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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4.03.수요저녁 -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27)


빌0410to12 -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2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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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4장 10-12절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속에는 정말 많은 성도들이 너무나 좋아하고 힘을 얻는 구절이지만, 사실은 그만큼 크게 오해되고 있기도한 구절이 하나 나옵니다. 몇 절일까요? 바로 13절입니다.  “내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얼마나 기운차고 희망적인지 모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믿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해 주실 줄로 믿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다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진짜로 이런 뜻을 담고 있을까요? 이 구절이 믿음 만능주의, 신앙 전능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오해 때문에 이 말씀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진짜 능력은 잊혀진 복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보내 준 선교비를 받고서 감사를 표시하는 내용의 첫 부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보내 준 선교비를 받고 자신이 정말 크게 기뻤다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바울이 ‘크게 기뻐했다’고 할 때 사용한 ‘크다’는 단어는 바울이 기쁨이라는 말과 붙여서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그런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여기서 이 단어를 자신의 감정의 깊이와 크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일부러 선택했던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너희의 도움을 받고 정말 억수로 무지무지하게 기뻤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기뻐했던 이유는 뒤에 살펴보겠지만 실은 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돈에 담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비도 돈인지라 돈을 받고나서 바로 이렇게 큰 기쁨을 표현하면 오해가 생겨날 소지가 있었고, 바울은 이러한 오해가 생겨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기쁨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조금 더 길게 설명해 줍니다. 바울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는 말씀드린 대로 생겨날지도 모를 오해를 막기 위해서이고 두번째는 그런 설명들 자체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바울의 경험에서 나온 아주 중요한 비결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쁨과 감사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동시에 자신의 기쁨을 빌립보의 성도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기쁨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원래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굉장히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우거나 목회한 많은 교회들 중에서도 가장 깊이 마음을 주고 받은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에 빌립보 교회와 바울 사이의 연락과 모든 교제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아마도 심정적으로 굉장히 큰 상실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기간동안이 사도 바울에게는 마치 모든 것이 죽어버린 차디찬 겨울같이 여겨졌던 것이구요. 그런데, 갑자기 자기가 갇혀있는 로마로 에바브로디도가 찾아왔고, 이것은 바울에게는 마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차디찬 겨울이 지나고 죽었던 것 같은 나무에 움이 돗고 꽃이 피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그 동안 빌립보의 성도들이 바울을 애타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연락을 할 방도조차 찾지 못했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을 그토록 크게 기뻐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에바브로디오의 방분과 그가 가지고 온 선교비는 바로 그러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애틋한 관심과 배려가 피운 새싹과 아름다운 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그렇게 크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은 바울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그냥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라는 개인에게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관심을 품고서 어떻게든 다시 바울을 찾아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고 싶어하는 깊은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끊어져 버린 것처럼 여겨지는 빌립보 성도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애타는 안타까움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들이 서로의 관계 안에서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리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문득 사도 바울과 빌립보의 성도들의 관계와 같은 관계야 말로 오늘날의 교회가 잃어버린 커다란 기쁨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상당부분 시장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는 마치 좋은 상품을 판매하듯이 성도들이 좋아할만한 여러가지 종교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성도들은 그 상품을 사가듯이 목회자가 제공하는 종교적인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는 일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거기에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는 기쁨은 있을지 몰라도 서로 간의 깊이있는 관계가 가져다 주는 참된 기쁨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데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자신의 목회적인 섬김을 서비스 상품화 해서 시장의 물건처럼 내놓은 목회자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금씩 조금씩 종교소비자로 변해가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성도들에게도 그 책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어리석음과 이기심이 성도의 교제가 가져다 주는 참된 기쁨을 점점 더 희미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조직이나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인격적인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공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비공식적인 관계, 그것도 서로를 위한 진심어린 마음으로 헌신하는 깊이있는 관계가 꼭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관계를 닮은 마음깊이 구체적으로 배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을 내어주는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는 하나님게서 교회에만 허락하신 비밀스러운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광현교회가 서로가 서로를 향한 이런 애틋한 사랑과 관심을 회복해 가게 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 더 마음을 쏟고, 조금 더 깊은 배려와 관심을 기울인다면 한 걸음에 천리를 갈 수는 없겠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만큼 진하고 깊은 기쁨이 우리 속에서 회복될 것입니다. 이 기쁨을 위해서 서로 서로가 조금씩 더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부탁드리며 또 축원합니다. 


