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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3.06.30.전교인기도회 -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2)


계0201to07 -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2).pdf


20130630SE (#01).mp3.zip




    본문 : 요한계시록 2장 1-7절



    오늘은 지난 4월에 이어서 우리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보내신 편지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도 오래되어서 앞 부분에 대한 복습을 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정말 정말 칭찬할만한 교회였습니다. 우선 에베소 교회는 정말 진리를 알고 또 믿는데는 확실하고 견고한 교회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모두가 다 목회자 이상의 실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악한 자들, 그러니까 믿기만 하며 된다, 행위는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설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면서 이런 저런 가르침을 퍼뜨리는 자들을 시험해서 스스로가 가짜라는 것을 드러내고 도망가게 할 정도로 정말 알고 믿는 일에 있어서는 분명하고 확실했습니다. 


    아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세 가지는 참된 신앙이 맺는 최상품 열매 삼종세트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행위는 믿음의 행위, 그러니까 믿음대로 사는 순종과 믿음을 지키기 위한 결단을 말하고 수고는 사랑을 위한 수고를 말하며, 인내는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환란을 참고 견디는 그런 인내를 말합니다. 정말 이런 교회가 정말 현실 속에서 존재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에베소 교회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교회에 속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든든하고 좋을까요? 이 정도면 아무 나무랄데 없는 교회가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엄청난 꾸중과 경고를 내리셨습니다.  5절을 보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나게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촛대를 옮긴다는 말, 많이 들어보셨죠? 바로 여기 나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촛대를 옮긴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요? 아마도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본문을 통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2장 1절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은 각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면서 그 편지를 보내는 예수님 자신의 모습을 다르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면서는 “에베소 교회에 있는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가로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곱 별과 일곱 촛대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1장 20절을 보면 이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 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여기서 사자는 천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모든 교회를 돌보는 천사들을 마음대로 부리시는 분이시며 또 그 교회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촛대라면 그 촛대를 교회에서 옮기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겠습니까? 그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이 꾸중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에베소 교회에서 몇 가지 은혜나 사명을 빼앗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더 이상 교회로 남아있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이상적인 교회에 대해서 이런 정도의 경고가 주어지게 하는 문제라면 그 문제는 아마도 교회에게는 가히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고, 교회에게 그렇다는 것은 성도 개인에게도 그만큼 중요하고 결정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까지 무시무시하게 경고하신 문제는 과연 무엇일까요? 2장 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 정도의 경고가 주어질 정도라면 엄청난 죄를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잘못이 지적되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그렇게 큰 죄라고 여겨지십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보호와 은혜를 거두실만큼, 하나님을 그렇게 진노하게 할 만큼 큰 죄라고 보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주님과 가졌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저 개인적인 차원에서 회복하면 좋고, 안 그래도 별로 상관없는 일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우리가 십일조를 떼어 먹은 것보다, 기도하지 않은 것보다, 거짓말로 남을 속인 것보다 주님 앞에서는 더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 만큼은 그냥 보아 넘기시지 못하실만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만드실 때에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나누어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속에 담아주셨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만드셨을까요? 왜 유독 사람만 그렇게 만드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같은 인격이 아니면,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속을 일관되게 나타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은 바로 “신랑과 신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독점적인 사랑의 관계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아내나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을 보면서 “잘 했어, 여러 사람 두루 두루 경험해 봐야지.”라고 칭찬하거나 심상하게 넘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철천지웬수 같은 부부지간이라도 그렇게는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부관계입니다. 


