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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7.07.맥추감사절 -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


시23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2013년 맥추감사절).pdf


20130707SM (#01).mp3.zip



설교본문 : 시편 23편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두 번의 감사절을 지킵니다. 하나는 추수감사절이고 나머지 하나는 오늘, 맥추감사절입니다. 어찌보면 이 두 개의 감사절은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조금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에 처음 건너갔던 청교도들이 자신들이 처음 거둬들인 곡식을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과 함께 나눠 먹으며 예배를 드린 날을 기념하여 미국에서 지켜지게 된 절기인데, 이 절기는 사실 성경의 절기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추수철과도 시기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추수에 대한 감사를 드리려면 추석즈음에 감사절을 정해서 지키는 것이 더 적당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추수가 열매를 거두어 들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거둬 들이는 열매는 농사의 열매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어쩌면 다른 열매들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고 또 한 해 한 해의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 해의 거의 끝에 놓여있는 추수감사절은 그 유래야 어떠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살며 또 한 해 한 해 그 인생의 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의미있는 절기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셨던 절기였습니다. 처음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를 통과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 첫번 추수를 하게 되면 그 첫 열매를 드리라고 명하시며 그 날짜를 정해주신 것이 맥추감사절, 정확하게는 맥추절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절기는 분명히 유대의 절기입니다. 게다가 유대의 추수 시기와 맞물려 있는 감사절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예수를 믿는 우리들과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절기이죠. 그런데 이 맥추감사절은 매년 7월 첫번째 주일이 됩니다. 그러니까 한 해의 절반을 지내고 다음 절반으로 넘어가는 첫번째 주일이 이 절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맥추감사절은 굳이 우리가 보리농사를 짓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져 지켜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하려고 하기 보다는 한 해의 한가운데 서서 지나온 시간들과 그 열매들을 감사하며 남은 6개월을 위하여 마음과 신앙을 추스린다는 의미에서 영적인 유익과 의미가 있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절기가 되니 문득 제가 예전에 감사에 대해서 묵상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왜 하나님은 감사하라고 하셨을까? 왜 하나님은 감사를 좋아하실까? 어릴 적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해서 감사는 은혜를 누리는 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은 어쩌면 감사를 통해 칭찬받으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라고 하셨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철이 조금씩 들면서 감사조차도 오로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허락하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감사는 모든 피조물들의 의무입니다. 생명도 그 생명유지에 필요한 것도 모두 하나님께 공급받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감사하게 될 때, 그 가장 큰 혜택은 바로 우리가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또 하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를 가정해 보겠습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꼭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 장난감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나오질 않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밥을 먹을 때만 잠깐 나왔다가 들어갈 뿐 그 장난감에만 푹 빠져 지냅니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불러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고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걸 친구들 앞에 내보이며 자랑만 합니다. 원래 이 장난감은 아버지가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 마음을 듬뿍 담아서 큰 맘 먹고 선물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아버지를 망각합니다. 그저 그 장난감이 좋아서 그 장난감만 생각합니다. 또 아버지는 아이가 그 장난감을 친구들과 함께 가지고 놀기를 바랬습니다. 귀한 것이니까 그것을 가지고 노는 기쁨을 친구들과 함께 누리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친구들이 그 장난감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자랑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그 장난감 때문에 자기만 생각하는 아이가 되고 교만해 지고 또 친구들에게도 상처만 줍니다. 아버지와 멀어질 뿐 아니라, 친구들과도 멀어집니다. 