이제 바울은 오해의 소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실은 이 이야기 속에 굉장히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본질 중 한 가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바로 이 안에 우리 신앙의 진짜 능력, 진짜 복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얘 애처부터 막고 싶어하는 오해란 자신이 단지 물질적인 어려움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한다고 여겨지고, 나아가서는 넌지시 더 많은 재정적인 도움을 그런 식으로 요청하고 있다고 여겨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결코 자신의 이야기가 그런 의도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짧게 요약하면 이제 바울에게는 눈에 보이는 상황이 거의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추호라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지만, 사도 바울은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기쁨을 위한, 믿음의 엄청난 능력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번에 걸쳐서 배웠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확실히 배웠다고 말합니다. 노년에 이른 바울은 자신이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 능력과 비결을 평생을 두고 확실하게 배워왔다고 말합니다. 그가 배운 것은 바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이었고, 그 모든 상황들을 적절하게 대처하고 소화해 낼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는 이 비결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이 그 당시에 그런 상태에 있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로 사람이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내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상황에 거의 개의치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그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진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목표를 높이 잡아야 도달할 수 있는 성취도 높게 마련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상황에 상관없이 만족하며 모든 상황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계속 그런 신앙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니다, 바울의 하나님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다. 바울에게 가능했다면 나에게도 충분히 가능하다’라고 믿고서 내 믿음을 은혜 안에서 거기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 애쓰면 우리의 신앙은 분명히 거기까지 갈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바울이 이런 비결들을 ‘배웠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그 비결들을 하루 아침에 얻은 것이 아닙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주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왜 ‘어떠한 형편에든지’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모든 형편 속에서, 그 모든 형편들을 통과하면서 그 모든 상황에서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 들어가지 않고 진리를 진짜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신앙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진짜로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서 나아갈 때, 그 때 그 경험을 통해서 그 진리가 죽은 진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진리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만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모든 곳, 모든 상황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배우려고 힘쓸 때 그 때 우리는 그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해지기를 좋아하지 않고 그래서 자꾸 그런 환경을 피해다니려고만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계속해서 좁고 무능한 상태, 그리고 항상 두려움과 상황에 휘둘리는 나약한 상태로 내버려 두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삶 속에는 무의미하고 불안한 편안함을은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를 위한 견고한 평안도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미있는 모험이 들어갈 자리도 없습니다. 그런 삶은 항상 밖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만 움츠려 들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억지로 고난과 어려움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나를 찾아올 때, 그 때는 그런 상황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넓히시고 크게 하시려고 허락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믿음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어려움들은 나를 묶고 괴롭히는 불행하기만한 일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확장시키고 훈련시키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요즘 읽고 있는 큰 도전을 주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사도 바울 이후 최고의 선교사였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는 스탠리 존스라고 불리는 인도 선교사의 자서전인데요. 그 책 중간 쯤에 그 분이 인도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그 대로 옮겨 읽어드리겠습니다. 


켈커타의 데이비드 리 부부도 다질링에 산사태가 일어나 여섯 자녀를 모두 매몰시킨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대신 그들은 그것을 활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은 집이 박살나자 훨씬 큰 집, 곧 300명의 아이들이 북적거리는 집을 세웠다. 그들은 60년 동안 그 집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길러냈다. 산사태로 매몰된 아이들을 기념하는 기념비에 어떤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생각되는가? “나의 하나님 이유가 뭡니까?”라고 새겨져 있을까? 아니다. 그 기념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나는 데이비드 리 여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사는 동안 슬퍼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가 자신의 슬픔에 곡을 붙였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활동하던 독일 선교사 부부가 나병으로 외동딸을 잃었다. 그들이 괴로워하며 “나의 하나님, 이유가 뭡니까?”하고 소리쳤을까? 아니다. 그들은 외동딸과의 사별을 딛고 놀라운 업적을 쌓았다. 그들은 인도에서 가장 큰 나병환자 요양소를 설립했다. 무슨 일이 닥치느냐가 아니라 일이 닥친 뒤에 그것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결과를 결정한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왜 나에게만 이라는 물음에 계속해서 붙들려 있거나 혹은 원망이나 자책하는 일로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는 그 일의 고통이 주는 유익은 전혀 찾아누릴 수가 없습니다. 남는 것은 고통의 상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들을 오히려 나를 넓히시고 크게 만드시려는, 그리고 나에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붙들고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라고 여기고 스탠리 존스의 말대로 그런 일들을 ‘활용’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사도 바울이 알았던 그 놀라운 자족의 비결을 배워갈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도 살아갈 기회와 능력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한 후에 이렇게 말을 이어갑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배운 것은 서로 정반대 되는 상황 속에서도 똑같은 태도와 마음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비천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유가 무엇이건, 자신이 선택한 것이건 혹은 타의에 의한 것이건 자신이 있게된 낮고 험한 자리에서도 평안을 유지할 줄 알았습니다.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그런 비천함 뿐만이 아니라 풍부에 처하는 모든 비결도 배웠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의 굉장히 놀라운 고백입니다. 어려움이나 가난, 낮아지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풍부에 처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냐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은 풍부함으로부터, 자신의 성공이나 부유함,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일이 훨씬 더 힘듭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신앙이 어느 정도 있으면 하나님이 낮추실 때, 조금의 원망과 불평은 있어도 결국 겸손과 겸허함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갑자기 돈이 쏟아지고 명성이 올라가고 사람들의 칭찬만 받게 될 때, 그런 일들로 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실 비천해 지는 것에 대처하는 비결보다는 풍부함에 바르게 대처하는 비결을 배우는 일이 더 힘들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신앙 안에서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망가뜨리지 않지만, 부함과 높아짐은 너무도 쉽게 우리들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아주 중요한 교훈입니다. 