    또 고린도 전서 1장 9절은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시고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십자가를 지신 것은 바로 그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이유도, 그리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대신 죽게 하신 것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사랑을 위한 것이라면, 그 사랑을 저버리는 것, 그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것입니까? 특히 그 사랑을 한 번 경험하여 안 사람들이 그 사랑을 버리고 떠나고 잊는 것은 얼마나 심각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합니다. 인간적인 사랑과 애정이 넘쳤던 교회 속에, 진리 위에 굳게 섰던 교회 속에, 믿음과 행위가 균형을 이루었던 교회 속에도 이 사랑이 없을 수가 있을까요? 답은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겉보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교회일수록 이런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것, 진리 위에 굳게 서는 것, 믿음과 행위가 균형을 이루는 것…… 이 모든 것은 너무나도 좋은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있다고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가 빠지면 그 모든 것이 헛것이 되고 맙니다. 바로 처음 사랑입니다. 사랑장이라고 불리우는 고린도 전서 13장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천사의 말을 해도,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Nothing!”,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용도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혹시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꼭 있어야 할 것, 없으면 안될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처음 사랑이 없는 것을 문제삼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나를 처음 사랑으로 지금도 사랑하고 있느냐?” 처음 사랑은 헬라어 원어로는 아가페 프로토스입니다. 프로토스라는 말은 시간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첫번 것은 첫번 것이지만, 질적인 것을 말합니다. 굳이 우리 말로 번역을 하자면, “원형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격적인 사랑, 그 생생하고 풍성한 사랑을 말합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때의 그 사랑을 말합니다. 그 분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그런 사랑을 말합니다. 그 순수한 사랑,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던 그 사랑을 말합니다. 주님은 그 사랑이 아직도 너희 속에 남아있느냐, 너희는 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고 만족하냐고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보실 때, 그 사랑부터 보십니다. 여기 금반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금반지 윗쪽에는 무언가가 박혀있던 자리가 있습니다. 제가 그 금반지를 들고 여기에 10케럿짜리 금반지가 박혀있었으니 그 만큼의 돈을 지불하고 반지를 사라고 하면 여러분은 그 반지를 그 가격에 사시겠습니까? 왜 안사십니까? 지금 다이아몬드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은 바로 이 다이아몬드와도 같은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 빠져버린 신앙생활은 마치 다이아몬드가 빠져버린 다이아반지와도 같은 것입니다. 


    제가 성도들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면 과거 밖에는 이야기할 거리가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연세가 많으시면 어느 정도 이해하겠는데, 젊은 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너는 처음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신데, 나는 자꾸 “네, 주님 십 년전에는 내가 주를 정말 사랑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 그 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어떠냐?”고 물으면 “글쎄요, 주님 오년 전에는 그렇게 사랑했다니까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한 대화입니까? 신앙은 항상 현재형이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주님을 그 절절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느냐를 물어야 합니다. 항상 그 사랑을 체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꼭 회복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처음 사랑입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그 순수한 사랑, 마음에 주님 생각으로만 가득 찼을 때의 그 사랑, 그래서 주님 생각에 가끔은 너무 좋아서 멍하게 되는 그 사랑,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자다가도 웃을 정도의 그 사랑……… 이런 사랑으로 돌이가야 합니다. 바로 이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사랑의 회복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의 성도됨, 교회의 교회됨이 달린 믿는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고 충고합니다. 우리가 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까?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입니까? 어느 지점부터, 어느 때부터 이 사랑이 식기 시작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생각하고 그 원인을 찾아내십시오. 아무리 먼 길을 왔더라도, 다시 거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그 문제부터 해결하고, 거기서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었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실망시켰습니까? 목회자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었고 실망을 주었습니까? 성도들 때문에 낙심하셨습니까? 아니면, 저지른 죄가 너무 커서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처음처럼 주님을 사랑하지 못할만큼 너무 바빠지셨습니까? 그래도, 그래도 처음 사랑은 회복해야 합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사랑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을 끝맺으면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시겠다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을 보장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태초에 아담의 범죄때문에 먹는 것이 금지되었던 생명나무 열매를 다시 먹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들의 나라입니까? 누가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까? 바로 끝까지 이기는 자들입니다. 처음 사랑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끝까지 이기지 않으면,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지켜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중간에 포기하는 것, 중간에 흐지부지 해 지는 사랑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나에게서 처음 사랑을 빼앗아가려는 아무리 심한 방해가 있더라도, 그 사랑으로부터 나를 떼어놓을 수 있는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 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이그나티우스라는 교부의 기록에 의하면 다행히도 에베소 교회는 주님의 이러한 경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밝게 타오르며 빛을 발하는 촛대로 회복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님의 경고가 모든 교회들을 향한 경고라면 오늘 우리들도 이 경고를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밝게 빛나는 촛대가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 그 뜨겁고 순수한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회복하고 또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싸워야하고 그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으로 가는 그 날까지 승리하는 복된 교회,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