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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8.04.주일예배 - 누룩을 주의하라(마가복음 37)


막0811to21 - 누룩을 주의하라(마가37).pdf


20130804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8장 11-21절


자녀를 키워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보면 어떤 일들을 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것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뜨거운 것을 만지면 안된다, 찬 것 너무 많이 먹으면 안된다. 저기 가면 안된다, 이리 오면 안된다, 이건 보면 안된다. 그렇게 안하면 안된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언젠가 저희 집 아이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안돼!”라고 말했다가 문득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말 아이들이 피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위험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히 금지하는 사람도 힘들고 또 금지된 것을 피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아이들도 번거롭습니다. 그렇지만 그래야 아이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으니 금지하고 또 금지된 일을 하지 않는 일은 부모와 자녀로 사는 일에서는 생략할 수 없는 부분임에 분명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보시기에 성경에는 듣기 좋고 편안한 말씀들이 많습니까? 아니면 우리를 아프게 하고 껄끄럽게 하는 말씀들, 이런 저런 것은 행해야 하지만, 또 어떤 것들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는 말씀들이 훨씬 더 많습니까? 아프고 껄끄럽게 하는 말씀들, 그리고 이렇게 해라 그렇지만 저렇게는 하지 말아라라는 말씀들이 훨씬 더 많죠?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런 책이 될 수 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이 성경이 단순한 진리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또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번듯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우리가 피해야 할 위험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성경은 지금 우리 손에 있는 이런 모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어찌보면 우리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잔소리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키우시려는 우리 아버지의 거룩한 잔소리입니다. 우리는 이런 잔소리를 들을 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건 절대로 안돼!”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너무 가까이 있고 그래서 너무 손대기 쉬운 것이지만 나를 제대로 믿고 또 하나님을 믿는데는 이것이 가장 위험한 방해물이니까 이것만큼은 꼭 피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엄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꿈뻑거리는 아기처럼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단락이 끝나는 21절까지 아무리 읽고 또 읽어보아도 그게 뭔지는 전혀 나와있지 않고 예수님의 묘한 질문만 더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제자들은 물론이고 우리들도 반드시 조심해야 하고 또 피해야할 아주 위험하고 강력한 신앙의 장애물입니다. 이것을 주의하지 않고 또 피하지 않으면 참된 신앙의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중요한 이야기를 이렇게 알아듣기 힘들게 말씀하시고서는 그 답도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무슨 심술이십니까? 우리보고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보면 이런 종류의 말씀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요. 이것은 그러니까 그냥 너 나름대로 대충 생각하고 판단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여기 충분히 멈춰서서 아주 어렵지만 너무 중요한 수학문제처럼 꼭 풀고 넘어가라는 뜻입니다. 너무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 그냥 지나칠까봐 중요한 말씀에 충분히 머물 수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유대 땅인 달마누다 지방으로 돌아오시자 마자 예수님은 아주 불쾌한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예수님께 따지고 시험하며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증거를 보이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표적을 요구한 것 자체는 그리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어떤 사람이 예언자라는 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예언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에도 이렇게 신중해야 한다면, 약속된 구원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에는 더 그렇게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의 요구가 아니라 그 요구를 하는 동기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시험’은 약점을 잡기 위한 함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의 요구는 믿기 위해서 증거를 보여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옭아매기 위해서 함정을 판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리새인들 때문에 마음 속으로 깊이 한탄하셨습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 을 보시며 한탄하셨던 하나님처럼 한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이미 그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메시야시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특히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였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입으로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너무 당연한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말씀으로 그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였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예수님에게 당신이 메시야라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따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증거는 보여줄 수가 없으셨습니다. 믿으려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려는 마음으로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보여줄 수 있는 표적도 없었고, 또 표적을 보여줄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서 곧 바로 그들을 떠나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고질적인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 아무리 보여주어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떠나셨습니다. 냉정하게 돌아서서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너무 좋은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너무 너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저 아무 생각없이 속좋기만 한 동네 아저씨처럼 그런 식으로 좋은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분의 때를 정확하게 해아릴 수는 없지만 참고 참고 또 참으셔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예수님을 믿지 못할 때, 또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때, 주님은 어쩌면 우리를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떠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으실지 몰라도 아주 심각하게 멀리 가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는 배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누룩 이야기를 하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떡 이야기를 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마침 떡을 잊고서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일을 나무라시는 것으로 알아듣고 서로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알아들을 수가 있는지, 제대로 알아듣는 것보다 이렇게 알아듣는 것이 더 힘들텐데 제자들은 그렇게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답답해 하시면서 내가 지금 떡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님을 도왔습니다.