성도는 낮아짐에 대처하는 방법만 배워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실 때, 많은 것을 주실 때 그런 상황들도 적절하게 다루어서 자신을 지켜내고 영적인 손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방법을 연습하지 않으면 정작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영적으로 탈선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앙적이고 영적인 훈련이 더 많이 필요할 때는 힘들고 어려울 때가 아니라 평안하다고 생각되고, 모든 일이 잘 되어 간다고 생각되어질 때인 것같습니다. 기도하는 일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상황이 힘들고 좋지 않을 때는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평안하고 걱정이 없을 때는 기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특히 자신을 낮추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기도는 정말 하기 힘듭니다. 몸도 그렇지만 우리의 영혼도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 중에는 차갑게 식어버리고 잘 나간다고 생각될 때는 열이 마구 올라간다면 그 영혼은 결코 안전한  상태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천에 처했을 때도 기가 죽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부유하게 하셨을 때도 그것 때문에 나태해 지거나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고난이든 복이든 그는 그것을 자신을 넓히고 크게 만드는 도구로 이해했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훈련하고 확장시킬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너희들도 너희들의 상황을 이렇게 선용하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지금 너희가 있는 상황에 데려다 놓으신 너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이나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이렇게 변한다면 우리의 삶은 정말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도처에 널린 것이 나를 더 온전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환경인데 얼마나 기대가 되겠습니까? 또 그런 하나 하나의  환경을 그렇게 이용해 나갈 때, 저와 여러분은 또 얼마나 평안하고 강한 영혼을 지닌 견고한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우리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우리의 종착역은 저 위에 있습니다. 그 나라에 가기까지 우리에게 결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함이나 가난도, 건강이나 연약함도, 비천함이나 높아짐도 그저 우리에게는 이 땅에서 우리를 더 영광스럽고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훈련도구에 불과합니다. 훈련도구에 휘둘린다면, 그런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훈련학교를 성공적으로 졸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를 다니는 내내 고통과 좌절, 교만과 자기비하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구절말입니다. 이 구절이 흔히 이해하는대로 내가 예수를 믿으면 내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 불가능은 없다,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이 그런 얄팍한 뜻을 지닌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아닙니다. 13절에 나오는 “모든 것”이란 말은 12절의 “모든 ㅇ일” 그러니까 “비천에 처하는 일, 풍부에 처하는 일, 배부른 것, 배고픈 것, 풍부한 가운데 거하는 것, 궁핍한 가운데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말은 결국 이 모든 환경과 조건 속에서, 영혼의 동일한 평강과 마음의 부요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함없는 평강과 만족함으로 자신의 인생과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주고 싶어하시는 현실적으로 볼 때도 가장 유용한 능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족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능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환경을 바꾸고, 원하는 것을 이루고, 앞에 놓인 장애물들을 넘을 수 있는 일차원적인 능력을 떠올립니다. 물론 그런 것도 능력은 능력입니다. 그런 능력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단지 그렇게 현실의 문제와 부족함을 해결하는 능력이 되는데서 그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보다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자족의 비결”과 그 능력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훨씬 더 큰 능력이고 가장 좋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해결능력은 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결국 현실 안에 갇힌 능력입니다. 현실의 문제는 반복해서 우리를 찾아오게 마련이며,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그 문제와 다시 싸워야만 하니까요. 그렇지만, “자족의 비결”은, 이 능력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현실의 문제와 장애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장애물을 마치 장애물이 없는 것처럼 휙 지나가게 해 주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이 비결을 배운 사람에게 자신의 현실의 문제와 장애란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일시적으로 불편하고 성가시기는 하겠지만 그런 것들에 계속 붙들려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충분한 여유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좋든 나쁘든 상황에 매여 있다는 것은 곧 나만 바라보면서 나에게만 붙들려 있다는 뜻이고 그런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덧셈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미분적분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상황들을 다룰 줄 안다고 말합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의 비결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분명하게 단서를 답니다. “주 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이것은 바울이 단 한 번도 잊지 않고서 고백하는 자기 인생의 가장 복된 후렴구입니다. 바울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족하며 그 모든 상황을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선용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특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능력이 크고, 그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고 항상 그 분안에 거하며,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는 자족의 비결도 배울 수 있었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흔들리지 않고 평강과 중심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이 모든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아멘’이신 분, 그러니까 그 모든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적인 대답이신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자신의 인생에 닥쳐오는 모든 일들을 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멘’이라고 도장을 찍어주신 일이 자신의 잘못된 반응이나 태도때문에 자신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그는 자족의 비결을 배울 수 있었고, 요동하지 않고 항상 제 자리를 지키는 비결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상황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는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된다면 우리는 빌립보서가 약속하는 그런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 속에서,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바울처럼 그 모든 상황들을 나의 크기와 넓이를 확장시켜 주는 학교와 훈련장으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더욱 더 나은 성도로, 우리 주님을 닮은 더 훌륭한 존재로 다듬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이 약속하시는 기쁨을 누릴 준비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서서히 샘솟아 오르는 하늘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교회 안에서 서로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며, 또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족의 비결을 배우며,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영적인 실력을 쌓아서 주님 주신 기쁨 속에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