이번에는 반대의 경우입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꼭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 마음을 헤아려 주었고 그래서 꼭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을 선물했다는 것에 대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장난감 속에 들어있는 아버지의 속깊은 사랑을 느꼈습니다. 세상에 그런 아이가 어디있느냐고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이런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그 선물을 볼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볼 때마다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아버지가 더욱 더 사랑스러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마음이 커져갑니다. 그리고 아이는 아버지가 항상 자신에게 해 주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좋은 것을 얻으면 없는 친구들과 나누어야 한다, 같이 놀아야 한다는 말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귀하고 좋은 것이지만 친구들과 함께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그 장난감 덕분에 아버지의 마음도 알게 되고, 그 아버지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친구들을 기쁘게 해 주면서 그 친구들과도 더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둘 다 조금은 극단적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 좋은 것을 받으면 위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 태도 중에서 한 쪽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특히 뒤쪽 보다는 앞쪽의 아이를 닮기가 쉽습니다. 사람은 감각적인 것에 굉장히 약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누군가가 좋은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처음에는 그 사람에게 감사하지만 이내 그 사람을 잊고서 받은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럴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갈 때, 그리고 무언가 어려움이 있을 때는 정말 하나님도 열심히 섬겼고 신앙도 참 좋았지만, 복을 받은 후에는 신앙도 흐려지고 심지어는 사람이 변했다는 소리까지 듣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한 선물이 우리에게 만들어 놓는 부작용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들은 참 좋은 것들입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우리가 그런 것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영혼을 위한 복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우리 삶에 독이 되는 것을 막아주는 예방주사가 바로 감사입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통해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주신 좋은 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영혼에 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 좋은 것을 얻게 될 때 감사합니다. 물론 영적인 내공이 올라가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되지만 대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주어질 때 감사의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감사는 우리가 무언가 좋은 것을 얻었을 때 주로 생겨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범하게 되는 실수가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감사가 그저 우리가 받은 좋은 것에 대한 감사에서 끝나버리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생각할 때,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감사는 원래 내가 얻은 좋은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에게 준 사람의 호의와 사랑에 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준 사람의 마음에 받은 사람의 마음이 응답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래서 참된 감사는 나에게 주어진 무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에게 준 사람과 인격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감사가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그 주어진 것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주어지는 것이 없을 때는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통해서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우리를 향한 세심하고 풍성한 사랑을 읽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런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다해 감사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면 비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당장 주어지지 않을 때에라도, 혹은 어렵고 힘들 때에라도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마음과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가 사라지면 우리의 삶은 온통 땅에 묶여버리기 쉽습니다. 우리에게서 감사가 사라지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보느라 하늘을 올려다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풍성함은 하늘로 부터  옵니다. 진짜로 좋은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지 못할 때, 우리는 땅에 갇히게 되고, 그러면 우리의 삶은 가장 좋은 것이 흘러나오는 원천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자칫 땅만 바라보며 살기 쉽고, 또 땅이 전부인 줄 알고 살게 되기 쉬운 우리의 눈을 하늘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감사가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때마다 우리는 하늘을 생각하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우리에게는 땅 뿐만 아니라 하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고, 우리가 땅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은 모두가 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땅에서도 하늘의 복을 누리며 살게 해 줍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인 동시에 우리를 하늘과 하나님이라는 가장 풍성한 샘근원을 잊지 않게 도와주며 거기서 계속해서 흘러 나오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해 주는 은혜요 복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가장 잘 아는 시편이고 아마도 가장 사랑하는 시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 만큼 수많은 찬양들이 이 시를 가사로 해서 지어져 불러지기도 했구요. 한 구절 한 구절이 얼마나 아름답고 확신에 넘치며 또 은혜로운지 묵상할 때마다 이 시편은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든든하게 해 줍니다. 그렇지만 이 시편 안에는, 비록 그것이 과거의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만만치 않은 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아시다 시피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그것도 다윗이 말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면서 지은 자기 인생의 결론과도 같은 시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 23편은 다윗의 인생 전체를 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다윗의 모습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왕의 모습입니다. 물론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기도 하죠. 그렇지만 실제로 다윗의 삶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정말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하며 굉장한 고통과 슬픔이 깃들어 있었던 그런 삶이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천덕꾸러기로 항상 들에서 양을 치면서 자라났고 사울의 뒤를 잇는 왕으로 선택되었지만 오히려 나라를 구하는 공을 세웠기 때문에 사울에게 쫓기게 됩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며, 아기스 왕의 용병노릇까지 했지만 거기서도 쫓겨나고 정말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기는  됩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일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아들에게 왕위에서 밀려나 쫓겨가기도 하고 또 그 과정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도 잃게 되고... 한 사람이 겪어냈던 인생이라고 하기 힘든 만큼 정말 파란만장하고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찬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보면서 시편 23편을 썼다는 것은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지만 다윗은 분명히 그의 말년에 이 아름답고 평안한 시편을 썼습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 어떤 순간에도 다윗처럼 아름답고 평안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누가 뭐래도 우리의 인생은 가장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말년에 자신의 인생전체를 되돌아 보며 노래하고 있지만 시편 23편을 들여다 보면 이 상하게도 그 속에는 과거가 없습니다. 현재만 있고 미래만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과거는 다윗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백과 확신 속에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에서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네 번 나옵니다. 1절의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6절의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펜이 있으시다면 이 네 곳에 밑줄을 긋거나 동그라미를 쳐 보십시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현재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목자인 것, 하나님께서 그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가시는 것,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 주께서 함께 하시는 것, 주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시는 것,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것, 그래서 자신의 잔이 넘치는 것. 이 모든 것이 현재, 그러니까 지금의 일입니다. 