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도 그 놀라운 일을 지켜보며 또 거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먹을 것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제자들을 나무라시겠습니까?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배 위에 있는 떡 한 덩어리로 직접 만드시면 되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자기들을 나무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다시 그 두 사건을 기억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거나 아니면 ‘그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질문이라도 할까 해서 였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꿈뻑이고 있었습니다. 참 안타깝고 답답한 광경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끝까지 그런 상태로 남아있었을까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제자들 또한 이미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에 물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거절하신 이유는 이미 말씀드린대로 이미 그들에게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주셨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그들이 요구하는 표적 자체가 아주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 말은 ‘하늘로부터 오는 그 표적’이라고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여러분이 제 이야기를 듣다가 저에게 ‘그런데 누가 그랬습니까?’라고 물었고, 제가 ‘그 사람이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여러분이 저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셨다면 제가 ‘그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은 여러분과 제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그 증거’라고 말했고,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알아들으셨으며, 또 성경이 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증거’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가 이런데 있습니다. 시대가 너무 많이 달라져서 당시에는 누구나 다 알던 것을 우리들은 전혀 모를 때가 많으니까요.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면 당연히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이런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통된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은 바로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보다 자존심 상하고 굴욕적인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되찾게 해 줄 힘있는 메시야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야의 모습이 그들의 생각 속에서 아얘 굳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를 전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데도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믿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려면 반드시 로마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야만 합니다. 세상에 없는 사람이 와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는 절대로 메시야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말했던 ‘하늘로 부터 오는 그 표적’이었습니다. 고정관념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게다가 여기에 인간의 욕망이 덧입혀지면 그것은 깨뜨리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맞는 것을 가져다 주어도 아무리 좋은 것을 손에 쥐어 주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성경을 통해 약속하셨던 메시야는 이 세상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져 주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모으시고, 이 세상에 임하는 하늘나라를 말씀하시는 그런 메시야 였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목숨을 내줄 그런 메시야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런 메시야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자신들의 현실적인 바램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그런 힘있는 메시야만을 메시야로 인정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완악함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누룩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눈 앞에서 너무나도 명확한 증거를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거부하고 없애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주의하라고 하셨던 것은 ‘헤롯의 누룩’입니다. 이 헤롯의 누룩이 무엇일까요? 이 헤롯은 헤롯 왕을 말하는 것이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헤롯 왕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헤롯 이야기는 6장에 나오는데요. 6장을 보면 헤롯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세례 요한이 껄끄러워서 세례 요한을 잡아 넣지만 오히려 세례 요한을 두려워 하면서 헤로디아로부터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종종 세례 요한을 찾아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6장 20절을 보면 헤롯이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이야기들을 “크게 번민하면서도 달게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끝내 자기 죄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결국 세례 요한을 죽이고 맙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권력이 그에게 주는 자만심의 유혹과 쾌락의 즐거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현실에서 누리고 있었던 이런 저런 즐거움과 만족들이 그가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 했고,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아서 세례 요한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헤롯의 누룩은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쾌락’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시가 되어 그의 마음 밭에 떨어진 말씀이 싹트지 못하게 가로 막았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 같지만 하나로 묶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눈으로 보여지고 또 손으로 만져지는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바로 이 누룩들의 정체입니다. 한 쪽은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다윗시대의 영광을 회복시켜줄 현실적인 힘만을 소원했고, 다른 한쪽은 이미 가지고 있는 힘이 주는 쾌락과 교만함이 주는 현실적인 즐거움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쪽은 결국 메시야를 죽였고, 다른 한쪽은 자기가 두려워하는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현실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될 때, 거기에는 진리가 설 자리가 없고, 믿음이 있을 자리가 없어집니다. 현실이 가장 중요해지면 하나님도 현실을 위해서 봉사하는 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나의 현실을 위해서 봉사하시는 분이 아니면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맙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등장하는 등장인물들 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실 때, 애석하게도 이미 제자들은 그 누룩에 많이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도 제자들은 계속 어디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떡, 그러니까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영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계속해서 떡 생각에서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을 다시 기억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떡에 얽매여 있는 그들에게 떡과 관계된 기적을 기억하게 해 주셨을까요? 