게 흘러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이 일이 불의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에 있어서 지휘역할을 하려고 들었던 것입니다. 힘이 있으니 그 힘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또한 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철없는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했을 때, 열 두 제자들이 모두 두 사람에 대해서 화를 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분하게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구요. 선수를 놓쳤고 두 사람이 자기들만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화가 나고 분했던 것입니다. 그 열 두 제자 중에 베드로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도 그 일에 대해 똑같이 화를 내고 분하게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도 권력지향적인 사람이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주님이 잡히시던 그 날, 그가 그런 비굴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인 것 또한 그가 모든 것을 힘 중심, 권력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보다 센 힘의 희생자가 될 것이 두려워서 거짓말을 반복해서 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일방적으로 비난할수만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죄를 짓게된 이유만큼은 잘 헤아려서 우리를 위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힘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힘이 있을 때는 그 힘을 자기를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고 힘이 없을 때는 힘 앞에서 비굴해 집니다. 그래서 힘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정치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관계 속에서 힘을 만들고 그 힘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또 그 힘을 유지하려는 일에만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으니까요. 이런 사람들은 가치나 의미, 올바름 보다는 자신의 입장이나 평판, 그리고 위치만을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우리 교회에 와서 제일 크게 감사드리는 것이 우리교회 성도들 중에서는 제가 보기에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인 분이 ‘거의’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또 여러분이 자유롭고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좋은 태도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고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크고 작은 힘과 영향력들을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영적인 자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안나스와 베드로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을 비춰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우리 속에 안나스나 베드로를 닮은 모습이 남아있지는 않은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는 마음대로 하려 들지만 나보다 힘 센 사람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는 그런 이중적인 모습은 없는지 말입니다. 우리 속에 이 두 사람을 닮은 모습이 흐려지면 흐려질수록 우리의 삶 또한 우리 주님을 닮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다른 이들을 참으로 유익하게 하는 삶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은 언제나 섬김의 도구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셔서, 우리의 힘이 우리를 교만하게도 비굴하게도 하지 않는 영광스러운 힘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