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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6.09.주일오전 - 목자 없는 양같음으로 인하여2(마가복음 30)

막0635to44 - 목자 없는 양같음으로 인하여2(마가30).pdf


20130609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6장 35-44절


사람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들은 진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놓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또 알기는 알아도 굉장히 뿌옇게만 알고 있어서 막상 비슷한 것들이 섞여 있을 때는 진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것을 선택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영적인 필요가 충족되는 것이지만 예수를 믿기 전에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영적인 것이며, 그래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영혼의 필요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욕심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물론 몸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몸의 필요를 채워줄 물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못합니다. 따라다닌다고 얻을 보장도 없을 뿐더러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진짜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만약 이런 것에 우리의 만족과 행복이 달려 있다면 이런 것을 얻은 사람들은 다 만족하고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많습니다. 많이 가졌는데,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는데 오히려 그 이전보다 더 허무하고 무의미해지고 허전해서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또 얻고 보니 그제서야 그것이 자신이 찾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굳이 열심히 찾지 않으려고 하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지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아시고 또 그 필요한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우리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영혼을 지닌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호주머니처럼 무언가를 잔뜩 가져다 넣는다고 꽉 채워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영혼은 호주머니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물질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영혼은 영적인 것으로만 가득 채울 수 있고, 영원한 것, 그리고 영원히 가치있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약속해 주는 말씀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기뻐한다고 했던 것, 그리고 그 말씀이 꿀송이보다도 더 달다고 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는 그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군중들을 붙들고 오랜 시간을 들여 하나님의 여러 말씀을 들려주시고 또 들려 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들을 진짜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주시려고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그 영혼을 만족시키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또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그 약속에 여러분의 믿음을 더하는 일을 통해서 여러분의 영혼이 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제서야 우리가 원하는 물질들도 우리에게 참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고 또 부작용이 생기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만족을 알 때라야 물질을 섬기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만족을 찾기 전에 꼭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여러분의 영혼의 만족을 먼저 찾으시기 바랍니다. 얻을 때까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인 것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만족을 찾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몰라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분명히 찾는 자에게 찾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군중들의 영적인 허기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러는 동안 시간이 많이 흘러서 저녁식사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육체적인 허기였습입니다. 먼 곳에서 아무 생각없이 달려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먹을 것을 챙겨오지 못했습니다. 남자만 50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그것도 들판에서 갑자기 먹을 것을 공급하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제자들은 너무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그래서 최선의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예수님,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픈 것 같은데, 여기는 빈 들이고 또 해도 저물어 가니 사람들을 가까운 마을로 가서 사먹게 하시죠?” 그렇게 빨리 이런 기가 막힌 해결책을 내놓은 제자들은 얼마나 뿌듯했을까요? 우리가 보기에도 정말 칭찬할만하지 않습니까? 가능한 단 하나의 해결방법을 찾아낸 것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정말 우리 표현대로 황당하기 그지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재빨리 주판을 퉁긴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어치의 떡을 사올 수 있겠습니까?”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안된다는 것이고,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그 당시 하루 품삯이었고, 당시 한 가족의 하루치 생활비였으니, 계산을 해 보면 한 가족을 네 명으로만 잡더라도 그 당시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2만 4천명쯤되었던 것 같습니다. 2만 4천인분의 떡이라면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서 갑자기 구할 수 있는 양이 아닙니다. 요즘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 양의 떡을 한꺼번에 주문한다면 갑자기 생산해 낼 공장이 있을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그런데 돈도 없으니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 중에서 누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면 훨씬 더 원색적이고 심한 말로 욕을 먹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제자들이 돌아가서 이리 저리 알아보았지만 그 당시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딱 한 사람 먹을 양 밖에 없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는 그대로 시큰둥하게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을 잔디 위에 떼를 지어 앉히거라.” 영문을 몰랐지만 제자들은 한 참을 걸려서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습니다. 무리들을 100명이나 50명씩 떼를 지어 앉혔습니다. 푸른 초장 위에는 양떼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모여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모여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더 당황했습니다. 사람들이 앉자마자 예수님께서 일어서시더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높이 드시더니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신 식탁에서 배불리 먹고 마시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 당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가 담긴 바구니에서 음식을 꺼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꺼내고 또 꺼내도 음식이 줄어들지를 않았습니다. 그 바구니에서는 거기 모였던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때까지 끊임없이 음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먹다 지쳐 더 이상 못 먹게 되었을 때, 남은 것을 모아보니 그것만 열 두 바구니였습니다. 다시 한 번 이스라엘 열 두 지파,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베불리기에 충분한 양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44절은 이 이야기의 결론을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라는 말로 별 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 사건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일까요? 


