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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0.01.새벽예배 -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창세기 57)


창1701to14 -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창57) 복사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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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 창세기 17장 01-14절



단 한 절 차이이지만 창세기 16장 16절에서 17장 1절까지의 사이에는 장장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아브람은 86세에서 99세가 되었고 이스마엘은 열 세살이 되었습니다. 그 시간동안 하나님은 아브람을 그냥 홀로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년 동안이나 단 한 번도 나타나시거나 그 어떤 말씀도 주시지 않으셨던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다시 나타나셔서 주신 말씀치고는 정말 수수께끼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게 행해야 한다” 두 말씀의 연결도 이해하기 힘들 뿐더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해야 한다는 말씀의 구체적인 뜻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아브람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이 언약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언약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약속의 내용은 이전과 비슷하지만 이 언약 속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새 이름이 들어있고, 하나님께서 그런 이름을 붙여주시는 이유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은 그저 큰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수많은 나라들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비슷한 듯 전혀 다른 이름을 붙여주신 이유는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대하시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고, 아브람 또한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 답게 살며 행동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브람을 아브라함이 되겠다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개신교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카톨릭에서는 세례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게 되는 순간 성경인물이나 성인의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너는 이전의 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참된 성도들을 닮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개신교의 성도들인 우리들에게는 이런 이름이 없지만 그래도 이런 이름보다도 훨씬 더 영광스러운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크리스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 생기는 그 어떤 이름보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 속에 온 우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그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람들입니까? 우리에게 그 이름이 붙여지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대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이름 안에는 이제부터 내가 너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꺾을 수 없는 의지가 들어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이 이름을 받게 되고, 그 이름을 받는 순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모두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과 뜻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존재와 삶을 지닌 사람이 되지는 못합니다.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고 곧바로 그가 열국의 아버지 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거나 또 실제로 열국의 아버지가 된 것은 아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우리가 꼭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제는 나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편에서 아직 그 일을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소명으로 받아들여서 더 온전한 그리스도의 것이 되기 위한 길을 갈 때, 우리는 점점 더 완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더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또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의 조상이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과 똑같은 언약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해 보면 과연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9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아브람과 함께한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남자들은 모두 다 할례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또 앞으로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식솔들의 자손으로 태어날 모든 남자들에게는 할례를 주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이 할례가 굉장히 강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론 그것이 상징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자녀생산에 있어서 철저히 무능해진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넓게 생각하면 이제는 나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99세가 되어서 자녀생산이 완전히 불가능해진 아브람에게 찾아오셔서 열국의 아비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적어도 이것은 아브람이 아직은 자녀를 낳을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수많은 사람들의 조상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하고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는 아브람 자신에게도 어렵기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브람에게는 자녀를 낳을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이 수많은 나라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단 한 명의 아들을 두는 일조차도 그 가능성은 완전히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을 눈으로 또 몸으로 확인하고 또 인정하게 해 주는 표시가 바로 할례이고, 아브람 집안의 모든 남자들, 지금 있는 남자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아브람에게서 태어날 모든 남자들의 몸에 이 흔적을 남길 것을 엄하게 명령하셨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 때에야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새 이름을 주실 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한 우리의 완전한 무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만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할례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아직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 일에 있어서 진전도 없고, 여전히 내 힘과 의지와 지혜로만 살아보려는 펄펄 살아움직이는 자아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마음에 할례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 삶을 최고로 복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초대이기는 하지만 또한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될 수 없는 그런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13년 만에, 전혀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아브람에게 나타나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기 전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절대로 아들을 낳지 못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것은 아브람이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소망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아들 하나 낳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는 수많은 백성들의 조상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아브람은 절대로 자신이 아브라함이 될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또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해 진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런 믿음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으며 그런 믿음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 몰어넣으실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해서 참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어가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능력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안되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마음의 할례를 받아 그러한 참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과정은 절대로 우리 자신의 성을 쌓아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신앙의 과정은 바로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산성으로 삼는 과정입니다.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여서도 넉넉하고 흔들림 없이 살게되는 그런 놀랍고 능력있는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시는 것을 가장 원하시고 또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또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제 우리 마음과 영혼에 할례를 받으십시다. 그렇게 해서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십시다. 그래서 없는 것에서 있게 하시고, 불가능에서 가능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직접 경험하여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