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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9.27.새벽예배 -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창세기 56)



창1610to16 -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창56).pdf


20130927D (#01).mp3.zip




  문 : 창세기 16장 10-16절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가끔씩 힘이 빠지고 두려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성도인 우리를 가장 힘 빠지게 하는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 또 나같은 사람도 중요하게 여기시며 보살피고 계시는가?하는 의문이 생길 때, 거기에 대해서 확신이 없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를 가장 두려워하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내 편을 안들어 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아닌가 합니다.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나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나처럼 작은 자도 세밀하게 보살피신다는 확신이 있고, 또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결국 내 편에 서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를 흔들 수 있는 대부분의 불안요인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허겁지겁 도망치던 하갈은 더 이상 갈 수가 없어서 샘곁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허탈함과 두려움, 그리고 슬픔과 무기력함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런 자신에게 누군가가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서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갈이 가장 낮은 곳에 앉아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은 하갈을 혼내시거나 벌을 주기 위해서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갈을 위로하고 또 하갈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허락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갈이 이전에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하갈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믿었다고 하여도 그야 말로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듯 그렇게 하나님을 믿었을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깊은 관심이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종이고 또 애굽사람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갈에게도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11절을 보시면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갈의 몸에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이스마엘이라고, 내가 이런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내가 너의 고통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이름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의 세심한 관심이 들어있는 이름입니까? 이집트 사람 그리고 여종인 하갈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이 자기같은 보잘 것 없는 인생 또한 보살피고 계시며 또 하나님깨서는 자신의 작은 신음까지도 들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또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사신 귀하디 귀한 그 분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그 분께 어떤 존재들이겠습니까? 비교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는 아마도 하갈보다는 훨씬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사람들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그 어떤 순간에라도 우리에게 무관심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 어떤 환경 속에서라도 우리를 보살피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과 자기연민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인 여종 하갈을 세심하게 보살피셨던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항상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변함없는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 삶과 신앙의 기둥으로 삼아야 합니다. 꼭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주인인 사래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주신 자리이고 그래서 하갈이 있어야 할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갈의 입장에서는 굉장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도망친 종이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과 더불어 엄청난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이것은 거의 아브람에게 주셨던 약속과 방불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엄청난 약속을 하갈에게 주셨을까요? 어쨋든 이스마엘도 아브람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위한 복이 되게 하실 아브람의 혈통을 따라 이 세상에 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마엘에게서 나올 자손들은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리 저리 치고 받고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또 자신도 고통스럽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복만 놓고 본다면 그 복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최고로 큰 복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따라야 할 마땅한 명령을 하시면서 거기에 가장 복된 약속을 덧붙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할 때, 항상 기억해야 할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뒤에는 항상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굳이 기록되어 있지 않을 때도 있지만 분명히 순종의 복에 대한 약속은 분명히 덧붙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꺼이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기가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편들어 주십니다.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틀림이 없어도 믿지 못하고 그래서 순종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순종 뒤에 놓여있는 은혜와 특별한 편들어 주심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하갈은 정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인이고 종이며 또 잘못을 하고 도망치고 있는 자신을 자신의 주인의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또 자신의 주인처럼 대우해 주신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아마 하갈은 자기 볼이라도 꼬집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그 말 그대로 그 샘에 이름을 붙입니다. “브엘라해로이” 직역하면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우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항상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죄짓고 도망치는 계집종 하나 까지도 놓치지 않고 보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항상 나를 보살피고 계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항상 우리에게 복된 약속을 주시며 우리의 편을 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에 마르지 않는 은혜의 우물 하나를 파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그 우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우물의 생수를 마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브엘라해로이로 우리를 찾아오실 것이며, 또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며 우리를 바른 자리로 되돌려 보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술에서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가?”라는 은혜의 경탄이 그치지 않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