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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4.03.새벽예배 -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요한복음111)


요18019to27 -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요한11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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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 요한복음 18장 19-27절



저는 어제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바른 신앙을 위해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권면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정치적이 되거나 권력중심, 힘 중심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라는 권면이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명령을 할 권한이 있다면 명령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성도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며 또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 그가 속한 교회도, 그가 사는 사회도 유익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람 자신도 영적으로 굉장한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사람들은 항상 사람을 볼 때,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또 그 이익에 유리한 방법으로 이용하려고 들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반쪽을 차지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엄밀하게 말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통해서 표현되는 신앙은 정치적인 사람들에게는 참된 모양으로 뿌리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비록 대제사장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안나스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안나스의 잘못된 행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제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질문은 왜 할까요? 궁금하기 때문이고, 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힘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질문조차도 다른 사람에 대한 압박의 도구로 사용하곤 합니다. 때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질문을 그런 식으로 악용합니다. 지도자들이나 윗 사람들 중에서는 자신들이 굉장히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마치 그 누구의 어떤 의견이라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무슨 이야기를 해도 좋다고 이야기하면서 자기 자신이나 아니면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랫 사람들은 잘 압니다. 그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었다가는 그 이후로 영원히 찍히는 신세가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도 전에 부목사로 섬겼던 어떤 교회에 부임했을 때, 처음에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몰라서 아주 오랜 세월동안 내놓은 자식으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이전에 사역했던 교회에서처럼 어떤 행사에 대한 평가를 했는데, 담임 목사님께서 어땠느냐고 물으시길래 느낀 점을 곧이 곧대로 두 번 이야기했다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경우 질문은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폭력이고 압력입니다. 네 생각이 어떠하든 내가 원하는, 내가 기뻐할 대답을 내놓으라는 강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을 때, 당하게될 불이익을 뻔히 알면서 어찌 정말 마음에 있는 정직한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만약에 말 그대로 어떤 이야기든 진솔한 의견과 생각을 들을 생각이 없다면, 그럴 수 있는 마음의 크기가 없다면 절대로 자기보다 힘이 약한 사람에게는 솔직한 의견을 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부정직과 비굴함을 요구하는 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나스의 질문이 바로 이런 종류의 질문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 질문에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안나스는 정치적이었던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나스는 아마도 이런 큰 힘을 가진 내가 이렇게 근엄하게 질문하면 예수는 분명히 겁을 먹고 자신의 유도심문에 말려서 스스로 잘못을 자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제까지 그가 다루어온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안나스는 상대를 잘못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안나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안나스는 머리로 사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가슴과 영혼으로 사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몰고 싶었습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를 판별하는 기준은 그가 거짓말을 했는가? 그리고 은밀하게 사람들을 유인했는가? 하는 두 가지였습니다. 안나스는  그래서 예수님의 메세지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물었던 것입니다. 그 분의 메세지가 거짓말이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은밀하게 유인했다는 증거를 예수님의 대답에서 찾아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안나스가 예수님을 죄인, 정확하게는 거짓 선지자로 몰고 가기 위해서 다 알고 있는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의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항상 무슨 말씀이든지 공개적으로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만 전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 누구도 은밀하게 유인한 적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세지를 들은 사람들이 내용을 잘 아니 그 사람들에게 들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메세지에는 전혀 거짓이 없다는 당당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랫사람 중 하나가 대제사장 앞에서 건방지게 군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숭어가 뛰면 망둥이도 뛴다고 안나스의 아랫사람은 잡혀 온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세를 과시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권력지향적인 소인배의 특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굳이 자기 힘이 아니라도 자기가 기댈 힘이 있으면 그 힘에 기대어 더 약한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또 약한 사람들의 고통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의 부당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안나스나 이 사람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증인과 증거”였습니다. 원래 정상적인 재판에서는 증인은 죄수가 아니라 재판관이 소환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에서는 죄수로 잡혀오신 예수님께서 증인과 증거를 요구하십니다. 죄인으로 잡혀온 사람이 재판관을 향해서 법을 지키라고, 제사장을 향해서 율법을 지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실은 이 재판은 안나스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재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안나스를 고소하여 재판하는 그런 형국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 또한 세상 앞에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우리를 향한 모함과 협박 앞에서 우리 자신의 당당하고 온전한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고 오히려 우리 자신이 그들의 불의함을 하나님께 고소하는 역할을 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우리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하셨습니다. 이적도, 말씀도 숨어서 은밀하게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말을 하든 행동을 하든 은밀하게 하면 안됩니다. 은밀하게 해야 할 일이라면 과감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든 교회적으로든 말입니다. 만약 그 반대로 행동하면 그것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를 정죄하는 사탄 앞에서도 또 사람들이나 하나님 앞에서도 말입니다. 둘째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안나스나 안나스의 부하처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알량한 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통로가 될 수 있고, 그래서 세상의 불의를 불의로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 자체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꾸짖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 자신에게 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당당한 사람은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항상 투명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온 세상이 자신을 고소하고 비난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증인을 청할만큼 당당하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투명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세상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