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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6.28. 금요기도회 -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사도행전 19)


행0301to10 -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사도행전1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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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사도행전 3장 1-10절


    오순절의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후에 제자들이 선포한 복음 덕분에 하루에 3000명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그래서 교회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놀라운 것은 그렇게 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이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처럼 붙들고 살았던 물질을 내려놓고 그것을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한 섬김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성도들은 참된 교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교회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시작했고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 복음을 실은 강력한 메세지가 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들어오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일으킨 장본인이었지만 사도들은 전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머무는 곳은 예루살렘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사도들의 일상생활은 여느 유대인들과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날과 똑같이 제 9시, 그러니까 오후 3시 기도시간에 맞춰서 기도하기 위해 다른 유대인들과 섞여서 성전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지나던 그 길을 지나서 말입니다. 때마침 사람들이 성전으로 향하는 시간에 맞추어서 성전으로 가는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매일같이 같은 시각에 성전으로 향해 가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성전 안으로 들어가거나 기도를 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성전을  향해 가는 목적이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40년 동안이나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그래서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도 그는 다른 날처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성전의 가장 아름다운 문인 미문 앞으로 옮겨졌고, 거기 앉아서 구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곳은 그 사람이 항상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앞을 지나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는 베드로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와서 거주한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기도를 드리러 올 때마다 만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다른 날은 그냥, 때로는 손에 있는 동전 몇 푼 던져주고 불쌍하게 여기면서 지나쳤을지도 모르지만 그 날은 베드로와 요한의 눈에 이 사람이 전혀 다르게 보여졌습니다. 두 사람은 이전과는 달리 성령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항상 하던대로, 또 사람이 지나가니까 무의식적으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손을 내밀었을 것입니다. 눈은 그들의 주머니와 손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입니다. 그런 그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 여전히 몇 푼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두 사람을 올려다 보는 그 사람에게 베드로는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 사람에게 이것보다 더 실망스러운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요? 아마도 순간적으로 화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줄 돈도 없으면서 쳐다보라 마라 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생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뭐라고 말했는지 자기의 귀를 의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는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서 자신에게 뻗쳐오는 손을 자신의 오른 손으로 붙잡았고, 그러자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는 천천히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손을 잡자마자 그는 개구리가 뛰어 오르듯이 펄쩍 뛰어 올랐습니다. 그렇게 일어 섰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뛰어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도 굉장히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을 향해서 ‘우리를 보라’고 하였고, 그 한마디 말로 부터 이 모든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보라!’ 제가 본문을 묵상할 때, 이 말은 저를 한참 동안 붙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를 보라!’ 얼마나 당당하고 분명한 말인가? 그렇다면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누군가를 향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교회는, 그리고 한국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우리를 보라!’고 스스럼 없이 외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계속해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와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이 그랬듯이 사람들과 세상을 향해서 ‘나를 보라!’고,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모습으로 살며 존재해야 합니다. 때로는 세상이 그것을 모르고 있더라도 스스로는 그럴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걸인이 자기들을 바라보았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사람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회자요 또 한 사람의 성도로서 베드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나도 저런 이야기를 자신있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도들에게 나를 보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또 그렇게 성도들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우리 성도들이, 그리고 한국교회가 주변 사람들과 이 세상을 향해서 그렇게 외칠 수 있고 또 그렇게 세상과 사람들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간절한 소원이 저절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전체까지는 몰라도 저 자신은, 그리고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외칠 수 있는 날을 충분히 맞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충분한 가능성과 또 그리로 갈 수 있는 길을 오늘 말씀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절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가능성을 우리를 위한 가능성으로 붙잡고 또 그 길을 따라가야만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능성만큼은 충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걸인은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걸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돈 몇 푼만이 들어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과 또 얻을 수 있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두 사람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 걸인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돈 몇 푼이 아니었습니다. 걸인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것을 주기로 했고, 그것을 주자 걸인에게 다른 것들은 더 이상 필요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도 그리고 때로는 우리 자신도 이럴 때가 많습니다. 진짜로 필요한 것은 따로 있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을 붙들고 그것만 구하고 거기 목숨을 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필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 얻으면 됩니다. 