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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7.28.주일오전 -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마가복음 36)


막0801to10 -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마가36).pdf


20130728SM(#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8장 1-10절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귀가 먹고 말을 더듬는 한 사람을 고치시는 사건을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귀와 입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지체입니다. 귀가 듣지 못하면 결국 말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입은 들음으로써 열리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듣지 못하면 우리는 진리를 믿지 못하고 진리 위에서 살아가지 못하며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귀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귀가 닫혀 있고, 그래서 입이 열리지 않을 때 주님은 그런 우리들을 보시면서 탄식하십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도 지난 주일 본문을 계속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에바다!’라는 말씀도 계속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주일보다 더 강하게 우리에게 ‘에바다!’의 은혜가 꼭, 그리고 절실하게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는 반드시 열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우리 몸에 있는 지체에 비유한다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바로 ‘입’의 역할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진리는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릴 때, 비로소 입이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귀로 들을 때, 우리 영혼은 비로소 영혼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을 먹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의 귀가 막혀 있다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몸으로 치면 아직도 입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러면 생존에 필요한 양식을 먹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지 않으면 결국 우리 영혼은 죽습니다. 


요근래 들어서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습니다. 재미있게도 이와 더불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바로 거칠고 맛이 없는 음식들입니다. 현미니 콩이니 수수니 하는 것들, 간도 거의 없는 심심한 것들... 실제로 그 맛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인내가 필요한 음식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이런 것들만 골라 먹으려고 애쓰고, 또 자녀들에게는 억지로라도 먹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조차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을 보면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또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향해서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성도는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부드럽고 잘 이해되는 말씀들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에도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젖만 먹고 평생을 살아갈 수 없듯이, 우리의 영혼 또한 단단하고 거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야, 그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계속 성장하고 성숙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몸을 위해서는 거친 음식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찾아서 먹지만 영혼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들 가는 방향으로 자신도 같이 가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 길에 대해서 별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과연 이것이 바른 것인가, 옳은 것인가,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이건 간에 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그리 바람직한 길이 아닐 때가 더 많았습니다. 오늘날은 분야를 막론하고 간단하고 쉬운 것만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쉽지 않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문화가 세상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문화가 교회 안에도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 안에서도 이미 쉬운 것과 좋은 것은 동의어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앙은 부드럽고 쉽고, 생각과 고민 없이 배울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결코 풍성하고 능력있게 믿는 데까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죽과 젖만 먹으려고 하면 결코 영혼은 단단하게 성장해 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설교를 하고 가르쳐 보니 어떤 설교는 성도들이 잘 듣는데, 어떤 설교는 잘 알아듣지 못하고 또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설교는 쉽고 또 어떤 설교는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설교를 통해 들려올 때는 그 설교가 쉽건 어렵건 간에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그렇지만 별로 관심이 없고 직접 와닿지 않는 내용이 가르쳐 질 때는 귀를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사람이니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영적으로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심한 편식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사탕만 먹고 싶어한다고 사탕만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탕만 먹어서는 제대로 자랄 수 없고 병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입에 맞는 얌냠한 것만 먹으려고 한다면, 진짜 우리 영혼에 필요한 중요한 영양소는 다 놓치고 맙니다. 사실 내가 먹기 싫어하는 음식일수록 내 몸에는 꼭 필요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잘 들리지 않는 말씀일수록 나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기가 쉽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사실 부드러운 음식과 단단한 음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들으려고 하는 말씀은 부드러운 음식이 되고, 듣지 않으려는 말씀은 언제나 단단하고 거친 음식이 됩니다. 


