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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9.15.주일오전 -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마가복음 43)



막0930to37 -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마가43).pdf


20130915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9장 30-37절


영어에 ‘inner circl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하면 핵심층, 중추세력이라고 번역되는 말인데, 주로 어떤 큰 집단 안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 inner circle이 중심이 되다보니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여기에 속하기를 바라게 마련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기도 하고, 조직이 원하는 충성을 바치기도 하고, 또 커다란 공을 세우기 위해서 애쓰기도 하고... 그러나 모두가 다 그런 노력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수가 아니라 소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정말 커다란 특권을 누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열 두 제자에 속하기 위해서 특별하게 기울인 노력이나 세운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의 inner circle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심하게 귀신들렸던 한 아이를 고쳐주시고 갈릴리를 통과해서 가버나움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기를 원하셨고, 또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배제한 상태에서 열 두 명의 제자들하고만 동행하셨습니다. 31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 말할 수 없지만, 열 두 제자들에게만큼은 꼭 말해주고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들이 있었고, 그래서 이번 여행은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특별한 여행이었습니다.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inner circle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하고만 여행을 하셨고, 또 그들에게만 가장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애석하게도 그렇게 특별하게 들려주시고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알아듣지 못했으면서도 두려워서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묻지도 못했습니다. 


메시야가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였다고 하더라도 왜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며 되묻지 못했을까요? 과연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꾸중을 두려워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차라리 모르는 채로 있는 것이 훨씬 더 맘 편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까지 모 방송국의 코메디 프로그램 속에 “불편한 진실”이라는 이름의 코너가 있었습니다. 이 코너의 제목처럼 진실이란 거의 항상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는 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절대로 그럴 일이 아닌데도 건강검진을 받으로 가는 일을 꺼립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자기 건강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말씀의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님의 말씀의 ‘진실’을 알기를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너무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을 잃게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기 싫은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어쩌면 이미 알아들었을지도 모릅니다. 3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원래 이 동사들은 ‘가르치고 계셨고, 말씀하고 계셨다’고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여행하는 내내 그렇게 하고 계셨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의 잡히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자체는 아무리 길게 이야기하려고 해도 그렇게 길게 이야기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짧은 것을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가르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액면 그대로의 사실만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을 풀어주시면서 충분히 설명하시고 가르쳐 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알아듣지 못했고, 또 두려워서 질문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제자들이 의도적으로 이미 알아들은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열 두 제자들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갑자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본문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제자들은 아마도 가버나움으로 오는 내내 무언가에 대해서 서로 논쟁을 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길에서 서로 논쟁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그 길을 함께 걸으면서 해 주셨던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말씀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이것이 제자들이 대답을 하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논쟁을 벌였던 것은 무언가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이나, 영원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저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높냐?”하는 주제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다른 이들을 위해서 생명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런 말씀에 대해서는 귀를 닫아버리고 내내 누가 높으냐, 누가 잘났냐,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이냐 하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같은 길을 가는 스승과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과연 제자들이 계속 그렇게 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해 주셔야만 했던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문득 예수님께서 하시는 질문이 나에게 하시는 질문이고,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처럼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우리 인생의 길, 그리고 우리 신앙의 길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처럼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치열하게 경쟁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과연 우리는 주님께 어떤 대답을 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서로 서로, 그리고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투고 경쟁했던 이유에 대해 어떤 대답을 드릴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삶과 신앙의 길에서 더 높아지고 더 커지는 일 때문에 다투고 경쟁한다면 우리들 또한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알아듣지 못했으면서도 두려워하면서 질문조차 하지 못했던 것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덕분에 한 자리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더 높아지고 싶었고, 더 커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의 고통과 수난에 대한 참된 진실을 알게 된다면, 더 이상 자신들의 그런 욕망을 향해 달려갈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진실을 알기를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고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서 있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첫째가 되는 것! 이것이 제자들 모두의 관심사였고, 또 그들이 예수님께서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동안에도 서로 티격태격 다투었던 이유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다투게 만들었던 그 문제에 대해서 대답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것이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인재등용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의 사고방식과 제자들의 가치관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기준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아지려고 하면 높아져야 합니다. 높아지기 위해서 다투고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온 우주의 왕이 되실 예수님의 기준은 정반대입니다.