첫째로는 예수님이 떡의 문제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둘째로는 떡에 관한 문제는 예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실 것이니 제자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실 떡, 그러니까 양식은 힘이나 쾌락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절실한 현실입니다.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그것 때문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때때로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시기는 하시지만 그래도 그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고 또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기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게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사시고 죽으시고 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메시야가 아니라 그런 메시야이십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이런 분으로 믿는 것이며, 그 분 때문에 나의 삶과 영혼에 이런 변화가 일어났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르게 믿으면 안될까요? 나에게 내가 원하는 힘을 주시고, 즐거움을 주시고, 또 필요한 것을 주시는 그런 분으로만 믿으면 안될까요? 안됩니다. 죄송하지만 절대로 안됩니다. 이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되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믿지 않으면 절대로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영생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을 가장 심각하게 방해하는 것이 바로 제자들이 물들어 있었던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현실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 힘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며 현실에 집착하는 그런 사고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가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며 또 이미 본 것들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다 보여주시고 들려주시고 또 경험하게 해 주셨는데도 그런 주님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바리새인은 바리새인이니 그렇다고 치고, 헤롯은 헤롯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누룩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혹시 이미 받아들였다면 그 누룩을 떼어 버려야 합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누룩없는 순전한 떡이 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현실에만 집착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래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정말 현실에만 집중하고,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면 그러면 현실의 문제가 해결될까요? 힘만 생각하면 전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만큼 힘이 생기고, 쾌락에 집중하면 항상 넘치는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고, 먹고 사는 문제만 신경쓰면서 살면 먹고 사는 문제로 부터 자유로워 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입니다. 힘이 있을 수록 불안하고, 쾌락에 집중할 수록 허무함이 커져가고, 먹고사는 문제에만 신경쓰면 먹고 사는 문제가 무서워 집니다. 그래서 더욱 거기에 매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현실에 매여서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하나님 대신 현실을 섬기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되어서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믿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제가 뒤늦게나마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삶의 얼마를 맡기든지 맡기는 만큼만 책임져 주시고, 그 만큼만 평안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맡기지 않는 것은 책임져 주지 않으시고 그 부분에서는 평안을 주시지 않습니다. 50퍼센트를 맡기면 50퍼센트만 평안합니다. 90퍼센트를 맡기면 90퍼센트가 평안해 지고 자유로워 집니다. 사실 이것은 굳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고 해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억지로 빼앗으실 수가 없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 불완전하고 힘없는 손에 계속 남아있는 한 항상 불안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현실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리고 현실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도 모두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현실의 문제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삶을 정직하고 거룩하게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입니다. 현실이 어떠하든지 믿음 안에서 풍성함과 평안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고 또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맡긴 것을 책임져 주시면서 즐거워 하시는 분이 저와 여러분이 믿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떡에만 매달려 있는 제자들에게 오병이어 이적과 칠병이어 이적을 생각하게 하셨던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현실의 문제는 나에게 맡기고서 이제부터는 너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말고 나를 위해서 살아보라고 하십니다. 그저 내가 너에게 맡긴 삶과 소명에만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현실만 생각하다가 실망하지 말고 내가 너의 삶을 채우는 것을 경험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이 그리고 그 세상의 현실이 여러분을 자유롭고 풍성하게 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믿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만이 우리를 자유롭고 풍성하게 해 주십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위한 모든 것이 되어주셔서 우리의 몸도 영혼도 만족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있는 자유와 풍성함도 아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만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자유와 풍성함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평강을 여러분에게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그렇게 나눠줄 수 없어서 한스러울 뿐입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있는 자유와 풍성함, 그리고 평강의 비결은 나눠 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첫번째로 믿음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그런 믿음이 싹틀때까지 그런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며 그 믿음을 향해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그렇게 하면서 용기를 내어서 한 번 믿음으로 살아가는 선택을 해 보는 것입니다. 정직하기 힘들 때 정직한 선택을 해 보고, 욕심이 날 때 그 욕심을 조금 내려놓아 보고, 움켜쥐고 싶을 때 손에서 힘을 조금 빼보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그 부분에서 어떻게 하시는가를 경험해 보시고 그 부분을 늘려가시면 됩니다. 이것이 누룩을 제거하고 풍성하고 자유로운 평강으로 다가가는 방법입니다. 


현실은 집착하고 매달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은 한 번 믿음으로 살아보라고,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증명해 보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실험실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으로 풍성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믿는 믿음으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삶을 얽어매고 있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내어쫓고 평강과 자유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