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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9.13. 금요기도회 - 바리새인 가말리엘이(사도행전 30)



행0533to42 - 바리새인 가말리엘은(사도행전30).pdf


20130913FE (#01).mp3.zip




본문 : 사도행전 5장 33-42절

세상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때로는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소명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이익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생명보다도 하나님의 소명이 훨씬 더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함을 덧입은 제자들. 이 사람들은 그야 말로 복음전파라는 소명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복음때문에 붙잡혀 옥에 갇혔고 기적적으로 풀려났지만 새벽같이 천사의 말에 따라 성전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붙들려 갔지만 자신들을 심문을 하는 대제사장을 향하여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거기 모인 공회원들과 장로들을 향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전합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당신들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게다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까지 분명하게 전해줍니다. 이 정도면 복음에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비록 공회와 장로들이 자신들을 핍박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 또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 복음이 필요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리가 만무합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는 오히려 거기 모인 사람들을 극도로 자극했습니다. 공회는 앞 뒤 볼 것 없이 제자들을 곧바로 처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율법사이며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진정시켰습니다. 성경은 그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고 소개하는데, 그래서 공회 안에서도 이 사람의 권위는 굉장히 존중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가말리엘이 거기 모인 사람들을 그렇게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공회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 지도자들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 이름에 어울리게 처신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이어서 말합니다. “너희가 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감정적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은 서로가 하나님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두 집단이 대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공회원과 장로들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고 믿고 있고, 그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보기에도 제자들의 주장은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증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가말리엘은 예수님의 경우와 굉장히 비슷한 상황을 기억하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는 드다이고 나머지 하나는 갈릴리의 유다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과 비슷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교 이단을 만든 사람들이었죠. 가말리엘은 결국 이 두 사람이 죽거나 도망치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져 버렸다고 말합니다. 가말리엘의 이야기는 나사렛 예수가 만든 이 집단의 경우에도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예수가 죽음을 당한지 얼마 안되었으니 시간이 흐르면 분명히 드다와 유다의 경우처럼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여기에 한 가지를 가능성을 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가 진짜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공회가 하려는 일은 정말 큰 일 날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전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릴테니까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나왔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정말 뛰어난 분별력에서 나온 명쾌한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가말리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에게 신앙인으로써 무언가를 바라보고 판단할 때, 그리고 또 그것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자기 입장보다는 진리이냐 아니냐에 먼저 신경을 썼습니다. 그도 바리새인이었고 또 공회원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힘을 얻게 되면 여러가지 면에서 불리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백성들의 마음이 자신들을 떠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는 이익을 넘어서서 무엇이 진리인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공정한 위치에서 우리가 맞을 수도 있지만 저들이 맞을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모든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또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내가 무조건 맞다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란 하나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뜻도 되지만 계속해서 진리를 찾아가고 알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뜻도 됩니다. 진리를 찾고 알아갈 때 가장 중요한 태도는 바로 나 자신을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가 진리가 아닌 내가 아는 것이 진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저는 책을 참 많이 읽는 한 목사님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손에서 책을 놓질 않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 보고 설교를 들어보면 전혀 발전이 없습니다. 그 목사님의 세계는 좁은 상태 그대로 이고, 틀리는 것은 여전히 틀립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몰랐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는데도 저렇게 성장과 변화가 없을까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대화를 나누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이 책을 읽기는 읽되 책에서 배우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습니다. 그 책이 자기 생각과 같으면 그저 자기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드는 재료로만 사용합니다. 그 책이 자기 생각과 다릅니다. 그러면 그건 무조건 틀린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전혀 변화와 발전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 옳은 사람은 책을 만권을 읽는다고 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마련입니다. 


가말리엘은 제자들의 주장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잘 아는 바리새인이고 또 율법사로서 제자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특히 그는 제자들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는 놀라운 일들을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들이 가짜로 판명날 때까지는 맞다 아니다를 판단하면 안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이야기를 해 주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가말리엘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이 보기에 예수의 제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행하는 일들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든지 둘 중의 하나 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말리엘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들 사건은 둘 중의 하나로 끝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망하든지 아니면 진짜로 하나님의 일로 증명되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가말리엘은 이 사람들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맞는다면 그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것이니 말입니다. 가말리엘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절대적인 주권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제가 부쩍 이단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요. 난리는 정말 난리입니다. 이제는 신천지가 공원에서 천막을 쳐 놓고 전도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가말리엘이 사용한 두 번째 원리,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 안에서 판단하고 올바른 대처방법을 찾는 일은 우리가 이단을 대할 때도 똑같이 필요합니다. 물론 지금 한국 교회와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이단들은 옳은지 그른지를 평가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성경과 기본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완전히 거스르고 있고 사회와 가정 망가뜨려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요즘 한국 교회가 이단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교단들과 교회들이 이단에 대한 교육과 경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저는 지금 한국교회가 이렇게 하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째는 진짜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단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진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짜를 욕하고 또 가짜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고 해도 진짜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교회는 가짜에 집중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진짜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등안시해 왔던 진짜에 집중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자리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면서 둘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말리엘처럼 말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이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두려움을 갖게 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우리가 이단과 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을 두려워 하면 이단을 이기지 못하고 휘둘리게 됩니다. 우리가 진짜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이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진짜를 통해 우리는 가짜를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우리 속에 가짜가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고, 무엇보다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가짜는 없애고 진짜만 세워놓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를 알고 있고, 또 가짜를 무너뜨리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주일 오후면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 교리는 그냥 하나의 특별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제 마음은 굉장히 절실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진짜를 알고 진짜를 확신하게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 그리고 또 가짜에 속지 않는 실력을 갖추도록 돕고 싶어서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루한 줄 알면서도 매주 복습까지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배워보시고 또 익혀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 하나 다 외우지는 못할지라도 뭐가 우리 편이고 뭐가 아닌지 탁 들으면 감이 올 정도의 실력은 꼭 갖추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단이고 뭐고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확실히 맞는 쪽에 남아있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의 이야기를 들은 공회와 장로들은 그의 이야기에 설득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채찍질을 한 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여기 가말리엘이 없었다면 제자들이 어떤 심한 일을 당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가말리엘을 통해서 이 위기에 개입하셨고 다시 한 번 기적적으로 제자들을 구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일에 개입하셔서 그 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적인 방법이고 나머지 하나는 간접적인 방법입니다. 말도 안되는 불리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다든지, 어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나의 절실한 필요를 아주 정확하게 채워주신다든지 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행하시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가말리엘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일하신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날 가말리엘은 제자들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그래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런 지혜를 발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그저 자신의 정직함과 진중함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 날 제자들의 목숨을 살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제자들과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와 일꾼이 된다고 할 때, 우리는 자꾸 우리가 무슨 일을 직접 하는 것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긍정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은 그런 일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행하는 하나 하나의 일을 통해서 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과 행동들은 모두 다 우리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그리고 성품과 믿음을 통해서 정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그리고 우리의 성품과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공회의 유력한 회원이었으면서도 다른 공회원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진리에 대한 겸손함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저 그러한 자신의 성품과 기준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교회에 큰 유익을 끼치는 일이 되었고, 나아가서 공회 또한 더 큰 죄를 짓지 않게 막아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나 하나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신앙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나 하나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얼마나 중요하게 사용하고 계신지 모르기 때문에 나 하나는 어쩌면 하나님께는 어마 어마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항상 정직한 마음과 겸손함을 지키시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나님 나라의 역사 속에서 가치있고 긍정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