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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9.06. 금요기도회 - 마땅하니라(사도행전29)



행0517to32 - 마땅하니라(사도행전2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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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5장 17-32절



예루살렘 교회는 말 그대로 모든 면에서 파죽지세로 성장해 갔습니다. 모이는 사람들도 점점 더 많아져 갔고, 그들 중에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상상을 초월할만큼 놀라웠습니다. 복음을 듣고 주님께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병이 치료되는 은혜를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령충만하여 변화된 사람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교회를 칭찬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온 예루살렘을 복음으로 정복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헌신하고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고 계셨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상황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 그러니까 공회의 중심세력이 그들이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에게 사도들과 교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동안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를 율법과 그 율법에 대한 여러가지 복잡한 가르침으로 묶고 그 꼭데기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존경과 인정을 한 몸에 받으면서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갑자기 등장한 나사렛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그렇게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쨋든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것이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그 메세지 자체의 능력도 어마어마했지만 거기에 더해서 사도들이 자신들은 단 한 번도 행해보지 못한 이적들을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었고,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이  제자들과 교회를 향해 점점 더 기울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면 그들이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둔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고 “질투”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의 숨겨진 동기였습니다. 겉으로는 유대교의 수호자로 자처했지만 속으로는 욕심과 질투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질투의 대상을 제거하려고 힘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갑자기 붙들려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큰 위기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으니 승승장구, 탄탄대로만 이어질 것 같았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되돌아 온 것은 승리와 복이 아니라 핍박이었고 위기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 뿐만 아니라, 사탄과 그 사탄에 동조하는 악한 사람들도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탄과 악인의 존재 때문에 이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움직여 가지 않고 우리 기대와는 정반대로 움직일 때도 많습니다. 순종과 헌신 뒤에도 핍박과 손해가 뒤따를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항상 이것을 예측해야 합니다. 아니면 바른 길을 가다가 쉽게 낙심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파도를 넘어 다시 순항을 계속하던 예루살렘 교회 앞을 이번에는 도저히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은 암초가 막아섭니다. 안으로 부터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사탄은 이번에는 바깥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감옥 문은 굳게 닫히고 철통같은 경비가 더해 졌으며, 그렇게 밤은 칠흑같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의 인질구출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셨고 천사들은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도들을 구출해 주셨습니다. 19절을 보면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냈다고 말하는데, 23절을 보면 실은 옥문을 연 것도 아니고 사도들을 끌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감옥 안에 있는 사도들을 감옥 바깥으로 순간적으로 이동시킨 것입니다. 그 날 그 감옥 속에서는 우리가 공상과학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너무 멋진 일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구요. 