그것만 가지면 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에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물론 두 사람에게 돈이 있었다면 돈도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돈이 없었고 또한 그 걸인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두 사람은 그 걸인에게 진짜로 필요하고 그래서 진짜 도움이 되는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걸인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권능으로 그 사람을 일으키고 걷게 하고 뛰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를 보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우리에게 무엇이 있으면 당당하게 ‘우리를 보라!’고 세상을 향해서 외칠 수 있을까요? 돈일까요? 번쩍 번쩍 빛나는 큰 건물일까요? 많은 수의 교인들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힘일까요?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당당해 질 수 있고, 그러면 이 세상은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를 바라보게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많이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그런 것들로 사람들과 세상을 움직여 보려는 분들이 있지만 그것은 정말 정말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교회보다 세상이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교회보다 기업이나 권력자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로 당당해지려고 하고, 이런 것들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하면 교회와 성도는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있게 ‘우리를 보라!’고 ‘나를 보라!’고 외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때, 우리가 그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을 때, 그 때 우리는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서 그렇게 외칠 수 있고 그들은 우리에게서 자신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를 보고 또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걸인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을 때,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우선 그는 걸었습니다. 여러분, 깁스를 해 보신 적이 있으시죠? 아무리 건강한 다리를 가지고 계시던 분들도 1년만 깁스를 하고 있으면 그 다리에 근육이 다 빠져나가서 잘 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면서 부터 일어서지도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다리가 어땠을까요? 거의 자라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고, 자랐더라도 마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고, 근육과 살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그가 일어났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다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뼈와 마디가 자라고 펴져야 하고 힘줄과 근육이 붙어야 하고 살이 생겨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원활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일어날 수 있고 걸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에 걷고 달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앉아 있다가 뛰어오르는 일은 다리가 건강한 사람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인데, 40년 동안 전혀 일어서지 못했던 사람이 그렇게 했다니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히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얘 없던 다리가 다시 만들어진 것이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경은 그가 그렇게 뛰어서 들어간 곳이 성전이었고, 그리로 달려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뛰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한 일을 보고서 놀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자체가 굉장히 이례적이고 놀라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성전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구걸을 하던 그 걸인의 이전모습은 어땠을까요? 사실 그 사람은 매일 매일 가장 오랜 시간을 성전 곁에 머물고 있었지만 성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이란 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며 또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그저 하루 하루 연명하기 위해서 자지신의 약한 곳을 전부 다 드러내 놓고 구걸을 해야하는 절망과 수치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런 그의 얼굴에서 미소를 본 적이 없었을 것이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그는 속으로 항상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서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도록 만든 하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가 고침을 받고서 처음으로 한 행동이 성전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었고 또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중으로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한 순간에 평생의 아픔을 고침받고 온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완전히 새롭게 회복된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걸인의 모습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줄 수 있을 때, 그들에게서 일어나게될 놀랍고 아름다운 변화와 회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줄 수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최고의 것을 주는 것이며, 그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가 그 때 그 걸인처럼 우리가 내미는 손을 잡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그는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과 더불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는 무엇보다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는 예수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보고 우리를 보라!”라고 외칠 수 있을만큼 그만큼 예수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전도하려는 사람, 내가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성전으로 뛰어들어오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나면서도 부터 단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던 이 사람처럼 소망없이 현실과 절망에 묶여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일지라도 온전히 회복된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면 ‘내가 예수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본문의 걸인의 삶 속에 일어났던 그런 일들이 일어날 정도가 되면 됩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앉아있는 절망과 침체의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수 있고, 하나님의 지성소 안으로 기쁘게 뛰어들어갈 수 있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는 그런 정도가 되면 됩니다. 그 걸인이 예수님을 선물받고서 그의 삶에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면, 우리가 그 걸인처럼 예수님을 가지게 될 때는 우리에게도 그에게 일어났던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 자신이 이미 그런 은혜를 경험할만큼 예수님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은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는 것은 아직은 우리가 그만큼 풍성하고 충만하게 예수를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또 기뻐하고 충만해질만큼 그만큼 예수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할테니 나를 보아라!”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통해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를 통해 예수님을 선물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될 것입니다. 


    먼저 나에게서 온전한 변화가 일어날만큼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변화가 나부터 시작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또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