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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9.25. 새벽예배 -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였고(창세기 54)


창1601to06 -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였고(창54).pdf


20130925D (#01).mp3.zip




  문 : 창세기 16장 01-06절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무엇보다도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디까지는 내가 해야할 영역에 속해 있고 또 어디서부터는 하나님께 속한 영역인지 그것을 잘 분별하고 또 그 경계를 잘 지켜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를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본다면 어디까지가 믿음이고 또 어디서부터는 무책임한 것인지를 구분한다는 것이 특히 어렵습니다. 믿음을 핑계로 나몰라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반대로 자신이 나서서 다 하려고 들 수도 없고, 때로는 이런 진퇴양란 속에서 굉장히 혼란스럽고 고민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이런 것들을 분별하고 또 대처하는데 익숙해 졌지만 목회 초년생 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내가 생각해야할 부분이 어디까지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많은 고민과 고통, 그리고 혼란과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현실의 어디까지를 생각하고 또 책임지며 살아가야 할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책임과 또 믿음 사이의 경계는 굉장히 모호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너무 인간적인 수단에만 의지하여서 살아가거나 혹은 정반대로 너무 무책임해지기도 합니다. 


아브람이 사래와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고향인 갈대아 우리를 떠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온지 10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늘의 별처럼, 그리고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또 약속하셨지만 두 사람에게는 하늘의 별은 커녕 품에 안을 한 아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아브람이나 사래나 모두 다 자기들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씨앗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래는 슬슬 자신이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꼭 내가 낳은 자식일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저 아브람의 아들이면 되는 것이 아닐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래가 낳을 아들이라고 꼬집어 말씀하신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사래는 차선책을 생각합니다. 기약없이 점점 성취가 불가능해지는 약속만 붙들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높이기로 했습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자신의 종인 애굽사람인 하갈을 첩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사래는 그게 아들을 얻을 가능성이 훨씬 높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인지 도 모른다고 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에 설득이 되었고 그래서 결국 하갈을 첩으로 맞아들여 하갈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임신이 되었으니, 그리고 아브람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2세를 얻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분명합니다. 사래는 하나님의 심중을 너무도 지혜롭게 잘 헤아렸던 것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아마도 누구나 그렇게 판단할 것입니다. 형식상으로는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일은 이렇게 평탄하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하갈의 적적치 못한 행동 때문에 이야기는 오히려 가장 잘 풀려나가는 그 지점부터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하갈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는 그 뒤로는 주인인 사래를 대놓고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래는 이 일의 책임을 아브람에게 돌립니다. 당신이 하갈을 싸고 도니까 종까지 나를 멸시한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종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보기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비록 하갈이 자신의 아이를 가졌지만 아브람은 하갈은 여전히 사래의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처리를 사래에게 모두 맡겼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견디가 못한 하갈은  광야로 도망치고 맙니다. 


곰곰히 살펴보면 이야기의 결말이 굉장히 이상합니다. 하갈을 아브람의 첩이 되게 한 장본인,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녀를 얻으려고 했던 장본인이 바로 사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럴 듯하게 여겨서 받아들이고 그래서 사래가 아이를 잉태하게 만들었던 사람은 바로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아이도 낳기 전인 하갈을 학대해서 광야로 내몰아 버리고, 아브람은 그렇게 하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얻을 자녀를 약속의 자녀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인 것 같은데, 두 사람 모두 너무도 쉽게 하갈과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내쫓아 버립니다. 만약 두 사람이 그 아기가 약속의 자녀임을 진짜로 믿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높은 줄 모르는 하갈 뿐만 아니라 태중의 아기까지도 내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일을 이렇게 처리했다는 것은 이미 아브람도 사래도 그 아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눈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보다 자신의 상황이 더 커질 때 저지르기 쉬운 실수이고, 그 실수가 만들어 내는 비극인 것 같습니다. 우리 눈에 점점 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이 보일 때, 우리는 언제나 차선책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차선책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 차선책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 순전히 인간적이라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비슷한 인간적인 일은 처음에는 아주 좋습니다. 열매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그 뜻을 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열립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고, 또 그것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진짜 뜻과 계획을 방해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우리 삶의 이 곳 저 곳을 삐걱거리게 만들기 쉽습니다. 우리는 그제서야 ‘아! 이게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지만 실은 이미 처음 그 일을 생각할 때부터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입니다. 아브람과 사래처럼 말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처음부터 하갈을 첩으로 취하는 일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갈이 문제를 일으키자 보였던 두 사람의 반응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조급해졌을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싶어졌고 그래서 하갈이라는 차선책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물론 어디까지가 믿음이고 어디서 부터가 인간의 책임인지를 분명하게 구별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별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는 기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미 본문에 나와 있는 것이지만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조급한 마음 때문에 마음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멀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내가 그것을 선택할 때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대로 마음이 불편할 때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어떤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한 번 끝까지 붙들고 기다려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이 되신다는 말을 들을 때는 위로를 받고 기뻐하지만 막상 길이 없어지면 하나님을 기다리기 보다는 내가 길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면 이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셋째 누군가 더 손쉬운 차선책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그 차선책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래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아브람이 따르지 않았다면 하갈로 인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듯이 우리 삶 속에서도 비록 차선책을 따라야 할 때에라도 마음에 확신이 생길 때에만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성급함을 다스려 나가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성급함을 다스려 나가시며 분별력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내가  해야할 일과 하나님을 기다려야 할 일들을 분별하는데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에게 그런 믿음과 분별력을 따르는 용기와 지혜가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태두리 안에서 언제나 평안할 것이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느긋함과 분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 가운데 흘러가는 우리의 삶을 우리들과 하나님을 위한 최선의 삶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