열린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김남준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 다니는 6학년 짜리 남자아이가 하나 있었답니다. 오랫동안 기도하고 또 졸라서 아버지를 교회로 데리고 와서 대예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처음 교회에 오는 것이니 영 어색하고 설교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겠죠. 그래서 꾸벅 꾸벅 졸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아버지를 깨우면서 자면 안된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응. 알았어. 그런데 들으려고 해도 아빤 무슨 소린지 정말 모르겠어.”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아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반문 했답니다. “이상하다. 아빠는 목사님 설교가 무슨 말인지 몰라? 나는 다 알아듣겠는데?” 제가 김남준 목사님의 예를 든 것은 이 목사님이 설교를 어렵고 지루하게 하기로 소문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6학년짜리가 아무리 똑똑한들 아버지보다 이해력이 뛰어나겠습니까? 그런데, 왜 아이는 알아듣고 아버지는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관심 때문입니다. 아이는 어려도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의 설교를 알아들었고, 아버지는 어른이었지만 자기 영혼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훨씬 더 큰 이해력을 가지고도 설교를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영혼에 대한 관심이 바로 그 사람의 영적인 식성이고 또 식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이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이방인 거주지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거기서도 사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이제 주님은 그 지역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의 머리 속에 갑자기 떠나기 전에 꼭 해결해 주셔야 할 문제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모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 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할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사흘 동안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고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는 다시 사흘을 걸어야 돌아갈 수 있는 먼 곳에서부터 따라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냥 굶겨서 돌려 보내면 중간에 쓰러져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배고픔이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굶주림은 이 사람들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원하기만 했다면 언제든지 돌아가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사흘이나 굶으면서도 계속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선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랬다면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갔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 사람들은 왜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을까요? 무엇이 이들을 본능을 거슬러 이렇게 움직이게 했을까요? 그들에게는 무언가 그렇게 해서라도 얻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 있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에게는 무엇이 그만큼 가치있는 것이었고, 또 무엇이 예수님만이 그들에게 주실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사흘을 굶으면서도 꼭 얻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면 참 재미있는 기록들도 많고 또 아름답고 은혜로운 기록들도 많습니다. 먼저 재미있는 이야기부터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여기 있는 이 종이 왜 생겨난 줄 아십니까? 재미있게도 선교 초기의 성도들이 너무 떠들어서 였다고 합니다. 아직 예배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던 때라서 예배당 안에 들어와서도 너무 서로 웃고 떠들어서 거의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종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제 예배를 드릴할테니 조용히 하세요’라는 표시를 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과 갈증만큼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어느 마을 어느 교회에서 말씀집회가 있다고 하면 다른 마을에 사는 성도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며칠씩 걸어서 그 마을까지 갔다고 합니다. 갈 때 그냥 갔을까요? 아닙니다. 대개 사나흘씩 계속되는 집회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기  위해서 집에서부터 먹을 양식을 싸짊어지고 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일주일이나 되는 시간과 삶을 아낌없이 투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 초기에 일어났던 영적인 각성과 신앙의 부흥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런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갈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주 특별한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때 광야에 모여있던 사천 명의 사람들이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전부 다 알아들었을까 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다 알아들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자들 조차도 예수님의 말씀의 대부분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그들이 사흘을 굶어가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런 그들을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 진리에 대한 절실함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그 간절함과 절박함을 닮은 영적인 갈증이 있었고 이것이 이들을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열렬히 귀 기울이게 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사흘 동안의 굶주림도 막을 수 없는 말씀에 대한 갈증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 알아듣지 못해도 듣고 또 들었습니다.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데 그 말씀에 관심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죠. 그래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들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에게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영혼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스러기처럼 떨어지는 말씀으로라도 영적인 배고픔은 꼭 해결해야만 한다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혼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육체적인 배고픔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 또한 연약한 몸을 가진 그들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팔을 걷어 붙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음식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으시고는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마리를 손에 들고 하나님께 감사하신 후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큰 광주리로 일곱 광주리를 남기셨습니다. 오병이어 때와 나오는 숫자만 다르지 거의 비슷합니다. 사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를 남기셨던 예수님에게 그것보다 많은 것으로 더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먹이는 일은 정말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수 백만명을 40년 동안 한차례도 굶기지 않고 먹이신 하나님이시니 이건 정말 일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냥 돌려보내면 중간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주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먹지 못하면 죽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 분도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또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니까요. 그래서 주님은 결코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 필요들도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그 날도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천 명을 불쌍히 여기시며 배불리 먹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사람들은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었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까? 어떤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해 주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육체적인 배고픔을 영적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값으로 지불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필요보다 영적인 필요에 더 민감한 사람들이었고, 그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항상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입는 문제에 매달려서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 교독한 말씀인데요. 주보를 펴시고 함께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 너희가 어찌하여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께서는 그 날 광야에서 바로 이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사천명의 이방인들은 육체의 필요보다 영적인 필요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구했습니다. 빵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덤으로 빵도 덧붙여 주셨습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빵을 구했다면, 그리고 빵을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들은 빵도 얻지 못했을 것이고 영혼은 여전히 배고프고 목말랐을 것입니다. 


