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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4.14. 주일오전 -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마가복음 25)

막0535to43 -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마가25).pdf


20130414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5장 21-24, 35-43절



우리가 살다보면 나는 급해 죽겠는데, 하나님은 전혀 급해 보이지 않으셔서 화가 나고 야속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나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지내놓고 나서 보면 어떻습니까?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때에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때로는 그 일이 내 생각대로 해결되지 않은 것이 훨씬 더 유익하고, 정말 하나님은 모든 일을 완벽하게 빈틈없이 행하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깨달음에 소름이 돋곤 합니다. 인간은 당장, 그리고 눈 앞의 일 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굉장히 힘들어 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의 인생만 돌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현재 세계인구가 70억이 넘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70억명의 인생을 모두 다 돌보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70억명의 인생 마저도 서로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익이 다른 사람에게는 손해가 될 수 있고, 한 사람의 성공은 다른 사람의 실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저질러 놓은 일이 수 십년 후에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그 반대가 되기도 하구요. 


현재만 보아도 그렇지만 과거도 그렇고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역사 속에서 나고 죽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섭리하시고 조율하시면서 사람들에게도 가장 유익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도 최대한으로 드러나게 하시면서 이 세상을 움직여 가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지 않으시거나 우리 인생 속에서 실수를 하시지는 않습니다. 놀랍게도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최선을 만들어 가시며, 우리의 인생도 최고로 유익하게 이끌어 가십니다. 오히려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일시적으로나마 뒤틀리게 만드는 것, 우리 자신의 인생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부족함이 아니라 우리들의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믿지 못하고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때 그것 때문에 우리의 삶은 더 무질서해지고 엉망이 되어져 갑니다. 실제로 우리 가 삶에서 겪는 어려움들이란 이렇게 내가 하나님과 다른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생겨나는 어려움일 때가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적어도 제 경험으로는 그런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모든 일들의 역사와 관계 그리고 원인과 결말을 다 알고 완전히 이해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움직여 가시는 방법을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너무 결정적으로 생각하거나 그런 것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신앙에 손해를 입어서는 안됩니다. 