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합니다. 가장 높아지려면 가장 낮아져야 합니다. 첫째가 되려면 마지막이 되어야 하며, 또 그 자리에서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사람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혀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가장 낮아진 사람, 가장 마지막으로 내려가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된 사람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넘겨 주실까요? 그것은 그 사람이 제일 많이 예수님을 닮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 빈민촌에서 살아가셨습니다. 가장 낮은 사람들과 같아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을 죄인들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음마저도 가장 낮은 자들을 섬기기 위해 가장 낮은 죽음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런 분이 왕이 되시면 과연 어떤 사람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주실까요? 누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어주실까요? 가장 높아질 수 있었지만 가장 낮아진 사람, 그렇게 해서 가장 많은 자들을 섬길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게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방식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일 것이니 그런 사람이 아니고는 그 나라의 높은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높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영원한 바늘방석이 될테니까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계셨던 가장 낮은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그 곳을 예수님의 왕좌가 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낮은 자리는 바로 우리의 영원한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기꺼이 낮아져야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도,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첫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도 진심으로 낮아지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미 높아지려면 높아져야만 한다는, 높아지려면 이기고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낮은 자리와 섬겨야 하는 자리에 대한 오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과연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기쁠 수 있을까요? 섬기는 자리에 있는 것이 당당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대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꺼이 자신을 낮추고 또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는 세상이 아니라 주로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그런 자리로 가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억지로 하면 좋지 않습니다. 낮아지는 것,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하면, 할 수 없이 하면 그것보다 힘들고 불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꺼이 낮아지고 또 우리가 원해서 섬기는 자리로 갈 수만 있다면 낮아지는 것도, 섬기는 것도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왔고 또 예상하는 만큼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낮아짐과 섬김에 대해서 던져 보아야할 또 하나의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연 누가 기쁘게 낮아질 수 있을까?’, ‘누가 과연 기꺼이 섬기는 자리로 내려갈 수 있을까?’하는 질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기쁘게 낮아질 수 있을까요? 누가 섬김의 자리로 기꺼이 내려갈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해 보면 답이 금방 나옵니다. 한 사람이 100만원을 가지고 있을 때와 1000만원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떤 경우에 10만원을 내놓기가 더 쉬울까요? 당연히 1000만원을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1억원이 있다면 더 쉽게 10만원을 내놓을 수 있겠죠.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낮아져도 속상해 하고, 조금만 더 섬겨도 손해보는 것같이 느끼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사람들을 섬기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마치 100만원 밖에 없는 사람처럼 가난한 내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쁘게 낮은 자리로 가고 그리고 기꺼이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는 사람은 그렇게 하여도 마음의 기쁨과 행복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지 않을만큼 부요하고 넉넉한 내면을 지닌 사람입니다. 1억원이 있기 때문에 10만원쯤은 어렵지 않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겉사람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존재를 지닌 사람을 가장 높게 평가하실까요? 속 사람이 가장 높고 충분히 풍성해서 자신을 낮추고 또 자신을 나누어 주어도 속상해 하거나 화내지 않을 수 있을만큼 예수님을 닮고 또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아닐까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장 낮아져서 가장 많이 섬긴 사람의 차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낮아져서 섬기는 일에 대해서 불쾌해 하고 힘들어 하는 이유는 실은 그 일 차제가 힘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자신의 속사람이 궁핍하고 낮은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만큼 풍성하고 높은 속사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꺼이 자신을 낮은 자리로 내려보내고 그래서 기쁘게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성도들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은혜와 넉넉한 영혼의 만족을 약속받았고 또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니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결코 그렇게 하기 싫은데 억지로 이를 악물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있다는 전제 아래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풍성하고 넉넉한 속사람을 회복해 가고 있다는 전제 아래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늘의 높은 자리는 낮아져서 섬겨야 할 목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 땅에서 나눠주고 섬기면서도 행복해 할 수 있을만큼 그렇게 풍성하고 높은 속사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실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상급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어린아이 하나를 둘러선 제자들 한가운데 세우시고는 그 아이를 꼭 안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결국 이 말씀은 어린아이 하나를 꼭 안아주듯이 그렇게 영접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은 무슨 일이든 자녀들이 중심, 아이들 중심이 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사시던 시대에는 어린아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말이 문헌에도 기록될 정도로 정도로 어린아이는 무시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치없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런 어린 아이를 꼭 안아 주시면서 제자들을 향해서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제자들에게 큰 충격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린아이’라는 말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종’이라는 뜻으로도 쓰였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더욱 더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서로 커지고 높아지겠다고 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짜로 높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영원히 높아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영원히 그리고 제일 높아지려면 가장 낮아져서 모든 자를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말로하는 교육은 끝났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누구나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 노예나 마찬가지 취급을 받던 어린아이를 하나 데려다가 제자들 한가운데 놓고 꼭 안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어린아이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그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가장 높은 자리가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구요. 