오늘 현실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와 계신 성도님들께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부족하고 모자란 현실의 문제에 집중하는 대신에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영혼에 집중해 보시고, 빵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의 현실은 항상 광야와 같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항상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을 배불리겠느냐?’고 불평하며 근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살면 계속 그렇게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린 배를 안고서라도,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여전히 우리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배가 고파도 자신의 영혼을 먼저 생각했던 그 사람들을 위해서 칠병이어의 위대한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권면합니다. 젊었을 때부터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먼저 챙겨야 할 것을 꼭 먼저 챙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챙겨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귀에는 항상 수많은 소리가 크게 들려옵니다. 공부가 중요하다, 돈이 중요하다, 결혼이 중요하다, 성공이 중요하다, 친구가 중요하다 아니다, 그저 즐거운게 최고다... 그러나, 여러분의 귀에 크게 들리는 이런 소리들은 진짜 중요한 것이 외치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 소리는 우리의 본능이, 그리고 거듭나지 못한 세상이 나에게 외치는 소리입니다. 여러분이 따라가야 할 것은 이런 음성이 아니라, 그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너의 영혼을 먼저 챙기라고, 너의 믿음을 먼저 챙겨야 한다고, 그러면 네가 찾는 빵은 내가 책임져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저는 율법적인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여러분에게 이것만큼은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일은 꼭 지키십시오. 여러분이 예배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은혜와 길을 발견하며,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일보다 여러분의 인생에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한 번 제대로 서 보면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깨닫게 될 것입니까?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시간을 내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에 배고픔보다 절실하고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지만 광야의 4천 명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시면서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영혼이 만족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위한 넉넉한 공급자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육체적인 필요와 경제적인 필요에만 쏠려 있는 문화와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 그리고 가난함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배가 조금만 고프면 난리가 나고, 지갑에 돈이 떨어지면 호들갑을 떨어도 영혼은 심각하게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데도 그것을 느끼지도 못하고 문제삼지도 못하는 무감각함이 성도들 속에서도 점점 더 넓게 퍼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도 영혼도 가득 채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은혜를 얻으려면 우리는 먼저 영혼의 입을 열어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다녔던 그 사람들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주님께서 주시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 먹었습니다. 무슨 음식인지 몰라도, 맛을 제대로 몰랐어도 예수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하늘의 만나를 허겁지겁 받아 먹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사흘을 굶으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먼저 찾았던 그들처럼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것 저것 가려서 먹을 만큼 이미 영혼이 배부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입에 맞아도 먹어야 하고, 그렇지 않아도 먹어야 합니다. 부드러워도 먹어야 하고 거칠어도 꼭꼭 씹어 삼켜야 합니다. 영혼의 입을 열고 주시는 말씀을 허겁지겁 받아 먹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배가 고프고, 그 말씀들 중에서 어떤 말씀이 언제 어떻게 우리 삶과 영혼의 어느 곳을 고치고 든든하게 하는 능력으로 바뀔지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배가 고파야 만나를 주시고, 우리의 목이 말라야 생수를 주십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굶주림만큼, 아니 육체적인 굶주림보다 영혼의 굶주림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을 회복할 때, 그리고 그 굶주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을 때, 우리 주님은 분명히 우리의 삶과 영혼을 고루 배부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배고픔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으로 주님의 말씀을 먼저 구하셔서 몸도 영혼도 만족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