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8.30.금요기도회 -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사도행전 28)

행0502to16 -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사도행전28).pdf


20130830FE (#01).mp3.zip





본문 : 사도행전 5장 12-16절



제가 굉장히 싫어했다가 너무 너무 사랑하게 된 서양의 격언 하나가 있습니다. 그 격언은 바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격언입니다. 제가 이 격언을 싫어했던 것은 이 격언이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고 너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인간의 주도권을 강조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 돕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될 수 없을 뿐더러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은 인간의 최선에 달려 있다는 뜻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이 격언이 신앙적인 삶의 원리를 너무나 명확하게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멋진 격언을 오해했던 이유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너무 둘로 나누어 놓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둘은 따로 분리된 것이겠죠. 그렇지만 신앙인에게 있어서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과 은혜 안에서의 일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은혜 안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도와주신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신앙의 원리일 수 밖에 없는데, 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이후, 저는 하나님의 뜻과 은혜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제 삶과 신앙의 중심기둥 중의 하나로 놓으려고 애쓰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 사건은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나아가서 이제 막 세워지기 시작한 교회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11절은 이 일이 교회 안팎의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만들어 냈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성도들도 이 일을 굉장히 두려워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들도 이 일을 굉장히 두려워 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 일이 교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서 교회를 어렵게 했을 것같지만 성경은 그 일의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났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이 그리고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일어난 후의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에 대한 첫번째 그림입니다. 사실 참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런 커다란 시험이 될 수 있는 일 뒤에 오히려 사도들이 더 많은 이적을 행했고, 또 믿는 사람들은 모이기에 힘썼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손에 의해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더 강하게 역사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제대로 처리했다는 것을 인정해 주셨다는 증거이며 그랬기 때문에 주시는 은혜 였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을 이렇게 처리한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교회와 성도의 정결함과 정직함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베드로는 자신의 감정이나 판단보다 그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도들의 손에 의해, 특히 베드로의 손에 의해 기사와 표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혹은 교회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 자체는 힘듭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열매는 답니다. 기대치 못한 좋은 열매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로 함께 해 주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에 더 많은 기사와 표적이 일어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모이는 일에 더 열심을 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1절은 분명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을 보고 들은 온 교회가 크게 두려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마음이 되었고 더 열심히 모였습니다. 이것은 사실 일반적인 상식을 거스르는 반응입니다. 원래 두려움이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지 않습니다. 반대로 갈래 갈래 흩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흩어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정반대로 반응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웠기 때문에 더 한 마음이 되었고, 더 열심히 모였습니다. 이런 이상한 일이 일어났던 것은 그들의 두려움이 잘못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건강한 두려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두려워 하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 됩니다. 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다가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더 순결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힘쓰게 됩니다. 사람들은 결국 그런 마음을 중심으로 더 하나가 되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더 열심히 모이게 됩니다. 