너무 급한 마음에 야이로는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자 마자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향합니다. 야이로의 마음을 알리가 없는 사람들은 저마다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어대기에만 바빴습니다. 그런데 문득 예수님이 멈춰 서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옷을 만진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실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나 이야기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예수님의 옷을 만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그대로 서 계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절차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결코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졌고, 그래서 그렇게도 자신을 괴롭히던 질병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누군가가 자기 옷을 만졌고 그래서 능력이 빠져나가 그 사람을 고쳐주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서 가던 길을 재촉하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굳이 멈춰서시고 두리번 거리시며 여인을 찾으시고,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시고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야이로였다면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사정을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 뻔히 지금 딸이 죽어가는 것을 아시면서 그렇게 중간에서 세월아 네월하 하시는 예수님을 여러분이 보고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급한 것은 나고 아쉬운 것도 나니까 대놓고 투덜거리지는 못하겠지만 여러분이 이런 일을 당한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굉장히 실망스럽고 화가 날 것입니다. 야이로라고 안 그랬겠습니까?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느긋하게 멈춰 서셔서 할 일 다 하셨습니다. 실제로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일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다급함을 모르셔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예수님은 절대로 그걸 모르실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신데에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나는 급한데 하나님은 영 느긋하시다고 여겨질 때, 또 하나님이 내 사정을 모르고 내 마음을 모르신다고 느껴질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입니다. “아!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움직이시는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분노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만 생각하고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나를 일하시는 만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두 사람의 필요가 부딛히는 경우일지라도 한 사람을 포기하시고 한 사람만 위하는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고 두 사람 모두를 가장 유익하게 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게 열사람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이러한 멈춰섬은 여인에게는 말할 수 없이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멈춰서시고 여인을 찾으시고 또 여인과 대화를 나누지 않으셨다면 여인은 그저 자기도 모르게 고침을 받은 그 일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멈춰서시고 그 여인을 찾으시고 또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그 여인은 누구나 피하는 불결한 여인에서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것만으로도 치료를 받고 구원을 얻은 거기 있었던 그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은 여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 모였던 모든 사람들도 이 일을 통해서 영적으로 보면 아주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에 대해서 아주 충격적인 가르침을, 그것도 실제 경험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으니까요. 아마 그 사람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하고 또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렇게 예수님을 떠밀고 만졌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저 여인은 뒤에서 슬쩍 우리들 사이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뿐인데 저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왜 그럴까? 바로 믿음의 차이때문이구나. 나는 호기심으로 별 기대없이 예수님을 만졌지만, 저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진 것이 바로 그 차이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랬다면 아마도 그는 이 교훈을 평생을 잊지 않았을 것이고 나중에 예수를 믿는 자신의 믿음을 생각할 때, 계속 기억하면서 믿음을 다잡곤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 거기 있었던 사람들만 이런 유익을 누렸을까요? 아닙니다. 그 이후 그들로 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복음서를 통해 이 이야기를 읽고 묵상했던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저와 여러분들까지 이 여인의 이야기는 말할 수 없는 영적인 교훈과 양식이 되고 있으며 해결불가능한 문제와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능력있는 위로와 약속이 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저 지나가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여인이 병고침을 받았던 일은 그 여인 주변의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이름모를 사람들의 치유사건처럼 말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이 일의 피해자였던 야이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야이로는 정말 이 일로 피해를 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야이로가 예수님이 지체하시는 것을 보고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절대로 이 일의 피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딸이 죽었으니 피해자가 맞다구요? 그럴까요? 한 번 따져보겠습니다. 먼저 야이로의 딸이 언제 죽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야이로의 집이 바닷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정황으로 보면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야이로의 딸이 죽고나서 그 소식을 전하려는 사람이 예수님께로 오고 또 예수님이 여인을 만났던 그 장소에서부터 야이로의 집까지 가는 동안 이미 그의 집에는 곡하는 사람들이 와서 곡을 하고 있었고 집안은 온통 상가집 분위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이 여인을 찾고 만나서 이야기 나눈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아무리 길어도 10분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야이로의 딸은 언제 죽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예수님이 여인을  만나기 전에 죽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많이 양보해도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야이로의 딸은 세상을 떠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찾아 만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도 집으로 가는 중간에 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랬다면 야이로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는 계획대로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청을 거절하지 않고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야이로의 마음 속에는 “이제 됐다!”는 안심과 흥분이 가득했을 것이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집으로 가는 중간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그것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뜻이 되었겠죠? 어땠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졌겠죠? 마지막 남은 기대와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이니까요. 아마도 야이로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엉엉 울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라로 말씀하셨다면 그 말이 위로와 힘이 되었겠습니까? 죽었는데, 내 딸이 이미 죽었는데 뭘 두려워 말라는 것이고, 도데채 뭘 믿으라는 것이냐고 따지고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테이프를 뒤로 돌려보면 비록 예수님께서 자신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을 찾으시고 또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느라고 지체를 하시기는 했지만 그 일을 통해서 야이로는 정말 엄청난 사실을 배우고 또 믿게되었습니다. 우선 야이로는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것을 생생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은 슬쩍 그 옷에 손만 스쳐도 그 누구도 고치지 못하는 질병을 고치실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지니신 분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지금 자기가 모시고 가는 분이 바로 그런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 한 가지 야이로는 예수님의 능력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또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 확실하다면 그 손으로 슬쩍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불치병을 치료받을 수 있고 부정함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여인을 만나시기 위해서 멈춰서시고 그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목격하기 전과 후에 야이로가 달라졌을까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과 믿음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상태로 변해있었을 것입니다. 


야이로가 딸이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믿음에 대해서 전혀 다르게 생각하게 된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야이로는 그런 상태에서 자신을 향해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하고, 그래서 예수님과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배우기 전에 이 말씀을 들었을 때와 지금 이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야이로에게 주는 능력과 확신이 똑같았을까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예수님이고 또 말씀도 같은 말씀이겠지만 야이로가 달라져 있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말씀으로 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은 이제 그냥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위로차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의 옷을 만지기만 한 일로 한 여인의 불치병을 고치셨던 예수님께서, 예수님과  믿음에 대해서 완전히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한 야이로를 향해 던지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정확하게 기록은 되어 있지 않지만, 야이로는 진짜로 두려워하지 않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주저앉아 울지 않고 예수님을 모시고 집까지 갔고, 집에 도착해서도 문상온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대신에 예수님과 함께 아이가 누워있는 곳까지 갔겠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을 때, 그 말씀에 대해서 마리아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 그랬던 것처럼 토를 달지 않았겠죠. 