성도 여러분, 과연 낮아져서 다른 이들을 섬긴다는 말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시해도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누구도 가치있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가슴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귀하게 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낮아져서 섬긴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머리 속에만 있는 미덕도 아니구요. 그것은 그렇게 내가 제일 무시하기 쉽고 중요하지 않게 여기기 쉬운 그 사람을 가슴으로 끌어안고 진심으로 귀하게 대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섬김의 전부는 아니지만 섬김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우리나라는 사회 뿐만이 아니라 교회에까지 유교적인 문화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아래 위가 너무 분명합니다. 나이에 따라서, 또 직분에 따라서 낮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일하고 섬기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높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위에서 부리고 섬기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는 젊은 사람들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볼 때, 자꾸 일할 사람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에는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바라볼 때, 특히 어떤 의미로든 낮다고 여겨기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일꾼으로 보고 일을 시키려고 하기 전에 그 사람을 가슴으로 안아야 하며, 진심으로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일을 할 때 하더라도 그 일을 하게 될 사람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렇게 대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우리도 모르게 무시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자꾸 실용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봅니다. 만약 그 사람이 현재나 미래에 나에게 유익을 주거나 혹은 불이익을 끼칠 가능성이 크다면 혹은 어떤 목적에 유용할 사람이면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길에서 서로 다툰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기가 차지해야할 자리의 경쟁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 일에 있어서는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 무시하며 다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둘 중의 한 군데에서만 높아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땅에서도 높아지고 하늘나라에서도 높아지는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둘 중에서 어디서 높아지는 것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이 땅위에서 높아지려고 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높은 자리, 그리고 섬김을 받는 자리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높아짐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습니다. 잠시잠깐입니다. 올라가 봐야 금방 내려와야 합니다. 그 후에는 영원히 낮은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높아지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늘나라에서 높아지기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높아져야 영원히 영광스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안에서 충분히 부요하고 넉넉한 속사람을 지닌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꺼이 낮은 자리로 가서 기쁘게 섬길 수 있을 정도로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내적으로 실력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볼 때, 나의 유익과 효용가치를 기준으로 사람을 보는 대신 귀하디 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시해도 좋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고, 어떤 사람이든 진심으로 안아줄 수 있고 또 그 기쁘게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는 이렇게 항상 열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할만큼, 가장 낮은 자를 진실로 귀하게 여길만큼 풍성한 존재를 지닌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영원한  inner circle에 속하기 위해 서로 아름답게 다투고 경쟁하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