예수님은 그 들판에서 자신을 찾아온 목자 없는 양같은 자기 백성들을 영적인 양식으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들을 떡과 물고기로 배불리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날 그 들판에서 진짜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날 거기서 그렇게 많은 자기 백성들을 영적인 양식과 육신의 양식으로 그렇게 베불려 주셨을까요? 여러분은 이 사건이 진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이것을 믿는 우리는 이제 어떤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이 일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 날 거기서 예수님께서 이 일을 진실로 행하셨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백성들의 영혼의 필요와 몸의  필요를 무시하지 않으시며 목자가 양떼를 굶기지 않듯이 먹여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우리 영혼의 구주일 뿐만 아니라 우리 현실의 주인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해 주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거기서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소개해 주신 후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먹는 것, 마실 것, 입는 것. 이 세 가지는 인간의 걱정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필요를 알아도 내게 없는 것은 줄 수 없습니다. 가지고 있어도 줄 수 없는 위치에 있으면 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자녀에게 뭐가 진짜로 필요한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 완벽하게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전능하시며 어디든지 계시기 때문에 꼭 필요한 순간에 꼭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한 번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이어져 왔습니까?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이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 중에서 한 가지라도 빼놓으셨다면 지금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변치 않으시는 신실한 분이시니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다 챙겨주신다는 믿음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이렇게 이어져 왔다면, 만약 우리가 정말 우리의 완전한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더 풍성하고 은혜가 넘치겠습니까? 일단은 우리가 그 동안 믿음의 눈이 없어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간 은혜들을 은혜인 줄 알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은 훨씬 더 풍성해 질 것입니다. 또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 주시는 선물이니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신실하신 공급자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진짜로 우리의 삶이 그 분의 능력과 공급하심 속에서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손에 일인분의 도시락을 손에 들고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시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어차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그들을 먹일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번에 주님은 스스로 이 일을 해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써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로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적은 것을 손에 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먹여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말도 안될만큼 적은 것을 손에 들고도 그렇게 감사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족하다고 해서 불평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부족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이 있다면 부족한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부족한 것으로도 충분히 먹이시고 충분히 일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그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이 믿음이 부족했지만, 그 부족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리의 공급자가 되주셔서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셨던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안다면 우리는 미래에 만날 우리의 부족도 그런 식으로 해결해 주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그래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결코 믿음을 모른 척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통해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라는 것이 별게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서만 반응하는 것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라면 항상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크고 결정적이신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결정적으로 일하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들을 먹이시지 않으시고 처음에는 제자들에게 그 사람들을 먹이라고 하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하셨으면 간단하셨을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다녀온 직후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 보고로 전도실습이 다 끝난 줄 알았지만 실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실습은 아직 남겨져 있었습니다. 첫번 전도여행에서 제자들은 주님의 권능으로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는 사람들로부터 공급을 받아서 생활의 필요도 넉넉하게 채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는 약속이 틀림없는 약속이라는 것을 현실 속에서 경험한 아주 중요한 실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아직 한 가지가 실습이 더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다면 자신들의 필요가 아니라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다른 사람들의 필요는 과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실습이었습니다. 