야이로가 피해자였습니까? 예수님의 지체 때문에 야이로가 손해를 본 것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야이로는 예수님의 지체하심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더 견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런 믿음의 능력에 대한 지식과 확신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참! 딸은요?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셔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숨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자 마자 그 동안 앓느라고 먹지 못했던 밥까지 실컷 먹을 정도로 건강하게 야이로의 품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본 두 주 동안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람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두 가지의 한계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해 주신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작은 질병보다는 큰 질병이, 그리고 큰 질병보다는 고칠 수 없는 난치병이, 그리고 이런 질병들 보다는 죽음이 훨씬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이런 문제들은 다 똑같은 문제들입니다. 작은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은 큰 질병도 고칠 수 있고, 고칠 수 없는 질병도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냥 능력을 가진 어떤 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시며 또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우리 삶이 항상 탄탄대로를 달릴 것이라거나 혹은 우리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그렇게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그 분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그 어떤 일도 일으키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생각 모든 필요까지 다 알고 계시며, 이 세상의 모든 것들도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다 알고 계시는 그런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경험이 그렇게 말해주지 않을 때에라도 이것이 ‘사실’이며 ‘현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믿음과 생각을 붙들어 매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코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감에 있어서 실수나 부족함이 있을 수 없으십니다. 만약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 분이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거나 그 분이 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 분을 온전히 믿을 수도 의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무리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가장 완벽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모든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계시며 그런 상황 속에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완전히 부딛히는 두 개의 사건을 모두 완벽하게 처리하시면서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을 모두 가장 유익하게 하셨으며, 심지어는 오늘 이 본문의 이야기들을 읽는 우리들까지도 유익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이야기가 이런 놀라운 메시지를 전해 줄 수 있었던 데에는 예수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지만 여기 나오는 두 사람, 그러니까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과 야이로의 역할도 작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두 이야기의 중심에는 이 두 사람의 “믿음”이 커다란 물줄기로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믿음은 은혜를 받는 유일한 손입니다. 뒷짐을 지고서야 황금덩어리를 던져주어도 받을 수가 없듯이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큰 은혜의 기회가 와도 그저 지나쳐 버리게 만들고 맙니다. 그게 은혜의 기회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여인은 처음부터 믿었습니다. 정말 놀랍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몸을 해서 거기까지 예수님을 만지려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처음에는 이 여인과 같은 믿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치유사건을 통해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두 사건 모두 그 믿음을 통해서 일하셨고 그들이 가장 원하는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철석같이 믿는다는 것,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같고 그 하나님이 나에게는 통 관심이 없게 여겨지는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래도 주님은 믿음을 요구하시며, 믿음을 보기를 원하시며, 그 믿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통해 우리의 삶을 가장 완벽하게 이끌어 가십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의 두 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은혜로운 메세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결코 지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리지 못하고, 우리가 그 분의 일하시는 타이밍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 뿐입니다. 지금 당장의 경험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타이밍만 생각하느라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고 주님을 따른다면 그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하나님의 실수처럼 보이는 모든 일들까지도 우리들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가장 선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현재의 일들이나 미래의 일들 뿐만 아니라 과거의 모든 일들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과거의 사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의미가 달라지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과거가 주는 유익도 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과거에도 실수하지 않으셨습니다. 지체하지 않으셨고, 여러분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조급함과 불신앙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우리의 불순종이 그런 섭리와 인도를 뒤틀리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섭리와 복잡한 타이밍을 다 헤아리고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나 자신의 삶 하나도 다 이해할 수가 없고 우리 자신의 삶 하나도 제대로 붙들 수 없으니까요. 여러 복잡한 상황 속, 다급한 상황 속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시는 다급한 상황 속에서 여인을 만나는 느긋함을 통해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유익과 은혜를 주셨던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조급함과 원망으로 두려움에 빠지지 마시고,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그 믿음을 드리셔서 그 믿음을 통해 완전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