그렇지만 시편 23편에서 현재의 일로 표현되어 있는 것 중에서 지금 다윗의 눈 앞에서 경험되고 있는 일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다윗이 현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라는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신앙고백과 확신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확신 덕분에 자신의 미래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설혹 앞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자신을 따를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에게 있어서 그의 미래란 하나님께 대한 고백과 확신 위에 지어진 든든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확신을 어디서 얻은 것일까요? 어떻게 하나님은 항상 그런 분이시고 그렇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을까요? 어쩌다 보니 그냥 믿어졌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믿음이란 결국 은혜니까요.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확신은 그런 식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며 움직여 가시는가 하는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고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런 것들입니다. 다윗의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현재의 일로, 영원히 변치않는 사실로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편에서 과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과거에 반복적으로 경험되었던 일들은 이제 그의 믿음 속에 결코 변하지 않는 영원한 현실로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과거를 되돌아 보며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시편 23편 속에 과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의 부족하고 형편 없었던 과거, 그렇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쳤던 과거 속에서 일하셨던 하나님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변함없이 선한 분이셨으며, 변함없이 선하게 다윗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런 과거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다윗은 하나님께 얼마나 크게 감사드렸을까요? 특히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이 어떠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다윗으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동일하게 행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는 다윗을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윗은 시편 23편을 지금처럼 감동적이고 은혜롭게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가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더 많이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죄를 많이 깨닫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되는 것을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삶은 지루하고 고통스런 하나님의 연단이 있었고 자신의 범죄가 만들어낸 쓴 열매들로 얼룩졌던 그런 삶이었습니다. 정말 엄청나게 힘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그는 더 많은 은혜를 깨달았고, 또 하나님의 변함 없으심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죄인됨을 더 깊이 깨달을 수록, 우리의 삶이 더 많은 연단들로 채워져 있을 수록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깊고 확실하게 경험하고 또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더 분명하게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죄와 연단은 결코 유쾌하고 반길만한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이런 보석같은 은혜들을 놓아두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정적인 경험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더 진한 은혜를 발견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확실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시편 23편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 속에 과거가 없으며 현재와 미래만 있다는 사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 위에 세워진 미래의 확신만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의 많은 은혜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했으며, 또 실수투성이였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허락하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같은 맥추감사절에는 지난 6개월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참 좋은 일이죠. 당연한 것이구요. 그런데, 그 감사가 그저 감사에서 끝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물으실지도 모르지만, 감사가 그저 감사에서만 끝나면 우리 신앙은 과거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감사는 항상 과거를 돌이켜 보며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에서 끝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과거만 맴돌뿐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금까지 은혜를 주신 것은 그 은혜에 감사하라는 뜻도 있지만, 그 은혜를 우리의 미래를 위한 실제적인 능력으로 사용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미래를 위한 믿음의 재료로 사용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다윗은 과거를 감사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과거의 반복되는 은혜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신지에 대한 확실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렌즈를 통해서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선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미래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게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면 또 하나님의 지팡이가 자신을 보호하고 인도할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확신은 단순히 어떤 일에 제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틀림없이 평생 자신을 따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닙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어디까지 이어지고 있습니까? 영원까지, 그리고 하늘나라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확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당연한 확신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하나님이 오늘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하나님은 내일의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은 다윗의 평생동안, 그가 생애를 마치는 순간까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어디까지 인도하실까요? 어디까지 보호해 주시고 어디까지 책임져 주시겠습니까? 영원까지입니다. 하늘나라까지 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공급자가 되어 주신다면 당연히 하늘나라가 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2013년의 절반을 지내고 나머지 절반이 시작되는 시점에 있습니다. 이 한 가운데 서 있는 우리들에게 과거의 6개월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물론 그 6개월 안에는 잘한 일들도 있고, 잘못한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후회스럽고 안타까운 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의 공급자가 되어 주시고 인도자가 되어 주셨으며 또 보호자가 되어 주신 분은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감사하기 위해서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참 귀한 일이고 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사는 감사에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난 6개월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고 또 부어주신 은혜는 과거에 묻히고 맙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질문에 하나 하나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지난 6개월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지내셨습니까? 그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보호자가 되어주시고 공급자가 되어 주시고 모든 것이 되어주셨습니까? 그 동안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셨습니까? 변함없이 여러분을 사랑해 주셨습니까? 그렇다면 앞으로의 6개월은 어떻게 될까요? 남은 2013년은 어떻게 흘러가겠습니까? 그 6개월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섭리하심 가운데 은혜의 시간들로 흘러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변함없이 신실하시며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니 우리의 남은 6개월은 그런 세월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우리는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난 6개월간의 은혜를 생각하고 또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결론은 바로 남은 6개월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과 확신입니다. 


근심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은 아얘 생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은혜를 생각하며 모든 불신앙들을 날려 버리시기 바랍니다. 저 멀리 던져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다윗에게 주셨던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과거의 은혜를 통해 현재의 확신에 이르게 하시고, 미래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을 넉넉히 이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과거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할 때마다 그것을 통해 하늘을 보는 눈을 회복하시고 그 감사를 미래를 위한 믿음의 재료로 사용하셔서 참된 감사의 능력을 소유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