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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5.29. 수요저녁 -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린도전서 3)

     

고전0104to09 -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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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고린도전서 1장 4절 - 9절


우리는 앞 서 두 번에 걸쳐 사도 바울이 끝까지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고, 그 교회의 목회자로 서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의 성도들을 진실로 형제요 자매, 그러니까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으로 사랑했고,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 특히 교회를 바라볼 줄 알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 서로를, 그리고 이 땅에 있는 교회를 바라볼 때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성도들이 서로를 몸된 교회의 지체로 부르면서도 여전히 큰 아픔과 갈등, 그리고 때로는 서로를 향한 미움과 분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인간적인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중에도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비결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눈이 달라지면 됩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연습을 하며, 그래서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그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만큼, 우리는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더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를 향한 견고한 소망을 품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조금 긴 인사말을 끝마친 바울은 본론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이 구절은 실은 우리를 굉장히 의아하게 하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우리 눈에 그야말로 엉망으로 보여지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그 교회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저 인간적인 충성심이나 애정 그리고 신념도 때로는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고, 앞에서 말씀드린 그런 이유들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가 되어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문제투성이의 엉망진창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그 교회로 인해서 항상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이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렇다고 해서 항상 싱글벙글 웃으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기도드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아픈 마음을 가지고 눈물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충분한 부족하고 거친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만큼 그들을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언제나 그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부족한 것들보다 이미 있는 것, 이미 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들을 먼저 그리고 더 크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결점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 그래서 지금도 그들에게 있는 은혜를 바라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긍정’이라는 말이 그야 말로 대세이고 진리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뻔히 눈에 보이는 현실과 사실을 무시하고 너무 가볍게 취급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맞는 것을 맞다고 하고 틀린 것을 틀리다고 하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어려우니까 틀린 것, 아닌 것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애써 현실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려고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긍적인인 태도는 그런 것은 그렇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할 것에 대해서는 ‘예’라고 하고, ‘아니요’라고 해야할 것에 대해서는 ‘아니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는 이렇게 하면서도 참으로 긍정적일 수 있는 충분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없는 것과 부족한 것을 보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들, 그래서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함께, 그리고 우선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이야 말로 문제와 결함을 확실히 인식하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우리를 여전히 소망가운데 든든하게 해 주고, 부족함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런 부족함과 결함들은 메꾸고 보완할 수 있는 출발점과 해답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미 고린도 교회에 주셨고 또 지금도 머물러 있게 하시는 은혜를 보았습니다. 비록 그들의 죄와 결점때문에 많이 가리워졌고 손상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 속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변함없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은혜들을 통해서 결코 고린도의 성도들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신앙에 상처를 줄만큼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가진 성도들도 있습니다. 도저히 믿는 사람이라면 저럴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물론 우리는 사람의 밝은 면을 보아야 한다는 미명 하에 그들의 부족함이나 결함까지도 없다고, 아니라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렇다고 평가하는 것은 정직한 것이고 꼭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섣부른 정죄나 비난, 그리고 경멸로 이어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할 때 남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절망과 포기 그리고 분노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문득 문득 고개를 쳐들고 우리를 괴롭고 힘들게 하는 부족함과 결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스스로도 자신을 향해 고개를 젓게 만드는 못된 구석들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 정죄하고 비난하며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해서도 안되고 자기비하에 빠지거나, 자신에 대한 거듭되는 실망 때문에 아예 성도다운 삶에 대한 관심과 열정까지 포기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믿는 우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아야 하며, 여전히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건 나 자신이건 혹은 교회이건 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지금도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고 여전히 사랑하시며 다듬어 가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 증거에 집중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을 보기 전에 그 증거를 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모습을 전부로 여기며 그것을 보고 정죄하고 좌절하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눈에 보이는 그 모든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소망을 둘 수 있으며 가야할 바른 길을 계속해서 갈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증거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풍성한 은사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은사를 통해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고 또 그들에게서 소망을 거두지 않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고, 거기에 자신의 눈을 일치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회에 영적인 은사들을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린도 교회는 언변과 지식에 특별히 큰 은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이런 은사들을 풍성하게 주신 데에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온갖 이방신들과 이방철학이 판을 치는 도시였고, 고린도의 성도들은 그 안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언변이란 그 내용을 가장 적절한 언어로 효과있게 증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이 두 가지 은사를 특별히 풍성하게 주신 이유는 이것이 이들을 위해서 그만큼 더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고린도 교회는 그 어느 교회보다도 거센 외부의 사상적이고 신앙적인 도전을 이겨내야 했고, 그러는 동시에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믿는 복음을 그만큼 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고린도 교회가 여러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형편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 두 가지 은사는 풍성하게 누리고 있었고 그 은사들 덕분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로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며 은혜를 주고 계신다는 증거로 보았고 그래서 그들을 보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언제나 풍성한 은혜 가운데서 바람직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겠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가 여전히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에게 꼭 필요한 은혜를 허락하고 계신다는 증거가 있게 마련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아, 저 사람은 작고 미미해 보이지만 바로 저 은혜 때문에 그래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구나’하게 생각하게 하는 그런 은혜가 보이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은혜를 통해 그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볼 때, 그것이 우리 교회이든 다른 교회이든 간에 여전히 그 교회를 붙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게 주시는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정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족함과 부정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교회를 사랑하며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꼭 필요한 은사를 지닌 사람들을 남겨 두시는 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사람들을 찾을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사람들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증거를 보게 될 것이고, 그래서 계속해서 소망과 감사가 넘치는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는 소망이 있죠? 