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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7.03.수요저녁 - 온전히 합하라(고린도전서6)

  

고전0110to17 - 온전히 합하라(고전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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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고린도전서 1장 10절 – 17절


    제가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운동은 이것 저것 많이 해 보았습니다. 한 동안은 탁구를 치는 일에 몰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쪽 다리가 균형이 맞질 않는 상태에서 탁구를 치다보니 아무래도 한쪽 다리에 무리가 가서 그런지 갑자기 왼쪽 무릎이 많이 아팠습니다. 젊은 나이에 무릎이 아프니 참 큰일이다 싶어서 한의원에 갔는데, 거기서 무릎이 아픈 것이 무릎에 문제가 생겨서가 아니라 허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래서 무릎을 치료받는 대신에 허리를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허리가 치료되니 무릎은 저절로 통증이 사라져 갔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이유를 듣고보니 탁구를 치면서 오랜시간동안 꾸부정한 자세로, 또 긴장을 해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썩 좋지 않은 허리에 무리가 와서, 허리에서 무릎으로 내려가는 신경을 눌러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모든 병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있게 마련입니다. 많은 경우 처음에는 그리고, 제대로 검사를 해 보기 전에는 그 증상을 나타내는 곳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증상을 없애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자세히 검사해 보면 그 증상은 그 원인이 영 엉뚱한 곳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심지어는 심장에 문제가 있으면 소화가 안되는 증상도 나타난다고 하니, 몸에 생기는 문제의 원인은 아픈 곳 자체에 있을 때도 있지만, 다른 곳에 있을 때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되는 곳의 질병을 고치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결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증상을 없앨 수 있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같은 증상이 더 심각하게 그리고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교회가 깨졌다느니, 또 어떤 교회가 갈라졌다느니 하는 소식을 너무 자주 듣고 살아 온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교회를 성장시키셨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또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중에서는 그런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교회의 갈등과 분열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에게는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이런 저런 다른 문제들이 더 크고 심각한 문제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는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분열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교회의 분열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조각 조각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분열되었으니 분열되기 전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냥 다시 하나되고 화해하면 됩니다. 그러면 끝납니다. 그래서, 바울도 10절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기 전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로 있어야 할 교회가 이리저리 나누어져 싸우고 있으니 다시 한 마음을 회복하고 하나가 되라”고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외상(外傷)이 아니라 훨씬 더 심각한 원인을 가진 속깊은 질병이었고 그래서 그 질병의 근본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진짜 회복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그들이 서로 그렇게 갈라지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그들이 가르침을 받고 또 그들에게 세례를 준 목회자들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사람을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세례는 그 사람들을 분열하게 했던 커다란 이유가 되었습니다. 가끔씩 보면 자신은 어떤 훌륭하고 유명한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세례는 누구의 이름으로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누가 주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례는 세례를 준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의 주인에게 속하고 그래서 그의 소유가 되게 하는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소유주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들은 서로 “난 이 사람에게 속했다, 난 저 사람에게 속했다”고 자랑하며 그 아무 것도 아닌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교회를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심이 다르면 같은 원을 그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다른 중심에서는 같은 원이 그려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원이 다르면 그 원들이 만나는 곳에서는 서로 겹치고 부딛히게 되어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서로 완전히 동떨어져 아무 상관없는 두 원이 되고 맙니다. 교회는 하나의 원이어야 합니다. 하나의 중심만을 가진 하나의 원 말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많은 경우 마치 교회가 특정 사람 중심이 되어도 여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듯이 그렇게 사람중심이 되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중심이 되면 교회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중심에 단 한 사람 밖에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다른 중심이 되고,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또 다른 원을 그리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에는 적어도 두 개의 원이 있게 되고, 그 두 개의 원은 계속해서 불협화음을 낼 수 밖에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지 몰라도 가장 깊은 곳에서는 그렇습니다. 


     바울은 11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문제를 지적하기 전에 먼저 10절에서 그 해결책 부터 알려줍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바울은 서로 갈라져서 다투고있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온전히 합하라”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교회가 하나된다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향해서 요구하는 하나됨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적당한 수준의 하나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같은 말을 할 정도로,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을 정도로 하나된 그런 하나됨을 요구하십니다. 대개는 어떻게 그런 정도로 하나가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것이고, 주관이 강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건 부당한 요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교회는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는 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고 순종하려고 애쓸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온전한 하나됨을 이루고 또 회복하려면 과연 우리는 누구를 기준으로 해야할까요? 누가 누구에게 맞추어야 이러한 하나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는 교회 안의 어떤 한 사람의 의견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알려주신 그런 정도로 말과 마음과 생각을 일치시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은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가지 말을 하고, 하나의 마음과 생각을 품으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우리 중의 어떤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한 가지 말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한 말을 의미하고, 하나의 마음과 생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아 온전한 하나됨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분열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말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부르는 이름 중의 하나같아 보이지만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그 분의 피값으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인이 아닙니다. 다른 그 누구도 주인으로 삼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며,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왜 분열되고 갈등합니까?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아주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바로 이 사실이 확실하게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의 왕과 주인으로 인정되지 않을 때, 반드시 그 자리는 그 누군가가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이 아니면 힘이 센 어떤 사람이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몇몇의 훌륭한 목회자를 중심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자리를 차지한 듯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실은 그런 목회자들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기대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고 또 중심이 되지 않을 때,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성도들은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까? 물론 삼위 하나님의 세분 모두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누구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누구와 연합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성도를 위해서 생명을 값으로 대신 지불하시고 대속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의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가장 확실하게 알아야 하고 또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을 불렀으며, 누가 자신을 구원했고, 나는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누구를 믿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고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이 실은 사람을 중심으로 삼기 시작한데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심을 떠났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진단했고 그 진단은 가장 정확한 진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신앙이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단 한 가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선한 것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그런 좋은 것들이 다른 곳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면서 그것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또 그런 것들에 기대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게 됩니다. 그게 사람이든, 인간관계이든, 직분이든, 프로그램이나 심지어는 특별한 영적인 체험이든 은사든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백이면 백 나중에 어젠가는 갈등과 분열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됩니다. 