물론 두려움이 우리 신앙이 주된 이유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이는 참된 신앙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을 친구나 인도자로 생각하며,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받아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의 건강한 긴장감을 없애는 주범이고 또 한 마음으로 모이기에 힘쓰지 않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두려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긴장하게 되어 있고, 또 그 하나님을 될 수 있는 한 가까이 하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두려운 분을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의 모임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즐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성도들은 모임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어 있고, 그것도 분열된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모이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오히려 교회와 거리가 더 멀어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13절은 그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들이 없으나...” 이건 굉장히 강한 표현입니다. 교회는 그 일 덕분에 오히려 더 제대로 세워졌고,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되었지만 그 일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아얘 교회나 예수님 근처에 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일어나야만 하는, 아니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들 중의 하나닙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떨까요?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담고 있고 또 유일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교회와 성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과연 그 어떤 사람들도 거부감 없이 다가올 수 있는 교회, 아무리 큰 죄가 있는 사람도 아무런 불편함 없이 섞일 수 있는 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 바른 교회일까요? 그 누구와도 불편함과 거리낌 없이 섞일 수 있는 성도가 과연 좋은 성도이며, 그 어떤 사람에게도 거리낌이 되지 않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인격적인 부족함이나 윤리적인 결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기피의 대상이 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그리고 진리를 담고 있는 한, 우리는 그것을 꺼리는 사람들과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도 그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화평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과 섞이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이 과연 우리를 진짜로 세상과 섞이게 만들어 줄까요? 우리를 세상에서 인정받게 해 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카이스트를 졸업한 후배에게 들었던 이야기 입니다. 카이스트는 겉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굉장히 문제가 많은 곳입니다. 그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연구의 스트레스를 풀려고 너무 쉽게 부도덕하고 퇴폐적인 문화에 젖어들게 하는 일이 많은 곳입니다. 제 후배가 있었던 연구실에 선배들도 여럿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연구 프로젝트가 끝나거나 혹은 누군가가 새로 들어오거나 졸업을 하게 되면, 자주 자주 술 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계속 빠질 수가 없어서 술자리에 동행하기는 했다고 합니다. 물론 술은 마시지 않았죠. 또 술자리가 끝나면 다들 윤락가로 가곤 했는데, 이 후배는 그것도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한 선배가 있어서 정말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선배가 졸업을 할 때가 되어서 그 선배와 마지막 술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 선배가 이렇게 고백하더랍니다. “난 네가 참 부럽다. 그렇게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켜내는 네가 정말 부럽다.”하고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자기들과 똑같아 져서 그들 틈에서 잘 지내고 또 함께 잘 놀면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앞에서만 그럴 뿐입니다. 뒤로 돌아서면 “뭐 믿는다는 사람이 저래? 저하고 나하고 다른 것이 뭐야?”하면서 무시합니다. 


성도는 부드럽고 겸손한 모습을 지녀야 하지만, 그리고 교회는 항상 열린 문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위해서 기준을 무너뜨리고 거룩함을 깨뜨려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런 기준과 거룩함 때문에 오해를 받고, 그것 때문에 세상과 섞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다워져 가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물론 무엇이 거룩함인지 무엇이 속좁은 고집인지는 잘 분별해야 하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세상과 섞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절대로 두려워 하거나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바르고 거룩하다면 우리는 언제나 세상 앞에서 당당해야 합니다. 


아무튼 그 일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교회나 성도와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선교가 위축되었을까요? 그래서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을까요?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성도와 교회의 거룩함은 물론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는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로 들어오는 훨씬 더 큰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 속에는 거룩함을 찾고, 또 올바름을 찾으려는 갈증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직하고 바른 사람들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끼며 그들과 함께 하고 싶어합니다. 안 그런 사람들 보다는 그런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초대교회가 정확히 그랬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거룩함이 무엇인지 드러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몰려든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그래서 세상과 달라지게 될 때, 그 때 세상은 교회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더 잘 받아들이게 되고 더 쉽게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올바르게 다르기만 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그렇게 더 많은 남녀들의 무리가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다름을 통해, 우리의 거룩함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보게 해 주는 것.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이것이 앞서지 않으면 우리의 복음전도는 그만큼 힘들어 지고 또 빛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를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다음을 얻으니라” 너무 놀라운 기록입니다. 그런데요,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그 때 사도들, 특히 베드로를 통해서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은 바로 예수님의 이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성도들이 그 일에 대해서 바른 반응을 보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놀라운 약속을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기독신문을 보니 한 귀퉁이에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려있었습니다. “작지만 묵묵하고 우직하게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는 교회에 희망이 있다”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왜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는지 조금은 한심한 느낌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큰 교회가 답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큰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힘썼고, 또 사람들은 큰 교회로 몰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세대를 달려온 후, 되돌아 보니 남은 것은 부패와 불명예 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큰 교회들이 전도의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가 아니라 묵묵히 가야 할 길을 가는 작은 교회에 희망이 있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저도 목사지만 어떤 교회가 필요 이상으로 커지고 또 계속 커지려고만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탐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커져가기 때문에 점점 더 탐욕스러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닙니다. 성도나 교회가 스스로를 구별하여 거룩해져 가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교회를 두신 이유이고, 또 하나님은 그런 교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답게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스스로 돕는 성도들의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하고 있습니다. 성도나 목사나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고 이루게 하시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내가 이렇게 하려고 힘쓸 때, 우리가 이렇게 하려고 최선을 다할 때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상관 없이 최고로 잘 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고 개인의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게 해 주시려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이 믿음으로 살아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복된 성도들, 그리고 복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