현실적으로 볼 때, 교회와 성도가 만나는 위기들이 항상 이런 식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옥문을 여시고 구해주실 때도 있지만, 그저 옥 속에 내버려 두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변치 않는 원리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상황 속에는 사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러면 상황은 결국 하나님의 뜻과 의지대로 움직여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하나님이 모르시거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상황은 전혀 없습니다. 특히 성도들과 교회가 겪는 상황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떤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에 개입해 계시며,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현실만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현실을 주도하고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놓여지는 모든 상황 속에서는 사탄도 움직이고 있지만 우리 하나님도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의 주도권은 사탄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칠흑같은 밤의 감옥 속 같은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하시려고 하시면 언제든지 사방이 훤히 트인 들판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상황은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그래서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 갈 것입니다. 항상 이 믿음에 있어서 만큼은 흔들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을 구출해 내신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나님은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이제 막 꺼내주시고는 숨돌릴 틈도 주시지 않고 이렇게 몰아붙이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다른 곳이 아니라 ‘성전’으로 되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이 생명의 말씀’을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성전에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은 결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 하나 일으키지 못했고,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성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참 기쁨과 자유를 주지 못했습니다. 진정으로 새롭게 만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주님은 그런 말들에 물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참 생명을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복음으로 생명을 주지 못하는 무의미한 말들을 몰아내기로 하셨습니다. 그 일이 너무 급해서 사도들을 감옥에서 꺼내주시자 마자 그들을 다시 붙들려 왔던 성전으로 되돌려 보내셨던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성전이라고 할 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시며 가장 안타깝게 여기시는 것, 그리고 가장 질려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말들이 난무하는 것일 것입니다. 사람에게 참 생명을 주지 못하는 말들, 참 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말들이 가득차 있는 것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초라도 빨리, 그 새벽에라도 성전에서 ‘이 생명이 말씀’이 울려퍼지게 하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어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으셔서 애가 닳아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단 1초라도 다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이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시려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그 생명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능력을 주며, 믿음과 기쁨, 그리고 담대함을 주는 그 생명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열심히 듣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생명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가져다 주는 그 생명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공회원들은 급하게 이스라엘의 장로들까지 불러들여서 아침 일찍 긴급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드디어 나사렛 예수 때문에 생겨난 골치아픈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모여야 할 모든 힘이 거기 모여든 것입니다. 이미 사도들은 감옥에 붙잡아 놓았겠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겠다 얼마나 기세등등했겠습니까? 그런데,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감옥에 있던 사도들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옥문은 꽁꽁 잠겨 있고, 경비병들은 여전히 단단히 지키고 있는데 말입니다. 요즘 “당황하셨어요?”라는 말이 한참 유행인데, 이제 크게 당황하게 된 쪽은 사도들이 아니라 공회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황하다 못해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모든 상황에 대한 장악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던 그들은 이제 앞으로 될 일들을 걱정하고 두려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사도들은 그 시각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당당하게 성전에 서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서서 전하라고 하셨으며 또 왜 사도들도 서서 복음을 전했을까요? 그렇게 하면 곧바로 다시 잡혀 들어갈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복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부끄러워하거나 숨겨야 할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 밖에 없는 구원을 위한 진리, 생명을 주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전해져야 하며, 또 모두가 다 알 수 있게 공개적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에 서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사도들 또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복음 앞에 당당하고 복음을 자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누가 뭐래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누구에게건 복음을 전하실 일이 있다면 부끄러워 하지 마시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 앞에 서서 또다시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 이들을 붙잡으러 갔던 사람들은 대세가 이미 자기자신들이 아니라 사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사도들을 강제로 잡아가지 못하고 사도들이 가르침을 다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연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안 그랬다가는 돌을 맞을지도 몰라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피해자가 당당하게 하시고, 가해자가 오히려 주눅들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피해자가 승리자가 되게 하시고 가해자가 패배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한 피해자가 되었을 때도 너무 당황하거나 지게 겁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들이 억지로 끌려갔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순간이동으로 감옥에서 빠져나온 경험이 있는 사도들은 언제든 또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연행은 자발적인 동행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얼마나 멋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특권을 누립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편에 서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호랑이 소굴로 들어갈 때도 당당하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믿음과 이런 담대함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사도들은 공회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이건 다 예상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나중에 나 때문에 공회에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한 번 천사의 기적적인 구출을 받았겠다 또 이미 알고서 당하는 일이겠다 사도들에게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심문합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우리 말을 무시했다. 그래서 기분 나쁘다. 너희 가르침이 온 예루살렘에 퍼졌는데, 그 가르침 속에 있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우리 입장이 무척 곤란해졌다.” 이것이 악인들의 특징입니다. 악인들은 겉으로는 아무리 그럴 듯한 말을 한다고 해도 결국 그 중심에는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공회는 사도들이 진리가 아닌 것을 전한다고 이런 반응을 보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기들 말을 듣지 않고 권위를 무시했다고,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에게 떠 넘긴다고 화가 나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수세에 몰리게 된 공회원들은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자기들의 속내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런 심문에 대해서 사도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으니 누가 뭐래도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 그리고 사람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매달려서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아무리 큰 힘이 있고 가진 것이 많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일인지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마땅한 길에 서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다른 모든 것들로 부터 자유로워 집니다. 자기 앞에 온 세상이 입을 벌리고 으르렁 된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은 그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며 그 하나님은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의 자유와 담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며 하나님은 내 편에 서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확신에서 옵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때도 일이 우리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고 또 넘을 수 없을 것같은 커다란 장애물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모든 상황을 손에 쥐고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결국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그 모든 일들을 조율하고 섭리해 가실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마땅한 일인지만 고민하시고 최선을 다해 그 마땅한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 편에 서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삶과 신앙의 높은 산지들을 정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