분명히 소망이 있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근거로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여러가지 증거들이 있지만, 우리 교회에는 빠듯하기는 하지만 꼭 필요한 은사를 지닌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성도들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니, 감사해야 하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런 은사를 통해 은혜를 증명해 보이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 줍니다.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본문에 나오는 은사가 지식과 언변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 안에서 견고케 된 것이 그리스도의 증거라고 한정지어 말하고 있지만, 이것을 다른 모든 은사들로 확대해 보면 각각의 은사가 제대로 사용되어지면 교회는 모든 면에서 흔들림이 없는 든든한 교회가 되어가게 되어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가고 또 세워져 있게 하시기 위해서 각각의 교회에 가장 적절한 은사를 주십니다. 그래서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모든 면에서 흔들림 없는 교회로 만드시려고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사라는 것은 성도라는 벽돌들을 견고하게 연결하여 하나님의 온전하고 든든한 성전이 되게하는 시멘트와 콘크리트인 셈입니다. 은사를 통해서 성도들이 서로 견고하게 연결되어질 때,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써의 온전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교회가 모든 면에서 흔들림이 없는 든든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바로 그 바램을 은사라는 특별한 은혜로 나타내십니다. 또 하나 교회는 든든히 지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 오실 때까지 결코 무너져서는 안됩니다. 이것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은사는 바로 그렇게 끝까지 견디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 위에 풍성하게 주어져 있는 은사를 보았고, 그래서 그 은사 안에서 그 교회가 다시 든든하게 세워질 것이고, 또 주님 오시는 날까지 견디어 낼 것을 기대하면서 감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드릴 때마다 감사할 수 있었던 마지막 이유,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나아갑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현재나 미래에 대해서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와 그 은혜의 증거인 은사도 있고, 그 은사의 선한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해도 과거와 현재가 결코 미래를 완전히 보장해 준다고 믿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끝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통해서 성도로서의 우리의 미래와 교회의 미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이 영원하시듯이 결코 변질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성도로 부르시고, 자녀로 부르셨으며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신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가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와 온전한 교제를 하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그 부르심을 취소하시거나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려고 치르신 대가만 보더라도 우리는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서 내주실 수 있는 모든 것, 아니 전부를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게 할만한 무엇이 우리 속에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연약할 때,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 그 때 우리를 부르시고 자녀삼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밖는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런 그 분이 이제와서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우리의 모습만 보면, 우리의 현상태만 보면 도무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들로 그 분 앞에 서게될 것을 확신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고집으로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길에 서 있기만 하면, 은혜에 의지해서 믿음으로 그 분의 뒤를 따르려고 애쓰는 일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 분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당시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런 수많은 문제와 갈등, 분열 속에서 신앙생활하면서 행복했을까요?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에게 확실한 소망을 둘 수 있었을까요? 분명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그들이 만들어낸 모습 속에서 그들 자신도 절망하고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았고, 그들도 자신처럼 없는 것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교회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보이는 것만을 보고 그것만 믿는 교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증거들과 그 증거들이 가리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을 향한 바울의 고백은 바로 그런 그의 소원을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교회들도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나름대로의 죄와 결함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의 성도들을 완전히 만족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성도들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하고, 심지어는 믿는 일에까지 회의를 갖게 하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비록 자신들이 그 모습을 만들어 내기는 했어도 그 속에서 자신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더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다 그러려니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애써 그런 현실에 그저 적응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회복의 소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런 교회들이, 이런 성도들이 끝까지 스스로를 견고하게 지켜 주님 오시는 날 흠없고 티 없는 자로 그 분 앞에 서는 교회와 성도들로 만들어져 갈 가능성은 어디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있습니다. 그 음성에 마음과 생각을 고정하고, 믿음과 소망의 닻을 거기에 내리는데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여전히 은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우리는 그 은혜와 은사를 통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주신 목적에 알맞게 사용하며 그 안에서 견고하고 성숙하게 스스로를 세워나가려고 애쓰면서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도 안되는 것은 어쩌냐구요. 그건 하나님께 맡겨야죠. 우리를 끝내 그 분 앞에 흠없는 자로 세우실 하나님의 미쁘심에, 그 신실하심에 기대를 걸어야죠.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영원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고, 그 신뢰를 결코 깨뜨리지 않으시는 완전히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럴 마음도, 그럴 능력도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그리고 교회에 모습에 완전히 만족하고 완전히 행복해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주 아파하고 많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기억하시고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우리에게 신실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살아있고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성도들과 교회에 계속해서 소망을 가질 수 있고, 결국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미쁘시다”고 큰 소리로 외치는 바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 목소리가 들려주는 약속에 소망을 두시고 다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언제나 하나님의 미쁘심에 믿음과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흠없고 티없는 성도들로 주님 앞에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