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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4.16. 새벽예배 -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한복음120)


요2001to10 -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한120).pdf


20130416D (#1).mp3.zip




  문 : 요한복음 20장 1-10절


안식 후 첫날 새벽, 그러니까 첫번째 부활절의 새벽이 찾아왔습니다. 안식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막달라 마리아는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장례되어진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제자들보다도 더 빨리 용기를 내어서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런 행동은 정말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그에게서 일곱 귀신을 내쫓아 주셨고, 그 때부터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그 때 이후로 예수님을 돕고 섬기는 자리에 있게 되었던 여인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여인들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며 섬겼지만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가장 속깊이 간직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만큼 더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려고 생각하지 못했을 때, 여인의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무덤까지 달려갔던 것이겠죠. 아마 금요일 오후부터 시작해서 우리로 하면 주일 아침까지 막달라 마리아는 깊은 슬픔에 빠져서 빨리 안식일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한 막달라 마리아는 더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무덤 앞을 막고 있어야 할 돌이 저만치 굴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것이 분명합니다. 큰 충격과 당황스러움 속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그러니까 요한에게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보고 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 갔는데 누가 어디로 가져갔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그 길로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도착은 요한이 먼저 했지만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만 언뜻 보았을 뿐, 요한은 도저히 무덤으로 들어가서 확인을 할 용기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도착하자 마자 무덤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세마포가 잘 정리되어 놓여 있었고,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다른 곳에 놓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뛰어들어가자 요한도 따라 들어와 똑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제서야 요한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그냥 집으로, 그러니까 그들이 머물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9절은 이러한 이들의 행동에 대해서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알지 못하더라’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그 때까지만 해도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이 말의 뜻이 액면 그대로라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시몬 베드로, 그리고 요한.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또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까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구요. 그래서 만약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굉장히 여러차례 해 주셨다고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고, 그 때 하셨던 말씀 그대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물론 9절을 기록된 말만으로 보면 제자들이 몰랐던 것은 구약에 나와있는 메시야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몰랐다고 해서 꼭 빈 무덤을 보면서도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해 주신 말씀까지도 기억하지 못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까지 모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뜻은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 요한이 아얘 부활에 대해서는 아얘 생각조차 못하는 상태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8절에는 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와서 무덤 속을 살펴본 후 ‘믿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뭘 믿었다는 이야기일까요? 물론 그제서야 마리아의 말을 믿었다는 이야기인 것이 분명하지만 본문은 묘하게도 요한이 무엇을 믿었다는 말을 생략하고 기록함으로써 나중에 요한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믿었습니다. 믿기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었습니다. 이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 요한은 지금 자신의 실패를 예로 들면서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아주 여러 차례에 걸쳐서 예수님의 죽음 뿐만 아니라 부활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신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 분명히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있으심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와 제자들은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모두가 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오래된 사고방식이 바뀐다는 것은 정말 너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고방식이 새로워지기 까지 그 사람은 참된 신앙을 가지지 못합니다. 아무리 오래 교회에 다니고 또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믿기 전의 옛날의 사고방식을 떠나지 못하면 그는 옛날의 세상에 사는 옛날 사람이지 새사람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은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나아가서 그것을 떠나고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참된 신앙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방해를 받을 수 있는지도 알려 줍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질 때도 우리의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하지만, 그 신앙이 성장하고 또 성숙해 가기 위해서도 우리의 사고방식은 바뀌어야 합니다. 첫번째 사고방식의 변화를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반드시 해야만 하는 큰 회개라고 한다면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과정, 더 확고해지고 든든해져 가는 과정에 꼭 필요한 사고방식의 변화는 작은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회개가 필요하다면 두번째 회개도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대개는 그 필요성을 모르고 그냥 예수믿은 것으로 만족합니다만 두번째 회개, 작은 회개가 없으면 그 사람은 참으로 믿음 안에 거할 수도 없고, 믿음의 진짜 능력을 맛볼 수도 없습니다. 


작은 사고방식의 변화란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이제는 내 생각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생각하는 변화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틀에서 생각하고 평가하려고 하는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제자들의 예를 든다면 그들은 상식수준, 일반적인 수준에서 본다면 맞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무덤이 열려있고 시신이 없다면 누가 훔쳐간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렇지만 그들의 생각 속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증거를 보면서도 부활을 생각하지 못했고, 또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판단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틀 속에서 생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항상 상식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삶과 경험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진짜 의미는 놓쳐버리고 그저 보이는 것만을 보면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서 나올 수 있는 반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일을 보고 생각하며 판단할 때, 익숙해져 있는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생각한 후에 그 다음에 생각하면 그런 상식적인 판단을 넘어서서 내 삶과 경험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되고, 일들의 본질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는 첫번째와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내가 전부이고 내 경험이나 조건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자리’를 비워놓고 생각할 줄 아는 변화입니다. 세 사람이 빈 무덤 앞에서 그들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똑같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결론과 반응을 내놓았던 것은 아직도 그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성숙해 가고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반응을 보일 수 있으려면 항상 ‘하나님의 자리’를 남겨놓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상황은 그렇고 조건은 그렇지만 그래서 도달하게 될 결론도 정해져 있지만 만약 거기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앙이 가능성, 신앙의 능력이란 바로 여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리’를 알고 항상 그것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은 그래서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며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빈 무덤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의 시신이 도둑맞았다고 생각할 때, 나는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고 확신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내 생각이나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결정적인 자리’를 내어드리고서 생각하는 연습을 할 때, 우리는 빈 무덤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절망의 자리에서도 소망과 은혜를 보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또 하나님의 큰 자리를 바라보심으로써 우리 삶의 안식 후 첫날 같은 시간을 부활절로 바꾸어 가시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