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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8.05.새벽예배 - 곧 그 날에(창세기 31)


창0701to24 - 곧 그 날에(창31).pdf


20130805D (#01).mp3.zip




  문 : 창세기 7장 01-24절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처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실 때도 노아의 신실하심을 보시고 노아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때까지 노아가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그것을 보시고 노아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방주를 다 만들고 그 방주 앞에 서 있는 노아에게 다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앞에서 읽었던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노아의 가족을 노아가 만든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음을 당하는 상황에서 이것은 아주 특별한 은혜임에 분명합니다. 거의 구원을 얻는 것에 방불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노아가 그 은혜를 입었던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 노아와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신 이유는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해 냈기 때문입니다. 의로움은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변함없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보이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하고 이것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근거가 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예수님 덕분에 우리에게 덧입혀지는 의는 전혀 흠이 없는 의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시작점에 있는 의입니다. 우리가 죄인의 상태로 있으면 하나님께 의롭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의를 덧입어 의롭게 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게하시려고 덧 입혀주신 새 옷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새롭게 덧입혀진 새 옷을 입고 끝까지 그 옷을 더럽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놓으시고 계속해서 의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보면 마지막 날 성도들이 흰 옷을 입고서 주님을 만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흰 옷이 더렵혀지지 않아야 주님을 영광스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서 예수님으로부터 덧입은 의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덧입혀 주신 의로 어떻게 하면 더 의로운 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 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사실 이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지만, 그 의로움을 의로움으로 지켜가는 것 또한 생략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의롭게 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의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 몫으로 남겨진 일이니까요.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바로 그 의로움이었습니다. 그가 끝까지 더럽히지 않고 지켜냈던 의로움을 보셨고, 그래서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에게 먼저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지켜냈습니다. 그 120년의 세월이 노아에게 얼마나 힘든 세월이었을까요? 갑자기 함께 잘 살아가던 사람들을 향해서 홍수심판 소식을 전하면서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야 했고, 마른 땅에 어마 어마한 크기의 배를 만들었으니 사람들은 노아를 미친 사람 취급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120년 동안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웠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초지일관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 날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굉장히 예외적인 기록입니다. 본문은 홍수가 일어난 정확한 날짜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홍수가 난 것은 노아가 육백 살이 되던 해, 2월 17일이었습니다. 날짜 자체가 중요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써놓으신 것일까요? 물론 그런 이유도 전혀 없지 않겠지만 여기에는 다른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불러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고 또 여러가지 말씀을 해 주셨지만, 이상하게도 몇 년있다가 홍수가 있을 것이라든지, 너는 방주를 몇년동안 지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전혀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몇 사람을 방문한 후에 “또 올께.”라고 한다면 누가 끝까지 저를 기다리겠습니까? 제 말을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제 말을 그냥 흘러가는 말로 듣는다면 처음부터 아얘 기다리지 않을 것이고, 기다리더라도 조금 기다리다가 “에이, 안 오네.”라고 하면서 그만 두어 버릴 것입니다. 노아가 언제라고 말씀하지도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어 결국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철석같이 그리고 끝까지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셨습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신 날짜가 바로 노아가 600살이 되던 해, 2월 17일 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날짜를 보게 하시는 이유는 비록 하나님께서는 그 때가 언제인지 말씀해 주시지 않고, 또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은 꼭 이루어지게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이미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그것마다의 2월 17일이 있음을 알려 주시고 그래서 비록 우리 삶에서 불안한 순간이 있고,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 있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증거로 주신 것같습니다. 저에게는 이 숫자가 그런 숫자로 보여집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별히 우리나라처럼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전혀 인정되지 않고, 그런 것에 대해서 거의 신경쓰지 않는 성도들과 교회가 더 많은 오늘날의 영적인 환경에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처음 입혀주신 순결한 예복을 끝까지 더럽히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노아에게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들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시대는 변해도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살았던 모든 시대는 단 한 번도 거룩한 삶을 사는 일, 의롭게 사는 일이 쉬운 일이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둔 적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보여드리는 일이 하나님께 더 가치있고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려고 노력할 때, 우리에게 덧입혀 주신 그 귀한 예복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애쓸 때, 믿음이 흔들리고 회의가 찾아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2월 17일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주님 정하신 날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았던 사람들과 그런 일에 관심이 없이  살았던 사람들은 분명히 다른 운명에 처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덧입혀 주신 의를 끝까지 지켜보려고 발버둥 쳤던 사람들은 분명히 그 의가 그 사람을 위한 방주가 되어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영원히 칭찬하시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2월 17일은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분명히 올 것이며, 그 날은 구원의 날이자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동안 최선을 다해서 주님께서 주신 의의 예복을 잘 지키셔서 마지막 날 그 분 앞에 설 때에, 하얗게 빛나는 영광스러운 예복을 입고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