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9.11.새벽예배 - 당시에(창세기 49)



창1401to16 - 당시에(창49).pdf


20130911D (#01).mp3.zip




  문 : 창세기 14장 01-16절


어제와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14장 1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은 아브람이 전쟁통에 포로로 잡혀간 롯을 구해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가만히 보면 잡혀간 롯을 구해오는 이야기가 분명히 본문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사실 그 이야기는 12절부터 16절까지 다섯절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다 그 당시 전쟁을 벌였던 나라들과 그 전쟁 자체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나라들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와 전쟁을 일으키게 된 동기와 전쟁이 벌어졌던 싯딤골짜기라는 곳의 지형적인 특징까지 구구절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내용들을 읽는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왜 이런 이야기가 여기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할 정도이고 나아가서 읽다가 보면 전혀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비록 그렇게 길지 않지만 지루하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 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가장 길게 설명하십니까?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입니까? 물으나 마나죠. 누구나 글이나 말로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 때는 중요한 내용을 길게 다루고 그렇지 않은 내용은 짧게 다루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것처럼 보입니다. 중요한 이야기는 짧게 다루고 그렇지 않은 이야기는 길게 다루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정말 성경이 일반적인 상식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성경이 다른 책들과는 성격이 다른 책임에 분명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말로 사람이 읽도록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그렇게 상식을 무시한 방법으로 기록되어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둘러싼 배경 이야기가 이렇게 길게 기록되어 있는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사람에게 집중하느라고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사람도 우리들처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혼자 살았던 것도 아니고, 또 신앙적으로 아무런 저항이나 방해가 없는 그런 상황에서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성경의 인물들이 살았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할 때가 많습니다. 아브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헤브론으로 옮겨갔으며 거기서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만 생각하면 아브람의 삶이 굉장히 평탄하고 순적하기만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살았던 환경은 이상적이고 평안하기만 한 환경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13절을 보면 아브람이 헤브론에 정착하였을 때, 기거서 마므레와 에스골, 그리고 아넬이라는 세 명의 족장 형제들과 동맹을 맺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의 주변의 정치적인 환경이 도저히 아브라함 혼자서는 주변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을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며, 나아가서 적어도 그 당시 아브람은 그런 부족들과 동맹을 맺을만큼의 세력으로 커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 14장 앞부분의 싯딤 골짜기 전쟁 이야기는 그 당시의 아브람을 둘러싼 환경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불안한 환경이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나라들은 작은 도시국가들이었고, 그 중에서 엘람은 그 당시 그 지역의 가장 큰 강대국이었습니다. 이 엘람은 시날, 엘라살, 고임이라는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 이런 나라들은 엘람의 속국이었습니다. 그 지역이 평화로웠을까요? 아닙니다. 이런 관계 속에 나라들로 이루어진 그리 넓지 않은 지역은 그야 말로 긴장으로 가득 찬 화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전쟁은 일어났고 그래서 그 전쟁통에 롯이 붙잡혀 가게 됩니다. 직접 전쟁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소돔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휘말려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또 증명해 보였던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였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강대국들 틈에서, 그리고 자신과 동맹을 맺은 나라들과의 관계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냈으며 결국 그 믿음을 사용해야 할 순간이 오자 주저없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말입니다. 


저는 설교를 하고 또 성경을 가르치다가 문득 내가 우리 성도들의 현실과 너무 먼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목사이다 보니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우리 성도님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현실이 얼마나 치열하고 복잡한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곧이어 저는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원리가 변하지는 않는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내가 현실을 잘 모르고 그래서 나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그것을 들려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브람이 살아갔던 환경처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도 너무 복잡하고 만만치가 않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관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고, 일본에서는 원전이 터져서 우리의 먹거리까지 안심할 수 없고, 국민들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실체도 없는 이념 전쟁에 휩쓸려 있고 경제는 언제 다시 일어서게 될지 기약이 없고, 일터는 도저히 믿음과 양심을 제대로 지켜내기 힘들만큼 거칠고 부정직하고... 사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도 쉽지 않지만, 신앙을 가진 우리들이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 후서 4장 7절의 말씀인데요.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위해서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가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인생처럼 피곤하고 고통스럽고 그래서 힘겨웠던 인생이 또 있을까요? 그렇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삶의 조건을 핑계 삼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소홀히 하거나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끝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켜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위해서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값진 보석으로 만드는 것은 그 다이아몬드 원석을 깎아내는 연마석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나 믿음을 방해하는 방해물들과 이런 저런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의 핑계거리로 삼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의 믿음을 연마하여 정말 값진 보석으로 만들어주는 연마석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앞을 가로 막을 때, 그래서 안된다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렇기 때문에 이걸 넘어서서 더 값진 믿음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인정하고 칭찬하시는 믿음, 그리고 자신도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믿음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