저녁, 들판, 24,000명의 굶주린 사람들... 상황 자체가 이미 그들의 실습이 시작된 셈이었습니다. 첫번째 문제를 푸는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냥 상식수준에서만 그 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힌트를 주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황당했지만 사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힌트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맞딱뜨리게 되면 이렇게 해야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힌트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판만 퉁기면서 숫자놀음만 했습니다. 그 답 또한 상식적으로는 정답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째 힌트를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아무리 많은 떡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24,000명을 먹일만큼의 양에는 턱없이 못 미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 또한 가지고 있는 떡의 양 자체에 대한 이야기일 수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보나 마나니까요. 그런데 제자들은 그렇게 알아듣고는 양을 알아보고 와서 수치만 보고합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마지막 힌트까지 다 놓쳤고, 그 때까지 정답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답을 알려 주십니다. 그 정답은 바로 그 적은 것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체험학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손으로 사람들에게 떡을 나눠주게 하심으로써 그 단순한 행위, 적은 것을 붙들고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직접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예수님을 대신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돌보고 인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과연 자기 힘으로 가능할까요?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 줄 수 있을까요? 이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원래부터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주어라’라고 하신 말씀은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질문이며 도전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될텐데, 너희들은 그 때 어떻게 하겠느냐?”하는 질문 말입니다. 제자들은 그 때 깨달아야 했습니다. “아차! 우리가 예수님을 놓치고 있었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다시 예수님께 되돌려 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가진 것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셔서 하신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진 것이 얼마나 적은지를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서 하신 질문이었고, 거기서 스스로 답을 찾게 해 주시기 위해서 주신 힌트였습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항상 이런 상황에서 일하게 될 것입니다. 항상 필요한 것보다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하며 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나 또 교회적으로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디서 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바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거기서 시작해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제자들이 그것을 들고 예수님께로 와서 그것을 예수님께 다 드리면서 ‘나머지는 알아서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예수님께 맡길 것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정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유일한 방식이고 또 소명을 감당하게 해 줄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최선을 다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나태하게 있고 책임을 다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다 하실꺼야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뻔뻔함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들에게 맡겨진 우리들의 몫입니다.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 하나님께 맡겨도 되는 것은 그 나머지 부분입니다. 그러면 부족해도 좋습니다. 때로는 아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도 좋습니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하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통해 일하십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목회란 사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 인간에게 맡져긴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여러분, 목회란 무엇입니까?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여러분을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돌보며 또 풍성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돌보는 역할은 할 수 있습니다. 인도하는 역할도 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그 역할 자체가 여러분의 영혼을 성숙시키고 풍성하게 해 줄 것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관한 한 인간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영혼도 제대로 챙기기 힘든 게 솔직한 현실인데 어떻게 남의 영혼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한 영혼이 성숙해지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직접 하셔야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목회란 역할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지 몰라도 그 열매를 생각할 때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일인 셈입니다. 이것이 제가 목회를 하면서 알게된 목회의 어려움이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여기에 목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답도 숨어 있었습니다. 내가 다 하려고 한다면 내가 가진 것으로만 해야 하는데, 내가 가진 것은 항상 오병이어 같은 것이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결국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그 별 것 아닌 것,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내개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 오병이어로 24,000명을 먹이고 넉넉히 남기실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답이고, 저는 이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목회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개인적인 삶이나, 목회나, 그리고 우리가 협력하여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이나 모두 다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결국 그 모든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공급자는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 우리의 재능, 우리의 은사, 우리의 물질...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최선과 전부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며, 그것을 모두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살며,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또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그 별 것 아닌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며, 그것도 넉넉하게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형편없이 부족하지만 때로는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그것을 통해서 일하실 것이라는 믿음, 그것을 예수님 손에 들린 오병이어처럼 사용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족한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아얘 없는 것같은 상황에서도 감사로 살고 감사로 일할 수 있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목자 없는 양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개인적인 삶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또 교회가 세상을 향해 마땅히 행해야 할 소명에 있어서도 모자라고 부족해서 살 수 없고, 또 일할 수 없는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영적인 은혜도 주실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필요도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을 확실히 믿고서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우리가 가진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별 것 아닌 우리의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의 풍성함과 또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최선을 다하며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적은 것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오병이어 밖에 없는 우리가 개인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원리입니다. 또 교회가 움직여 가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항상 이 원리대로 살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교회 안에서 이루시는 풍성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