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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0.10.새벽예배 -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창세기 62)


창1901to11 -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창62).pdf


20131010D (#01).mp3.zip




  문 : 창세기 19장 01-11절


성도로 사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첫째는 우리 안에 아직 완전히 처리되지 못한 죄성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둘째는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이 땅에서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죄가 죄인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소명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인데,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떠내려가게 하는 강물과도 같아서 우리를 자기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게 될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을 떠난 천사들은 저녁 때에 소돔에 도착했습니다. 소돔은 롯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축들을 먹이기 위해서 기름진 땅을 택했던 롯은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점점 소돔과 고모라 쪽으로 옮겨갔고, 그 곳의 주민들과 어울려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변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죠. 그러나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화려함을 포기하지 못하고 또다시 소돔에 자리를 잡고 살아갑니다. 소돔에서 살다가 그런 어려움과 위기를 경험했다면 그것을 거기서 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알아들어야 했지만 그렇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 삶에 대해서 세상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기도 하고 또 강한 영향력이기도 합니다. 한 번 맛본 세상의 달콤함은 거미줄과 같이 우리의 영혼을 얽어매고 좀처럼 우리를 풀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번 주님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주님께로 돌아오는 일을 그렇게 힘들어 하는지도 모릅니다. 


롯은 성문에 앉아있다가 나그네들이 자기 집쪽으로 향해서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의 풍습으로 보면 성문에 앉아있는 것은 그 성읍의 유력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롯은 소돔 성의 유지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롯은 이런 이유로 그 성읍을 떠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성문에 앉아서 그 도시의 어른과 영향력 있는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좋았으니까요. 사람이 명예와 체면에 사로잡히게 되면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대중매체를 통해서 정치가들이 하는 일을 보면서 도대체 왜 저러는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삼척동자도 다 분별할 수 있을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이미 그들이 권력과 명예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롯은 저녁 때에 성읍에 도착한 두 사람, 정확하게는 두 천사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자기 집으로 간청하여 영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롯은 두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롯은 비록  소돔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완전히 소돔사람들처럼 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소돔사람의 상식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배운 방법을 따르고 있으니까요. 두 천사는 아브라함의 집에서만큼은 아니지만 롯으로 부터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건은 두 천사가 잠자리에 들기 바로 직전에 벌어졌습니다. 소돔성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서 롯의 집을 에워싸고 천사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소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서 상관한다는 말은 성관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소돔 사람들은 생전 처음보는 나그네 두 사람을 겁탈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남자를 말입니다. 소돔이 얼마나 타락한 성읍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소돔은 정말 입에 담기도 싫을 정도로, 지금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완전히 썩어 있었습니다. 


롯은 먼저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고 그 문에 기대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아주 적절한 충고였습니다. 그러나 롯은 그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데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롯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제안을 합니다. 두 사람의 손님대신에 자신의 두 딸을 내주겠다고 하다니 말입니다. 두 사람의 나그네를 보호하려고 한 일은 잘 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두 딸을 내어주겠다고 하다니 이것은 아버지로서 뿐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말도 안되는 제안입니다. 이것은 그가 손님을 대접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아직도 아브라함의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도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소돔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굉장히 다른 두 가지의 사고방식이 롯 속에 함께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보면 우리도 모르게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기준과 세속적인 기준이 섞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사실 두 가지는 적어도 한 사람 안에서는 서로 섞여있을 수 없는 것들인데도 그렇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 속에 파고드는 세속적인 가치관이나 사고방식들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고 잘 걸러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또한 롯처럼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신앙적이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똑같이 닮아있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롯의 제안을 받은 소돔 사람들은 롯을 향해 물러나라고 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롯은 소돔의 유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일부는 자기 노력으로 또 일부는 아브라함의 영향력으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롯은 자신이 소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소돔의 유지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소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롯이 자기들 성읍에 들어와 유지로 살아가는 것도 싫었고, 그렇게 성문에 앉아서 재판관 노릇을 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롯은 그저 자기들 땅에 들어와 머물면서 꼴사납게 자기들을 지도하려고 하는 이방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이렇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속하려고 해도 세상에 속할 수 없는 그런 나그네 말입니다. 우리가 과연 세상에 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아 질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 중에 완전히 섞일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러려고 해서도 안되겠지만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그들과 소속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생각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되었다면 확실히 달라지자고 말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믿지 않는 세상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들과 같아지려고 할 때, 그들은 우리에게 화를 냅니다. 우리를 무시합니다. 소돔 사람이 롯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롯은 소돔에서 그들을 위한 대안이 되고 또 선교사의 역할을 해야했을 것입니다. 거기 살았을지라도 그들을 위한 빛과 소금이 되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롯은 우리에게 같아질 수 없는 것, 같아져서는 안되는 것과 같아지려고 했던 한 사람의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크리스챤입니다. 크리스챤에게는 크리스챤에게 어울리는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삶의 모습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을 붙들고 그것에 따라 사는 삶이 바로 이 세상에서의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찾는 방법이고, 그 자리에서 존중받고 가장 자신답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우리답게 살아도 우리를 세우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소돔과 같은 이 세상에서 항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