     조금 넓게 생각해 보면, 비단 교회 내의 갈등과 분열의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의 신앙이 정상궤도를 이탈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왜 영적인 열정을 잃어버립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신앙의 중심되시는 것과 모든 것 되신다는 사실을 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좋은 것들’을 찾고 얻기 위해 그런 것들을 중심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긋나갑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꾸 다른 곳에 시선을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빠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여기에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지 않고 자기 열정과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곳만을 찾으니 이단이든 뭐든 분별없이 빠져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심을 지킨다면 사실 이단들도 거의 발 붙일 곳이 없어지고 맙니다. 


     성도의 문제, 교회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대개는 이렇게 바른 중심에서 벗어나서 다른 원을 그리려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의 한 가운데 교회분열의 문제가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분열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떠나서 정상궤도를 이탈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개인신앙에 생긴 문제들이 곪고 곪아서 교회의 분열이라는 모습으로 불거져 나왔기에 그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조각퍼즐을 맞추다 보면 어느 순간에 꽉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게 단 한 조각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한 조각을 엉뚱한 자리에 끼우거나 한 조각의 제자리를 찾지 못해서 그렇게 끙끙거렸던 것입니다. 그 조각을 제 자리에 가져다 놓으면 그 다음은 술술 풀리기 시작합니다. 일사천리로 완성을 향해 가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조각퍼즐에서는 바로 내가 그 조각입니다. 그 조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조각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그리고 사심없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으려고 애쓴다면, 서로 어긋나 있던 중심들은 서로 서로 조금씩 가까워져 갈 것이고, 하나 하나의 원들이 서로 부대끼는 부분들도 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바라 볼 때마다 서로가 그렇게 점점 온전한 그림의 일부로 맞아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렇게 원의 중심이 점점 하나로 모아지고, 그 복잡하던 원들의 얽히고 섥힌 선들이 하나로 합해져 가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흥분되는 일이겠습니까? 게다가 덤으로 이런 저런 교회와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까지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교회의 온전한 하나됨은 분명히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중심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 아닌 다른 것들, 특별히 나 자신이라는 중심을 떠나고 버려야 비로소 가능해 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것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되지 못함에 대해서 한탄하고 비판하지만 선뜻 하나됨을 위한 발자국을 떼지 못하는 것입니다. 버리고 떠나는 일에 대해서 지레 겁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으면, 그렇게 첫 발을 떼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으면 교회는 결코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안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것들을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젊은 부부가 현재의 풍성한 소비의 만족을 뒤로 하고 최선을 다해서 아끼고 저축하는 것은 나중에 작은 집 한칸이라도 마련하기 위해서 입니다. 부모가 지금 엄청난 인내와 희생을 달게 감당하는 것은 자녀의 더 나은 미래를 보는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넘치는 호기심과 욕망을 뒤로 하고 끙끙거리며 학업에 힘쓰는 것은 미래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모든 행복과 즐거움은 모두가 현재의 만족과 즐거움을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미래는 현재를 재료로 해서만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지금의 즐거움과 자유를 절제하고 유보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미래의 즐거움과 행복의 크기도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지금 내가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 아닌 것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더 크고 온전한 미래의 영적인 만족을 위한 잠시의 유보이며 가장 확실한 투자입니다. 나만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보지 않겠느냐는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라는 바른 중심으로 원을 그린다면, 그 온전하고 바른 원 안에 거할 수 있는 특권은 바로 나의 것이 됩니다. 내가 잘못된 자리를 떠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 나를 중심으로 다른 조각들이 착착 들어맞아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몰이해와 빈정거림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이미 나에게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바른 중심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과 기쁨이 넘치는데 말입니다. 


     혹시 내가 작은 일에서나 큰 일에서나 자꾸 다른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부딛히고 상처를 주고 받고 있다면, 그리고 자꾸 내 입에서 큰 소리, 거친 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다면 그만큼 나는 아직도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그럴 수도 있는 것, 다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고쳐져야 하는 것이며, 또 고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자꾸 자꾸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심으로 돌아가려는 연습을 하면 얼마든지 좋아지고 나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잠시 우리들을 돌아봅시다. 지금 내가 내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이, 그 분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이 내 신앙의 중심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가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바라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은 아닙니까? 고린도 교회를 다시 하나되게 하기 위한 처방, 성도됨과 교회됨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처방은 바로 그리스도를, 그 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처방에 순종할 때,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가장 아름다운 원을 그리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그 누구도, 다른 그 무엇도 신앙의 중심, 그리고 교회의 중심에 서게 해서는 안됩니다. 중심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분만이 중심이 되셔야 하고, 또 그 분만이 중심이 되실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다른 것이 중심이 되면 결국 그 피해자는 나 자신이 되고 또 우리 모두가 됩니다. 중심의 문제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이 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지고, 중심이 어긋나면 모든 것이 어긋나 버리고 맙니다. 그게 교회고, 그게 신앙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중심의 문제는 결코 바꾸거나 타협하거나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이외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소리치는 사도 바울의 절실한 권면을 받아들이셔서 언제나 중심을 잘 잡고, 그 중심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이 예수님만 바라보는, 예수님만을 믿음의 중심으로 두어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장 든든하고 풍성한 신앙생활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