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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0.08.새벽예배 - 내게 무슨 낙이 있으리요(창세기 60)



창1809to15 -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60).pdf


20131008D (#01).mp3.zip




  문 : 창세기 18장 09-15절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꾸 자기가 앞서 나가고 또 자꾸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세우려고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실제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믿기는 믿습니다. 그렇지만 내 생각이라는 틀 안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사고라는 범위 안에서만 그렇게 합니다. 그 범위를 넘어가면, 그리고 그 범위를 넘어가지 않더라도 그 범위 안에 있는 일들조차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고 또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이 가장 선하고 온전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항상 자기가 움직이려고 하게 마련입니다. 바로 여기서 편법이 나오고 불법이 나오고 신앙적으로 보면 불순종과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과 반대편에 존재하는 불신앙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생각만을 의지하면서 그 생각에 불가능할 것 같으면 아얘 포기해 버리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얘 무기력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동만 없다 뿐이지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나는 길을 가거나 혹은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는 것과 별로 다름이 없는 행동입니다. 참 믿음의 사람은 이 두 가지가 아니라 제 삼의 길을 갑니다. 


천사들과 함께 아브라함으로부터 걸지게 대접을 받으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찾으셨습니다. 그 때 사라는 당시의 관례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장막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장막 안에 있다고 대답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사라를 데리고 오라고 하지 않으시고는 다시 한 번 해 주셨던 약속을 되풀이 하셨습니다. “내년 이맘 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아게 아들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당연히 사라는 장막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사라도 그 소리를 듣고 그야말로 실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이제는 정말 자녀를 낳기에는 너무 늙어 버렸고, 특히 사라는 이미 오래 전에 갱년기를 완전히 지난 터라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웃으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사라가 생각하기에 상황적으로 볼 때, 자신이 자녀를 갖는 즐거움은 아무래도 누리기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시니 그게 그렇게 우스웠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자기가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완전히 포기한 일을 누군가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그것도 너무나 당연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항상 그 앞에서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런데, 그 웃음은 그냥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이 섞인 어이없는 웃음입니다. 이런 반응이 사람을 향한 반응이라면 그것은 상식적인 것입니다. 능력이 거의 비슷한 수준에서, 그러니까 내가 불가능한 것은 그 사람도 불가능한 그런 비슷한 수준에서 되어지는 이야기이니 그렇게 밖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반응이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라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도 아니실 뿐더러 그 분께는 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장막 문 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은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정색을 하시면서 되물으셨습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하나님은 왜냐고 물으셨습니다. 왜냐는 질문은 언제 합니까? 이해하기 힘들 때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사라의 불신앙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에게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만약 하나님께서 이 질문을 순서를 바꿔서 하셨다면 이런 상황이 연출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나 여호와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겠느냐?” 사라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네. 하나님! 당연히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죠.”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을 들은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렇지? 내가 내년 이맘 때까지 너에게 아들을 낳게 해 줄께.” 그러자 사라는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에이! 하나님, 농담도 잘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지만 더우기 제가 이 몸으로 어떻게 아들을 낳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하죠.” 이런 것을 두고 이율배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믿는다면 90세인 사라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도 함께 믿어야 하는데, 앞의 것은 당연히 믿지만, 뒤의 것은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들 또한 이런 모양의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어떻다는 것은 믿습니다. 그것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이 나에게도 그렇게 해 주신다는 것은 글쎄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믿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다는 것은 잘 믿지 못합니다. 견디기 힘든 일이 생기면 그 사랑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내 삶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닥치면 그것은 하나님이 실수하신 일이 됩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이런 모양이라면 그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그 하나님이 언제나 나에게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 또한 믿을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그 믿음으로 인해서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 인내 끝에 하나님이 정말로 그렇게 행하시는 마지막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라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믿는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흘러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할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니 기쁨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면, 그래서 즐거워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포기해 버린다면 그것은 상식이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그 조건이 만들어 내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전혀 하나님이라는 엄청난 변수,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모든 일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확신이며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일어나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 가능성만큼은 항상 열려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쉽게 절망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전혀 즐거움이 없을 수 밖에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라는 생각으로 즐거움과 기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것 같은 상황을 변화시켜서 우리에게 다시 기쁨을 주실 때가 많으실 뿐 아니라, 그런 상황이 전혀 바뀌지 않더라도 그냥 우리 마음에 기쁨을 부어주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옥에 있어도 자유케 하시며, 가난해도 가장 부요한 마음으로 살게 하시며, 고통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과 마음을 열어놓으시기 바랍니다. 그 곳을 하나님께서 마음껏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터가 되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믿음이 우리를 웃게 만들어 줄 것이고, 우리에게 웃음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